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달빛 아래 우연한 만남
심협은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더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잠시 후, 심협이 두 눈을 떴을 때, 그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품속에서 정실에서 쓰던 붓을 꺼냈고, 연못에서 붓에 물을 묻혀 평평한 큰 돌에 소뢰부를 쓰기 시작했다.
심협에게 소뢰부의 효과를 계속 발휘시키지 못하는 건 큰 고민거리였다.
소뢰부의 부적 문양은 꽤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심협은 돌에 붓이 닿을 때부터 붓을 거둘 때까지 조금의 멈춤도 없이 단숨에 소뢰부를 써냈다.
돌 위의 옛 서체 ‘뢰(雷)’로 시작하는 복잡한 부적 문양을 보고 있는 심협의 얼굴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한 뒤 심협은 다시 붓에 연못물을 적셔, 또 다른 큰 돌 위에 소뢰부를 쓰기 시작했다.
연못을 배회하며 소뢰부를 써내던 심협은 갈수록 부적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가 써낸 소뢰부 또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자, 심협은 연못가의 큰 돌들에 열 두어 개의 크고 작은 소뢰부를 써냈다. 그는 부적 모두를 거의 똑같은 모양으로 단숨에 써 내려갔다.
심협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길게 숨을 내쉬고는 더는 부적을 쓰지 않았다. 돌에 쓴 부적이라고 하더라도 몸에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방금은 그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려고 부적을 쓴 것뿐이었다.
심협은 왠지 자신이 소뢰부 통달의 문턱까지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문턱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는 붓을 다시 챙겨 넣고 작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응?”
심협이 돌연 고개를 들어 앞 쪽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공기 파동이 앞 쪽에서부터 어렴풋이 전해오고 있었다.
이 공기 파동은 마치 물에 돌을 던졌을 때 치는 잔잔한 물결 같은 것이었다.
심협은 호기심이 생겨,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파동이 전해져 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 * *
한 모퉁이를 돌자, 가산(假山) 하나가 심협의 눈에 들어왔다.
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꼭대기가 수 척(尺) 넓이로 평평하게 깎여 있었다.
그 위에서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바로 우혁이었다.
우혁은 두 손을 항아리를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결인하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그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하나하나의 속도가 꽤나 느려 보였다.
우혁의 코와 입 사이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손가락 굵기의 유백색 기체 두 가닥이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우혁의 정수리에 어린 백색광도 모습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법(道法) 수련이구나!”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도 모르게 설레기 시작했다.
심협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춘추관에 입관한 것은 진정한 도법을 익혀 자신의 체질을 바꾸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소화양공은 체내에 양기를 길러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을 뿐, 진정한 도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심협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우혁의 수련 과정을 지켜봤다.
* * *
시간이 흐르며 달은 저물어갔고, 달이 저물어가며 달빛도 어두워져갔다.
돌연 우혁의 정수리에 있던 백색광이 흩어졌고, 그의 코밑에 있던 유백색 기체도 사라졌다. 우혁이 결인했던 손을 거두는 동작을 하고는 수련을 멈췄던 것이다.
심협은 당황하여 급히 그늘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그의 두 발이 심하게 저려 말을 듣지 않았다. 순간 휘청거리던 그의 몸이 옆에 있는 담벼락에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고요한 상황에서는 분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망했다!’
심협은 속으로 자책하며, 우혁이 자신이 낸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심현질인가?”
하지만 상황은 심협의 바람과 달랐다.
우혁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자, 심협은 긴장하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우혁은 언제 가산에서 내려온 것인지, 근처에 서서 심협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뜻하지 않게 백부님의 수련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신기하여 저도 모르게 계속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네. 볼 테면 보는 거지. 마침 나도 잠이 오지 않는데, 나랑 같이 저쪽에 잠시 앉았다 가게나.”
우혁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하고는 연못 옆에 있는 정자로 걸어갔다.
발을 절며 우혁을 따라가던 심협은 암암리에 소화양공을 운공하여 체내 기혈을 순환시켰다. 그렇게 하고 나니, 저리던 발이 점점 나아졌다.
* * *
정자에 앉아, 우혁은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 안에서 안주 두 접시와 술 한 단지, 그리고 술잔 두 개가 튀어나왔다.
술이 식도를 타고 몸에 들어가니, 진한 술 내음이 마치 화염처럼 몸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오장육부가 요동치는 느낌에 심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협은 술의 기운이 소화양공으로 만들어낸 양기를 이끌어 몸 안의 경맥을 따라 흘러 다니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청량한 기운이 오장육부에서 스멀스멀 솟구치더니, 체내의 양기에 흡수되는 것도 느껴졌다. 양기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그가 힘들게 보름 정도 수련한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심협은 놀라고도 기뻐서 탐하는 눈빛으로 술 단지를 바라보다가, 바로 집어 들어 단지 채로 술을 마셨다.
“하하, 이 술은 어떠한가?”
우혁은 고개를 젖혀 술 한 잔을 다 비우며 곁눈질로 심협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물었다.
“정말 좋은 술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좋은 술을 많이 마셔봤지만, 어찌 백부님의 영험한 술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마신 것은 다 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술을 어떤 재료로 만드신 것입니까?”
심협은 우혁에게 공손히 술을 따르며 물었다.
“왜? 내 술이 좋아서, 제조법을 알아내 몰래 담그려고?”
