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3화 (43/1,214)
  • 43화. 자그마한 것

    심협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사색에 잠겨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석합에 들어있던 잡다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다시 노르스름한 고서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이 고서는 우혁이 말한 것처럼 표지에 제목을 포함해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혁의 조상들이 ‘무명천서’라고 부른 것 같았다.

    심협은 책장을 몇 장 넘겨보더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책 속의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모두 고대의 문자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내용은 모두 오래된 은색 전서체(篆書體)로 쓰여 있었는데, 심협이 여러 고서를 본 적이 있었음에도,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몇 개 되지 않았다.

    심협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글자를 해독할 방법이 없자 그만 포기하고, 고서를 다시 석합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때, 옆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울려왔다.

    심협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강바람이 불어와 옆에 있던 죽통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 옆에 있던 목판에 죽통이 부딪힌 것이었다.

    심협이 몸을 숙여 죽통을 주워 자세히 살피려 하던 순간, 죽통 위쪽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통의 윗부분에 갑자기 한 줄기 금이 가면서, 황색 액체가 그곳에서 뿜어져 나와 심협의 얼굴을 덮쳐왔다.

    심협은 크게 놀라, 죽통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황색 액체는 심협의 손을 공격하려는 듯하더니, 돌연 빛이 일어 공중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구(球) 형태로 화하였다. 심협은 그 주먹만 한 것을 바로 손에 잡아들었다.

    손에 그것이 들어온 순간, 심협은 그것의 표면이 이상하리만치 매끄럽고 차가운 것을 느꼈다. 또 너무나 부드러워 보여서, 심협이 손에 약간 힘을 주자, 바로 진흙처럼 심협의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심협은 이 물건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아 급히 양손을 모으고, 가볍게 힘을 주어 이것이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 물건이 힘을 쓰더니, 심협의 손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심협은 그제야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협은 놀라면서도 손에서 그 생명체를 놓아주지 않으려 손아귀에 더 힘을 줬다.

    그 작은 생명체는 더 애써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참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얌전해졌다.

    심협은 두 손에 작은 틈이 생기도록 살짝 열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 생명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심협의 손안에 있던 그 ‘자그마한 것’은 지금껏 보아왔던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지 없이 둥근 몸에 크고 검은 두 눈을 가지고 있었고, 온몸은 매우 부드러운 것이 표면에는 빛나는 옅은 광택도 돌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 ‘자그마한 것’은 마치 옅은 빛을 발하는 작고 동그란 덩어리 같았다.

    심협이 자그마한 것을 살피고 있자, 그것도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협이 양손을 꼭 오므리자, 자그마한 것은 겁먹은 표정을 짓는 듯했는데, 누구라도 그 표정에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무슨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 같은 것들은 이 자그마한 것에 비하면 귀엽다고 할 수도 없었다.

    심협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자, 그 자그마한 것도 눈을 연신 깜빡이는 것이 너무도 귀엽게 보였다.

    놀라고 겁먹은 듯한 자그마한 것을 심협이 무의식적으로 만져보려 하자, 그것의 두 눈 밑에 돌연 작은 입이 생겨나 입에서 무언가 뿜어냈다.

    자그마한 것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하얀 빛이었다. 하얀 빛은 심협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더니, 갑자기 폭발하여 수많은 작은 빛으로 화하였다. 그 하얗고 작은 빛들은 심협의 온몸에 묻게 되었다.

    심협은 온몸에 차디찬 기운이 느껴져, 이 때문에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심협의 손에 잡혀있던 자그마한 것은 갑자기 몸이 몇 배로 팽창하여, 커다란 분홍색 기포처럼 변하였다. 자그마한 것은 심협의 손을 억지로 열고 나룻배 선미의 갑판을 향해 튀어 올랐다.

    심협이 급히 쫓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자그마한 것은 선미 갑판에서 다시 튀어 오르더니, 단숨에 몇 장 높이까지 올랐다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물속에 뛰어들었다. 이에 강물에는 한바탕 물보라가 일었다.

    심협이 선미까지 쫓아가 살폈을 때에는 수면에 물보라도 거의 사라지고, 그 자그마한 것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심협은 수면과 강가 곳곳을 한참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찾을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고개를 숙여 몸을 살펴보니, 방금 그 자그마한 것이 자신에게 뿜은 하얀 빛들이 이미 다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했다. 의복과 피부를 막론하고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이다.

    “어…… 이상하다…….”

    이때 심협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니, 급히 배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양손은 원을 그리는 듯한 모양을 만든 뒤 소화양공을 운공해 보았다.

    잠시 동안 운공을 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체내에 있던 작열감과, 경맥 안에서 한 번씩 나타났던 찌를 듯한 통증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요 며칠간 고생하며 쌓인 피로감도 모두 사라졌다.

    심협은 그대로 일어나서, 선미에서 주먹을 쥐고 팔을 떨쳐 허공을 공격했다. 그러자 소매에서 소리가 일었다. 신과 기가 충만한 것이,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이 하얀 빛이 이리도 신통한 효험이 있을 줄 몰랐구나. 하지만 너무 안타깝구나…….”

    심협은 주먹을 거두고 먼 곳을 바라보며, 왠지 가슴 아픈 듯 중얼거렸다.

