소설리스트

대몽주-47화 (47/1,214)
  • 47화. 흔적

    심협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오른 다리를 반 척(尺) 정도 앞에 천천히 내려놨다. 그러자 발바닥이 수면에 닿자마자 손바닥만 한 소용돌이가 다시 생겨나 발을 받쳐주었다.

    심협은 더욱 기뻐하며 같은 방법으로 두 발을 교차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 익숙해지니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았다.

    “와하하! 성공이다!”

    심협은 기뻐하며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체내의 법력을 전달하는 게 조금 늦어진 바람에 발아래 소용돌이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물을 몇 모금이나 마신 후에야 다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지만, 눈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무명천서>에 기재된 수련 공법에는 일부 법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심협이 방금 시도한 것은 제1층 법결에 포함된 법술 ‘답수결(踏水訣)’이었다.

    답수결은 이름 그대로 물 위를 걷는 법술이었다. 대단한 신통력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꽤나 실용적인 법술이었다.

    그 외에도, 수련이 제4층까지 이르러 벽곡기에 진입하면 ‘피수결(避水訣)’이라는 법술도 연마할 수 있게 된다. 물에서도 자유롭게 호흡하는 법술로, 물로 인한 상해를 입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련이 제7층에 이르러 응혼기에 진입하면 ‘분수결(分水訣)’을 연마할 수 있다. 답수결이나 피수결과 달리 진정한 신통력을 가진 것이라, 이 법술의 수련을 마치고 법력이 충분하다면 강이나 호수도 가를 수 있다.

    이러한 법술들 외에도 <무명천서>에 통령역요(通靈役妖 : 영을 통하여 요괴 다루는 법술) 법술이 담겨 있었다. 이 법술을 통해 물에 사는 각종 요괴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무명천서>에 따르면, 이는 통령역요의 법술은 무명법술 전체에서 가장 대단한 법술이었다. 또한 피수결이나 분수결과 달리 수련 경지와 무관해 법력이 낮아도 수련할 수 있다. 다만 법력이 낮으면 약한 요괴들을 상대하기도 벅차다. 공법의 정진을 거듭할수록 더 강한 요괴들도 물리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요괴를 물리칠 수 있는지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어쩌면 찢겨 나간 부분에 기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통령역요 법술은 무척 복잡해 답수결은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심협은 관련 구결만을 훑고는 무척 심오하다고 느꼈을 뿐, 제대로 그 뜻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니 시전은 더욱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답수결도 자못 심오한 법술이었다. <무명천서>에 따르면 자질과 오성(悟性)이 뛰어난 자라 해도 오랜 시간 반복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심협은 혹시나 싶어 시험 삼아 해본 것인데 이리도 쉽게 성공하니 스스로도 뜻밖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심협은 흥분을 가라앉힌 후 해골 문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화양공 입문에 이르는 데만 해도 2년이나 걸렸는데, 이제 며칠 만에 소화양공이 대성에 이르더니 무명법결 제1층 수련을 마치고 답수결까지 별다른 수련도 없이 성공하다니…….’

    연이어 큰 경사가 찾아오자 오히려 걱정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심협은 어려서부터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래 병을 앓아 의원이 되지 않았더라면, 여러 서적을 참고해 금향옥 같은 명약을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집안이 어찌 그 짧은 시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지금의 행운도 나중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당장은 알기 어려웠다. 어쨌든 당장은 모두 대단한 복이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이제는 그만 돌아가볼까?”

    심협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방향을 틀어 계곡가로 가 옷을 챙겨 입고는 순식간에 고을 밖 큰길에 이르렀다.

    때는 한창 해가 내리쬐는 정오 즈음이라 큰길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온갖 냄새가 몰려왔는데,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그는 냄새를 통해 최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갔는지, 심지어 그 행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냄새에 콩 비린내가 섞여 있으니 분명 콩국이나 두부를 판매하는 장사꾼이 지나갔을 것이다. 땀 냄새가 진득한 이 사람은 몸을 많이 쓰는 막일꾼일 테지. 그리고 또 이 냄새는……. 야밤에 분변 처리하는 일꾼인 모양이군!’

    심협은 이렇게 냄새만으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고을에 들어선 심협은 귀를 쫑긋 세운 채 객잔으로 향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여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부인이 장사꾼과 가격 흥정을 하고 있고, 또 두 늙은이가 길가에서 몰래 남의 뒷말을 하고 있었다. 근처 주루 안에서 점소이가 소리치는 것도 분명하게 들려왔다.

    심협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고는 더 먼 곳의 소리에 집중해봤다. 한 객잔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소리, 2층 객실에서 들려오는 인사 소리…….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 심협은 자신이 머무는 작은 객잔으로 돌아갔다.

    식당으로 사용하는 대청은 지금이 가장 분주할 때였다. 이 작은 객잔은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지금 대청의 모든 식탁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심 공자님, 출타하셨었군요. 소인이 방금 몇 차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출타하신 모양이다 했지요.”

    대청에서 일하던 소삼자는 심협을 보고는 급히 맞이하러 왔다.

    “내 방으로 식사 좀 가져다주게. 기름진 고기는 빼고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해 주게나.”

    심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충 식사를 주문한 뒤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뒤돌아보더니 손짓으로 소삼자를 불렀다. 소삼자가 다가오자 그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지난번처럼 부적용 종이와 주사, 검은 개의 피, 그리고 지필연묵(紙筆硯墨)을 부탁하네. 식사와 함께 방으로 가지고 오면 되네.”

    말을 마친 심협은 낯빛도 변하지 않은 채 작은 은자 조각을 소삼자의 손에 찔러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청을 나섰다.