우혁은 심협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백부님께는 무엇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심협은 자신의 생각을 간파 당하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제조법이야 알려줘도 상관없네. 설산의 영사(*靈蛇 : 영험한 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천년에 한 번 만난다고 할 정도로 귀한 것이라 만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네. 더구나 영사의 쓸개는 더더욱 구하기가 어렵지. 절대 구하고 싶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야.”
우혁은 말하면서 술을 한 모금 음미했다.
“게다가 자네가 제조법을 알아도 소용이 없네. 이 술을 담그려면 영사의 쓸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靈火 : 영험한 불)에도 달궈야 하니 말이야. 도포를 입고 있기는 하나 아직 도법을 수련하지 않은 자네가 어떻게 영화를 쓸 수 있겠는가?”
우혁은 술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 또 한 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심협은 웃어 보이면서도, 손을 민첩하게 움직여 재빨리 우혁을 따라 술잔을 비웠다. 술 안의 청량한 기운이 체내에 있던 양기의 힘을 또 한 번 북돋았다.
“백부님, 제가 부적을 오래 연습해도 줄곧 정확한지 알 수가 없었는데, 백부님께서 부적술에 정통하시니, 약간의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심협은 다시 우혁의 잔에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무슨 부적인가? 한번 써보게나.”
우혁이 대충 소매를 한번 휘두르니, 탁자 위에 청색 부적 종이와, 피와 비슷한 점도의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백색 잔, 그리고 백옥 붓이 나타났다.
백옥 위에는 몇 가지 영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붓 끝에는 금빛 털이 한 올 한 올 은은한 광택을 발하며 달려 있는 것이 분명 평범한 털이 아니었다.
심협은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숨을 들이쉰 후, 백옥 붓에 붉은 액체를 가득 적시고는 정신을 집중해 소뢰부를 쓰기 시작했다.
백옥 붓의 털은 부드러우면서도 뻣뻣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심협은 자신이 평소에 쓰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붉은 액체는 예전에 썼던 검은 개의 피와 달리 응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무형의 기운이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 덕분에 부적을 쓰기도 더욱 수월했다.
* * *
반 각(刻)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심협은 소뢰부 한 장을 완성했다.
심협은 이번에 쓴 소뢰부가 그 어느 때보다 잘 써졌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부적으로는 효과를 발휘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중에 원석이 없으니, 부적을 시험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아, 현질이 궁금했던 것이 소뢰부였군. 이건 꽤 복잡한 초급 부적인지. 하지만 지금의 자네한테는 조금 어려울 게야.”
우혁은 심협이 써낸 부적을 보며 말했다.
“백부님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심협은 급히 공수하며 말했다.
“부적을 단숨에 유창히 써내기는 했지만, 신(神)과 기(氣)가 화합하지 못해 부적의 기운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반복하니, 가짜 부적 밖에 되지 못하네.”
부적을 들고 있는 우혁의 손끝에 미미한 빛이 스쳐갔다. 곧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부적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백색광으로 화(化)하였는데, 번갯불로는 화하지 못했다.
심협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멋쩍어 뒤통수만 긁어댔다.
“부적의 길은 워낙 심오하여, 모든 부적의 정수(精髓)에 정통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네. 이 소뢰부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써 천지의 힘과 소통하여, 종이에 부적 문양을 써내는 것이 정수이자 관건이지.
부적을 쓸 때는 반드시 세 가지가 합일(合一)해야 하는데, 사람의 정(精), 신(神), 기(氣)가 합일하여 부적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네. 처음부터 끝까지 원활히 합일되어 녹아들어야 성공할 수 있지.”
우혁은 심협을 한번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세 가지를 합일시킬 수 있습니까?”
정신을 집중해 듣던 심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비법부록진감’에도 비슷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었으나 그때는 아무도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지라, 심협은 오리무중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우혁이 이리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니, 책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이해가 쉬웠다.
“이게 말은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일세. 사람마다 상황이 달라, 세 가지를 합일하고자 해도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다 제각각이니 말이네.
자네로 예를 들자면, 한창인 나이에 정력(精力)도 충만하고, 신력(神力)도 충분한데, 원기(元氣)가 부족한 것이…… 혹시 예전에 큰 병을 앓았던 적 있는가?”
우혁은 심협의 두 눈을 살피며, 예리하게 그의 문제를 짚어냈다.
“백부님 역시 예리하십니다. 제가 몇 해 전 몸에 음기가 들어, 수년간 앓다가 겨우 나았습니다.”
심협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방금 자네가 부적을 쓸 때 정과 신의 합일은 괜찮았었네. 다만 신과 기의 합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더군. 써낸 부적 문양도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신과 기가 단절되어 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지.”
우혁은 사담주(蛇膽酒)를 음미하면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몸을 보양하여 원기가 충분해진 다음에 부적을 쓸 수 있습니까?”
심협은 이제야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이 급해져 질문하면서도 동시에 일어나 우혁에게 술 따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원기는 물론 보충해야하지. 하지만 지금도 부적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네. 다만 부적을 쓸 때, 신과 기의 합일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네.”
우혁은 심협이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에 만족해하며 말했다.
“신과 기는 어찌해야 합일시킬 수 있습니까?”
“신과 기를 합일시키려면,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네.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마음이 들어가서는 안 되지. 부적을 쓸 때는 마음과 정신을 차분히 하고, 가슴에서 운기하여…….”
우혁은 술을 들이켜며, 한편으로는 심협에게 신과 기를 합일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심협은 한 글자라도 놓칠까 숨죽이고 정신을 집중하고선, 귀 기울여 우혁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