    심협도 자신의 몸에 나타난 변화가 그 귀여운 자그마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도망쳐버렸으니, 아무리 안타까워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석양은 이미 저 멀리 산에 거의 가려져,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심협은 죽통과 무명천서를 석합 안에 다시 넣고, 석합을 봇짐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 배 안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나룻배를 나루터 방향으로 몰기 시작했다.

    만수하의 물살은 폭우가 내린 탓에 더욱 급해져 있어 나룻배를 몰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심협은 이미 어제의 심협이 아니었다. 온몸에 기운이 넘치니, 상앗대로 나룻배 모는 일쯤은 물살을 타고 순조롭게 내려올 때보다 훨씬 쉬웠다.

    나루터로 가는 도중에 심협은 강가에 있던 우대담을 만났다. 우대담은 강을 따라 내려오며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자 우대담도 나룻배에 올랐다.

    우대담은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심협이 계속 돌아오지 않자,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인지 걱정되어 강을 따라 내려가던 중이었던 것이다.

    * * *

    두 사람이 나루터에 도착하자, 만삭의 우대담 부인이 초막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어찌 그리 담도 크십니까? 이렇게 폭우가 쏟아졌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런 겁니까?”

    우대담 부인은 말로는 책망하는 듯했지만,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수님을 걱정시켜 드렸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심협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귀인은 하늘에서 돕는다더니. 돌아왔으니 다행이에요.”

    우대담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초막으로 들어가 화로에서 끓인 생강차를 가지고 나와 우대담과 심협에게 각각 한 사발씩 따라 주었다.

    생강차를 마신 후, 심협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배를 몰고 나갔다가, 폭우에 물살이 세게 일어 배가 여기저기 부딪히게 되었소. 그 바람에 배에 있던 물건들도 부서지거나 망가진 것들이 많소.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이것으로 형수님 부부에게 배상하려고 하오.”

    말하면서, 심협은 진작 준비해둔 은자 10여 냥을 꺼내 우대담 부인에게 전했다.

    우대담 부인은 이 상황에 당황하여 머뭇거리고 있었다.

    “배에 있던 물건들은 다 값도 안 나가는 낡아빠진 것들입니다. 그러니 배상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도련님께서 주셨던 은자 10냥이면 충분합니다.”

    우대담이 대신 대답했다.

    “저는 오늘 이곳을 떠나려 하오. 이틀간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으니, 이 돈은 받아두십시오. 이건…… 이건 형수님 뱃속 아기에게 주는 것이라고 칩시다.”

    심협은 잔뜩 불러있는 우대담 부인의 배를 곁눈으로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우대담의 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과 우대담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괜찮지만, 뱃속 아이까지 같이 고생시키는 것은 실로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그럼 도련님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우대담 부인은 몸을 숙여 인사하며 은자를 받아 들었다.

    심협은 말을 끌고 오더니,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바로 말에 올라탔다.

    심협이 막 떠나려 할 때,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말고삐를 잡아 세우고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형, 형수님. 혹시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춘화현의 심가약포에서 저를 찾으십시오.”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심협은 그대로 훌쩍 떠나, 송번현성으로 향했다.

    “약재 사업을 하는 집안 자제였군. 어쩐지 그리 마음씨가 곱더라니. 분명 나중에 오래오래 복을 받고, 부귀와 장수를 누릴 거예요.”

    우대담 부인은 수중의 돈주머니를 꼭 쥐며 말했다.

    우대담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석양이 서쪽으로 떨어지며, 금빛 찬란한 석양볕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뒤에 있는 황위탕 나루터 옆에는 꼭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심협이 송번현성에 도착했을 때는 어제보다도 늦은 시각이라 성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아무래도 저녁에는 송번현성에 들어가지 못할 팔자인 모양이군.”

    심협은 자조하며 말머리를 돌리고는 어제 갔던 작은 고을로 향했다.

    어제 심협이 쓰러진 기억 때문인지 객잔의 점소이들은 모두 심협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심협을 마치 역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피하느라 호객 행위 따위는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협은 오히려 그 편이 더 마음 편했다.

    보아하니 유백천과 객잔 주인장이 심협의 신분을 떠벌리고 다닌 것 같진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행적은 최대한 숨겨야 했다. 지금 자신은 <무명천서>를 찾으러 나온 것이니 행적이 드러난다면 춘화현이나 춘추관까지 알려져 골치 아프게 될지도 모른다.

    심협은 말을 달려 어제의 그 객잔으로 향했다. 전날과 같이 소삼자가 객잔 앞을 지키고 있었다.

    “심 공자님, 오늘도 저희 객잔에 묵으러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소삼자는 심협을 보자 웃으며 공손히 말고삐를 잡았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소삼자에게 넘겨주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오늘도 한산하여 손님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심 공자, 어서 오십시오. 저희 가게에 또 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후씨 성의 주인장은 심협이 들어오자 살펴보고 있던 장부도 내팽개치고 반가이 다가왔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소. 그저 조용한 방 하나만 내어주시면 되오.”

    심협이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소삼자, 좀 보고 있거라.”

    주인장은 직접 심협을 안내했다. 대청에서 식사하던 손님들은 이 모습이 의아한지 수군거리며 심협의 신분을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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