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4화 (44/1,214)
  • 44화. <무명천서>

    심협과 주인장은 객잔 별당의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의 방에 이르렀다.

    방 앞에는 잎이 무성한 용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는 창문과 마주한 채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에 감싸인 방은 퍽 아늑해 보였다.

    “바깥 길과 거리가 멀어 가장 조용한 방입니다. 가구며 장식품도 모두 저희 객잔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지요. 이 방이 어떠하신지요?”

    주인장은 문을 열어 심협에게 들어갈 것을 청하였다.

    그의 말대로 방을 꾸민 가구와 장식품은 모두 장미나무로 만든 고급이었다. 용과 봉황이 조각되어 있고 고풍스러웠다.

    “마음에 드는군요. 여기 묵겠소.”

    심협은 가구나 장식품보다는 구석지고 조용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이번에는 며칠을 묵으시겠습니까?”

    주인장은 심협이 방을 마음에 들어 하자 기뻐하며 물었다.

    “2, 3일 정도 머무를 것 같소. 따로 분부하지 않으면 점소이를 보내실 필요도 없소.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신분도, 이곳에 머문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주시오. 유 의원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오.”

    “안심하십시오, 공자님. 제가 다른 능력은 없어도 입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게다가 유 의원은 왕진을 나가 며칠은 지나야 돌아올 겝니다.”

    주인장은 심협의 말에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좋소.”

    심협은 주인장의 호언장담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피로하실 텐데 푹 쉬십시오.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아, 저녁 식사는 괜찮소. 그저 쉬고 싶군요.”

    심협은 웃으며 사양했다. 사실 지금 그는 소화양공이 능숙해져 체내에 양기가 충만했고, 기운이 넘쳐 조금도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지친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시지요. 물러가 보겠습니다.”

    주인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심협은 주인장이 지나치게 친절한 것이 의아했지만, 딱히 잘못된 것은 없는 듯했다.

    ‘뭐, 내가 춘화현에서 이름난 명의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주인장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심협은 곧바로 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과 창문을 잠갔다. 이어서 침상에 앉아 석합을 꺼냈고, 그 안에서 고서를 꺼냈다.

    심협은 책을 손으로 받쳐 들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책을 뒤집어 가장 뒷장을 살폈다. 보아하니 절반쯤 찢겨 나간 흔적이 있었다. 아까는 옛 전서체에 신경이 쏠려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쳤던 부분이었다.

    “아! 맙소사, 절반만 남아 있단 말인가?”

    심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심협은 그리 고민하지 않았다.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다시 말하면 우혁이 말했던 우천사라는 자도 <무명천서>의 반만 얻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그토록 놀라운 힘을 발휘했으니, 그저 수명을 늘리겠다는 자신의 목적쯤이야 이루고도 남을 테니까.

    심협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책의 첫 장을 펼쳐 한 글자 한 글자씩 읽었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반 시진이 지났다.

    심협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들더니, 돌연 탄식하며 책을 던져놓고는 그대로 침상에 나자빠져 버렸다. 내용을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옛 전서체 문자가 많아야 한 장에 4, 5자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심협이 알기로는 이 전서체 문자는 굉장히 오래됐고 꽤나 어려운 문자다. 그로서는 그저 잡서에서 드문드문 기재된 것을 본 기억이 전부였다. 글자를 알지 못하면 해독할 방법이 없으니 그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전서체부터 배워야 한단 말인가?’

    심협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어디서, 누구에게 배운단 말인가? 춘화현에 있을 때에도 옛 전서체에 통달한 서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옛 전서체를 아는 이를 찾는다 해도 이 책의 내용은커녕 존재 자체를 다른 이에게 알릴 수는 없다. 이 정도 보물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사심이 생길 수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천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단 말인가? 나룻배를 운영하던 사공이 옛 전서체를 알 리가……. 됐다. 정 안 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찬찬히 옛 전서체부터 배우면 그만이지. 이미 소화양공이 능숙해져 수명도 길어졌을 테니까.”

    심협은 몸을 일으켜 다시 책을 들고 펼쳤다. 그리고 이내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심협은 급히 책을 침상에 놓아두고는 슬며시 문으로 갔다. 그러고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살짝 열어 작은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하지만 좁고 긴 복도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심협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문을 잠그더니 이번에는 창문을 열어봤다. 그곳에는 잎이 무성한 용나무가 있을 뿐,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이상하군. 분명 누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심협은 창문을 닫아 잠그며 중얼거렸다. 그는 분명 귓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꼭 ‘왕즉직(枉則直)’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커다란 종이 울리듯 머릿속에서 메아리쳐 잠시 멍해졌을 정도였다.

    “요 며칠 무리했더니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심협은 미간을 주무르며 침상으로 돌아가 다시 <무명천서>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귓가에 그 소리가 울려왔다.

    ‘곡즉전(曲則全)…….’

    소리는 이번에도 크게 울려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심협은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귀를 막았고, <무명천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심협은 그 상태로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선 채, 반쪽짜리 <무명천서>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심협은 마른침을 삼키며 쭈그려 앉아 조심스레 오른손 검지를 뻗어 <무명천서>의 표지를 슬쩍 건드렸다. 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귓가에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렇다면 <무명천서>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란 말인가?”

