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하산
심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춘추관 제자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춘추관에 올 당시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간단한 귀중품들도 봇짐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 심협은 침상에 있는 옥침을 돌아보고 잠시 생각해보더니, 옥침을 헝겊으로 감싼 후 침상 아래 잘 보이지 않은 구석에 숨겨두고서야 탁자 쪽으로 갔다.
탁자에는 여전히 서적이 쌓여 있었다. 지금은 쌓여있는 서적들 바로 옆에 새로 쓴 부적 3장이 놓여 있었는데, 바로 소뢰부였다.
꿈속에서 우혁의 가르침을 받고 제대로 된 소뢰부를 써낸 적이 있었지만,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 써낸 부적 20, 30장 정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막 써낸 4장의 부적 중 1장도 시험하면서 써버렸다.
심협은 3장의 부적을 하나씩 떼 내어 ‘장천사항요기사’ 책에 끼운 뒤, 남아 있는 은자와 함께 봇짐에 넣었다.
곧이어 봇짐을 멘 심협은 방문을 잠근 후,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산문을 향해 걸었다.
* * *
심협이 내려가는 길에 여러 춘추관의 사형제들이 그의 차림새를 보고 놀라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어찌 된 일인지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하던 인사마저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심협이 멀리 지나가고 나면 그제야 뒤에서 무어라 뒷말을 나누었다.
심협은 사형제들이 어찌 행동하든 상관하지 않고 갈 길을 갔다. 곧 산문에 이른 심협은 저 멀리 서너 명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산문을 지키는 우사형을 에워싸고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들 웃는 낯으로 우사형에게 아부하는 것이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우사형이라는 자는 약 40여 세 정도로 보였다. 그는 피부가 숯처럼 까맣고, 미간에는 동그란 반점이 있어, 마치 포청천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성격은 포청천과 달리 지극히 탐욕스러운 자였다.
우사형은 어려서부터 춘추관에서 자랐기 때문에, 비록 자질은 뛰어나지 못해도 춘추관 경력이 오래되어 산문 지키는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누군가 몰래 하산하여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겠다고 한다면, 우사형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러줘야만 가능했다.
우사형은 백소천 같은 내문제자도 가만 두지 않았는데, 다른 제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반항할 수 없다면, 잘 보이는 수밖에. 하여 지금 우사형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하는 짓이 딱 그 꼴이었다.
심협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우사형에게 아부하던 이들은 바로 정색하더니, 바로 우사형에게 가르침이라도 청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사형들을 뵈옵니다.”
심협은 하산하려면 이 우사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그들을 향해 공수하며 인사했다.
“무슨 일이냐?”
우사형은 바로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명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오려 합니다.”
심협은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우리 춘추관은 봉쇄된 지 오래인데, 내 여태껏 누가 가족들 만나러 갔다는 일은 들어본 적이 없네만?”
심협의 말에 우사형은 시꺼먼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도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심협은 태연자약하게 소매 안에서 나씨 도인의 도장이 날인된 친필 문서를 꺼내 우사형에게 건넸다.
우사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들었다.
“정말 가족을 만난다는 것이네? 게다가 기한도 없다니…….”
우사형은 명 번을 다시 읽어본 후에야 시선을 심협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의혹만이 가득했다.
“우사형, 그럼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심협은 우사형의 반응에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사형이 막 입을 열려던 그때, 산문 밖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 한 명이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산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그 사람 쪽을 바라봤고, 심협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문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춘추관 의복을 입고, 머리에는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쓴 청년이었다. 그는 매우 일정한 속도로 돌계단을 밟아 오르며, 천천히 산문을 향해 오고 있었다.
청년은 새까만 머리에 마른 체형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삿갓에 반은 가려져 있었지만, 삿갓 밑으로 보이는 얼굴 절반만 보아도 그가 꽤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은 고상한 느낌도 풍기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옆에서 누군가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어째 우리 춘추관의 의복을 입고 있는데도 낯이 익지 않지…….”
다른 이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사람인가?’
심협은 속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 사람은 고화령(古化靈), 고사제일세.”
산문을 오래 지켰기에 물론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던 우사형은 약간 정색하며 알려주었다.
“고화령?”
심협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모두 놀라기 시작했다.
그는 내문제자 3인 중 1인으로, 정화, 백소천과 함께 내문제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또한, 가장 베일에 싸여있는 제자이기도 하였는데, 종종 폐관 수련하여 춘추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고화령의 사부는 나씨 도인, 풍양진인과 같은 항렬인 왕사백이었다.
심협은 춘추관에 입관한지 2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백소천이 고화령을 언급하는 것은 들은 적은 있었기에, 백소천이 정화보다 고화령을 중시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전에 듣기로는, 춘추관에서 고화령이 홀로 하산하여 요괴와 마물을 물리칠 것을 허락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었나 보군.”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제자가 나지막이 탄식하며 말했다.
“홀로……. 정사형도 아직 혼자 하산해본 적이 없는데, 그는 벌써…….”
다른 제자가 말했다.
제자들이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가운데, 고화령이 이미 바로 근처까지 도착했다.
제자들은 바로 말을 멈추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고사형을 뵈옵니다.”
“고사제…….”