    소삼자는 바삐 움직이는 심협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고 기뻐하며 은자를 챙겨 주방으로 갔다.

    한편, 방으로 돌아와 짐을 싸려던 심협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방 안에 냄새가 한 가지 늘어 있었던 것이다. 분명 떠난 지 얼마 안 된 냄새였다.

    “분명 주인장 후씨의 냄새인데…… 내 방에 와서 무얼 한 게지?”

    심협은 눈을 감고 냄새의 강약으로 주인장이 방에서 움직인 경로를 대강 추측해봤다.

    머릿속에서 서서히 어렴풋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문으로 들어와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도 않고 다시 나갔다.

    “한 바퀴 돌아보고 바로 나갔으니 무언가를 찾으러 온 것 같지는 않군. 그저 내가 걱정되어 와 본 것인가?”

    심협은 천천히 눈을 뜨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때,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밖에 이르러 발소리가 멈추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열려 있소. 들어오시오.”

    심협은 냄새를 맡으며 입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손에는 큰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한쪽에는 식사, 다른 한쪽에는 부적용 종이와 주사 등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소삼자가 아니라 주인장 후씨였다.

    “소삼자가 대청에서 일을 보느라 바빠 제가 대신 왔습니다.”

    주인장 후씨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쟁반을 받아 들려고 했다. 그러자 주인장 후씨가 이를 말렸다.

    “심 공자는 우리 객잔의 귀한 손님인데 어찌 직접 쟁반을 받으시게 하겠습니까?”

    주인장은 탁자에 직접 음식을 차리고는 식사 후 그릇을 치우려는 듯 한편에 서서 기다렸다.

    배가 고팠던 심협은 체면 차리지 않고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는 입을 닦았다. 그리고 쟁반에 있던 부적용 종이와 주사, 검은 개의 피 등을 살펴봤는데, 예전에 소삼자가 준비해온 것과는 많이 달랐다. 주사에는 작열하는 영기(靈氣)가 담겨 있었고, 검은 개의 피에는 체내의 양기와 비슷한 양기가 느껴졌다. 종이마저 보통의 종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중후한 느낌을 풍겼다.

    다만 주사에 담긴 영기는 너무도 미약했고, 검은 개의 피에 깃든 양기는 희박했다. 종이의 질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닌 데다 자세히 보면 재질 자체가 질이 떨어졌다. 이러한 재료들로는 소뢰부 같은 낮은 수준의 부적은 아쉬운 대로 쓸 수 있겠지만, 높은 수준의 부적을 쓰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이 물건들은 모두 도사들이 부적 만들 때 쓰는 것인데, 공자께서 이 방면에 정통하십니까?”

    주인장은 그릇과 수저를 치우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더니 불쑥 물었다.

    “정통이라니, 가당치 않소. 약간의 식견이 있을 뿐이오.”

    심협은 들고 있던 주사를 내려놓으며 되는대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게 부적이 한 장 있는데, 그 부적을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해주신다면 거금으로 사례하겠습니다.”

    주인장은 기쁜 기색으로 간절히 청하였다.

    “좀 전에 내 방에 왔던 것도 그 일 때문이었소?”

    심협의 물음에 주인장은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멍해 있다가 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시, 심 공자…… 공자께서 어찌…… 그 일을……?”

    허락 없이 마음대로 손님방에 들어가는 행위는 거의 절도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 일이 알려지면 객잔의 명성에 크게 먹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주인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긴장하실 것 없소. 이 일은 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이오. 다만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협은 주인장이 반응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공자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 제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소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 온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여 걱정이 되어 들어와 본 것입니다. 공자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주인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추더니, 급히 해명했다.

    심협도 주인장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께서 은혜를 베풀어 나를 구해준 바 있으니 이 심모(沈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최선을 다하겠소. 다만 부적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아주 대략적인 것만 알 뿐이니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소이다.”

    주인장은 재빨리 품에서 비단으로 싸인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을 풀자 네모반듯하게 접혀 있는 노르스름한 부적이 나왔다.

    “공자, 한번 보시지요.”

    주인장은 종이를 펼쳐 심협 앞에 놓으며 말했다.

    심협이 살펴보니, 부적의 한쪽 모서리가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 마치 어떤 책에서 찢은 것처럼 보였다. 부적 문양으로 미루어 소뢰부보다 좀 더 어려운 부적 같았다.

    이에 심협은 호기심이 발동했는데, 부적 아래에 작게 쓰여 있는 ‘재운을 부르는 부적’이라는 글귀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주인장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은 자신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부적을 쓰려는 것인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심 공자, 이 부적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주인장은 심협의 표정이 변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오, 아무 문제없소.”

    심협은 손을 내젓고는 평소처럼 담담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인장 후씨는 평범한 사람이니 바라는 것이 무사평안과 재운 등이라고 해서 비웃거나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심히 부적을 살피던 심협은 무언가 의아해졌다.

    여의부(如意符), 진댁부(鎭宅符), 초재부(招財符, 재운 부르는 부적) 등은 가장 널리 쓰이는 부적이다. 예전에 수련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각종 잡서를 읽었을 때, 온갖 서적에 부적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초재부만 하더라도 각기 다른 10종 정도의 부적 문양을 봤으니 진위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주인장이 내놓은 초재부만큼 복잡한 부적 문양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 초재부 문양에는 어떤 묘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충 써낸 가짜 부적 같지는 않았다.

    주인장은 심협이 한참이나 말없이 부적을 보고만 있자, 감히 방해는 하지 못하고 숨죽여 조용히 기다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