    심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두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잡고 들어 올려 눈앞에서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종이 위의 은색 옛 전서체 외에는 보통의 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설마, 그 귀신이 이 책에 붙기라도 했단 말인가?”

    심협은 오싹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팔을 문질렀다.

    아까 혼절했다가 깨어난 뒤 돌연 소화양공이 능숙하게 되었는데, 분명 그 귀신과 관련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막 깨어났을 때 작열감을 느낀 것 외에는 아무 상해도 입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기에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책장에 닿았을 때, 머릿속엔 다시 연이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부자발, 고유공…… 언자연……(不自伐, 故有功…… 言自然…….)’

    순간 심협은 우뚝 손을 멈췄다. 그러더니 세 손가락이 짚고 있는 곳을 살폈다. 거기에는 세 개의 옛 전서체 문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심협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는 세 손가락을 잠시 책에서 떼었다가 다시 놓아봤다.

    ‘언자연(言自然).’

    또다시 심협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안이 아닌 기쁨이었다.

    “그렇군! 그런 것이었어! 와하하! 이제 알겠다! 어쩐지…….”

    심협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무명천서>는 손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니 우천사 같은 평범한 뱃사공도 혼자서 <무명천서>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옛 전서체를 해독할 필요 없이 그저 손으로 더듬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방법을 알게 되자 심협은 지체 없이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심협의 손가락이 첫 번째로 누른 글자는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옛 글자 중 하나인 부(夫) 자였다. 그의 손이 그 글자에 닿자마자 머릿속엔 ‘부’라는 소리가 스쳤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바로 두 번째 글자로 옮겼다. 그렇게 손가락을 옮겨가며 십여 개의 글자를 읽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돌연 현기증이 느껴졌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심협은 그저 피곤할 뿐이라 생각하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든 후 다시 다음 글자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러자마자 정신이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협은 급히 침상 가장자리를 잡고서야 겨우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머릿속이 찌를 듯 아파왔다.

    심협은 급히 <무명천서>를 내려놓고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의술에 정통한 만큼, 방금의 증상이 정신력을 크게 소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임을 금세 알아냈다.

    우혁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정(精), 기(氣), 신(神)은 모두 한 몸과 같아 서로 도우며 이루어진 관계다. 지금 그의 정과 신의 힘이 크게 소모되었으니 소화양공을 운공하면 분명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협의 온몸이 빠르게 뜨거워지더니,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기혈 순환이 빨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굴엔 붉은 빛이 돌았다.

    역시나 운공하다 보니 두통이 많이 완화되었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운공을 이어갔다.

    ‘<무명천서>를 읽는 것도 좋으나 정신력의 소모가 크구나.’

    일 각(刻)이 지나자,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걱정을 미뤄둔 채 잠시의 지체도 없이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손가락으로 책장 위를 옮겨 다니며 십여 자를 읽었다. 그리고 다시 현기증이 나면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대개 천도(天道)라는 것은 형태가 없는 법이나 음양(陰陽)을 나누었기에 만물을 낳고 기르는 것이다. 장생(長生)할 방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음(陰)을 수련하여 양(陽)이 되도록 해야 하며, 평범함을 수련하여 성인의 경지에 올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도에 들어설 수 있다.”

    이것은 심협이 세 번이나 휴식을 취해가며 겨우 읽어낸 문단이었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에 기재된 것은 분명 수련 법결(法訣)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심협은 이 책이 <무명천서>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해 안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흥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 반 권짜리 <무명천서>를 모두 해독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때, 심협은 옆에 있던 석합을 힐끗 봤다. 그 순간, 푸른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금이 간 죽통이었다.

    ‘이 석합과 <무명천서> 모두 신기한 보물이니, 같이 있던 죽통도 어쩌면 보물 아닐까?’

    그런 생각에 심협은 바로 죽통을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보고 무게도 가늠해봤다. 하지만 평범한 죽통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등불 옆에 있던 가위를 가져와 죽통을 가볍게 그어봤다. 그러자 죽통에는 긴 흔적이 생겨났다.

    ‘이리도 약하다니! 그렇다면 평범한 죽통이란 말인가?’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탁자로 다가가서는 죽통을 등불에 갖다 댔다. 그러자 불에 직접 닿은 부분은 바로 노랗게 변했다.

    심협은 죽통을 바로 치우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계속 살폈다.

    노랗게 변했던 부분은 점차 검게 변하더니 서서히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연기도 조금씩 피어오르는 것이 곧 타버릴 것 같았다.

    심협은 그제야 급히 죽통을 등불에서 치우고는 입김을 훅훅 불어 죽통에 붙어 있던 불씨를 껐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이 죽통은 정말로 평범한 물건인 모양이군.”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무명천서>를 찾으러 와서 뜻하지 않게 축소 능력을 지닌 석합을 얻었고, 소화양공도 단숨에 능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또 보물을 원했다니, 욕심이 지나친 듯해 스스로를 다그쳤다. 어쨌든 그 죽통은 왠지 버리기가 아까워서 다시 석합에 넣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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