고화령은 걸음을 멈추고 삿갓을 들었다. 그러자 여자들도 울고 갈 만한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다른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형제들께서 산문에 모여 계신 것이, 설마 저를 맞이하러 나오신 것이오? 오히려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소.”
그의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경외와 흠모를 느끼면서도 질투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던 제자들은 그의 물음에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흠흠……. 고사제, 처음으로 하산하여 다녀왔는데 얻은 것이 좀 있었는가?”
우사형은 고화령과 조금 익숙한 편이라, 헛기침을 하더니 웃으며 물었다.
“이제 막 신력이 생기기 시작한 애송이를 베었을 뿐이오. 얻은 것이 있다고 할 수도 없소.”
고화령은 등에 메고 있는 봇짐을 쳐 보이곤 웃으며 말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 말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첫 하산에 무슨 음기나 귀신을 상대한 것도 아니고, 신력이 생긴 정령을 상대했다니!’
심협은 고화령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고사제는 역시 신통하고 용감하군. 대단하군, 대단해.”
우사형이 진심으로 칭찬하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연신 돌아가며 아부하기 시작했다.
“과찬이시오. 여러분도 수련의 진전 속도가 어떠하든, 끈기를 갖고 꾸준히 수련하신다면 언젠가 큰 성과를 이뤄낼 것이오. 이제 사부님께 하산 경과를 보고드리러 가봐야겠소. 그럼 이만 가보겠소.”
고화령은 사람들을 향해 공수하며 예를 갖추었는데, 조금도 예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화령이 그리 예를 갖추는 것에 놀라, 다들 연신 답례 인사를 하였다.
심협이 느끼기에도, 자유분방한 백소천이나, 콧대 높은 정화에 비해, 고화령이 내문제자들 중 가장 다른 제자들의 호감을 사는 사람이라 느꼈다.
고화령의 뒷모습이 이미 멀어졌는데도, 산문에 있던 제자들은 따스한 훈풍이라도 맞은 듯 감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신 차리고 났을 땐, 이미 심협은 산문을 나선 뒤였다.
* * *
2년여 만에 춘추관을 나서자, 심협이 자유분방한 성격이 아님에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토집진(土集鎭)에 이르러, 심협은 우선 홍운루로 가 술과 음식을 시켜 배를 채우더니 시장으로 가 은자 20냥을 들여 튼실한 몸집에 갈기가 검은 말을 샀다. 마실 물과 건량을 준비한 심협은 말을 달려 토집진을 나섰다.
* * *
등평군 경(境) 내에는 크고 작은 십여 개의 현이 있었다. 그중 춘화현은 지세도 평탄하고, 기름진 땅도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 덕에 등평군에서 부유한 현이기도 했다. 춘화현 동쪽에 있는 천평현(天平縣)은 구량산(九梁山)이 있는 지역이라, 그 지세의 영향으로 토지가 적어 가장 빈곤한 현이었다.
춘화현 서쪽에 위차한 송번현은 만수하라는 강이 있어 입지적으로 수운(水運)에 유리한 곳이었다. 하여 송번현은 자그마한 수운 왕래의 중계(中繼) 지역으로서, 상업과 무역업이 춘화현보다 더 번성하였다.
한편, 송번현에서 이름 꽤 날리는 진양주루(秦陽酒樓)에, 청색 장삼을 입은 심협이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꽤 정갈한 음식들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흘 연속으로 길을 재촉한 데다 오는 동안 계속 몸이 흔들렸던 탓에 지금 별 입맛이 없어,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놓고는 결국 찻잔을 들고 홀짝였다.
이때, 옆에서 점소이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심협의 옆을 지나쳤다. 심협은 바로 점소이를 불러 세웠다.
점소이는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식탁을 힐끗 보더니, 손님이 음식에 손을 거의 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무심결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님,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점소이는 허리를 굽히며 심협 앞으로 와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무얼 좀 물어봐도 되겠소?”
심협이 말했다.
“손님,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점소이는 심협이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자, 순간 안색이 밝아지며 말했다.
“여기 송번현 경 내에 만수하의 나루터가 있소?”
심협이 물었다.
심협의 말에 점소이는 순간 머뭇거리다 바로 웃으며 말했다.
“손님께서 그리 물으시니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요. 저희 송번현 경 내에는 큰 부두만 세 곳이 있고, 크고 작은 나루터는 십여 개나 있습니다.”
“그리 많다니…….”
점소이의 말에 심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심협이 가족들과 만나겠다고 춘추관을 나서 송번현으로 온 것은, 우몽의 조상이 만수하에서 발견했다는 ‘무명천서’ 때문이었다.
만일 그의 꿈이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지금쯤 아마 우몽의 조상이 무명천서를 발견하기 전일 테니, 무명천서는 분명 만수하의 어느 돌무더기 아래에 있을 것이었다.
심협은 춘추관에서 순양검결을 전수받을 확률이 너무도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수명을 연장시킬 선약을 구하기는 아마 더 어려울 것이었다.
하여 심협은 지금 무명천서를 찾아, 그것으로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는 것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설령 무명천서에 나온 법술과 공법을 익힐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명천서를 춘추관에 있는 선옥이나 단약으로 교환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혹시 나룻배를 운영하는 사람 중에, 우(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있소?”
심협은 생각해보더니,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