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1화 (21/1,214)

21화. 적막한 저잣거리

“심노제, 오늘은 아무래도 자네에게 술을 대접할 수가 없을 것 같네. 자네 거처가 어디인지 알려주게나. 내 다음에 자네를 찾아 제대로 술대접을 하겠네.”

“우대형,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이곳에 막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소. 거처는…….”

심협은 일부러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응? 심노제가 이곳 사람이 아님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우리와 함께했단 말인가? 정말 대담하군, 정말 대단한 형제야!”

우몽은 듣자마자 놀라며, 심협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우몽의 호종 3인도 그 말을 듣자, 훨씬 친절한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우대형 과찬이시오. 나는 그저 스스로를 지키려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을 뿐이오.”

심협이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하, 요즘 같은 세상에 심노제 같은 열혈남아는 참으로 보기가 어렵다네! 심노제, 자네가 아직 이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했다면 우리 집으로 함께 가세나.”

우몽은 크게 웃더니, 심협의 말을 생각해내고는 물었다.

“내가 아직 거처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그럼 우대형에게 폐를 좀 끼치겠소.”

심협은 머릿속이 의문투성이인지라, 우몽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폐를 끼치다니? 우리는 형제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 남처럼 굴 것 없네. 가세나!”

우몽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손을 뻗어 심협에게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 * *

그들은 마도를 따라 걷다가 각루가 있는 곳에 이르러 막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때 제식 갑옷을 입은 병졸 서너 명이, 몸이 비대한 중년 사내를 부축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부축한 중년 사내는 거의 옮겨지는 수준이었다.

심협이 아래를 내려보니, 피부가 희고 깨끗한 그 중년 사내는 입 주변에는 누런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몸에는 너무나 작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마치 거북이 껍데기에 억지로 밀어 넣은 기름진 삼겹살 덩어리 같아 보이는 것처럼 너무도 균형이 맞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년 사내 일행도 우몽 일행이 성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장사(壯士)님께 길을 비켜드려라.”

중년 사내의 시선이 전충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는 안색이 조금 변하더니, 손을 들며 명령했다.

군졸들은 바로 중년 사내를 부축해 성벽 한쪽으로 붙어 서서 길을 양보했다.

“너희는 먼저 전충을 돌려보내 주거라.”

우몽은 몸을 돌려 호종들에게 분부했다. 호종 3인은 대답한 후, 전충의 시신을 들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전충의 시신이 그 중년 사내의 옆을 지나쳤을 때, 중년 사내는 뒤에서 이미 검게 변해버린 핏자국으로 물든 깃발을 보고 머리 가득 식은땀을 흘려댔다.

우몽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심협도 중년 사내 옆까지 내려왔다.

“유대인.”

우몽이 포권하며 말했다.

“우…… 우현질.”

중년 사내는 급히 비단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번 공격에는 짐승들이 꽤 많았습니다. 남아 있는 시체가 꽤 많으니, 꼭 빨리 치워주셔야 합니다. 마침 성안의 백성들에게 계속 배분하여 비축하게 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성벽이 훼손된 곳이 좀 있는데, 최대한 빨리 보수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몽이 고개를 돌려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현질, 안심하게나. 이미 준비시켜놨네.”

유대인이 급히 대답했다.

우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심협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 유대인이라는 사람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우몽이 뒤를 돌아보지 않자, 하려던 말을 멈추고 땀을 닦았다. 이내 그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성으로 향했다.

“저 유대인이라는 분은?”

심협이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동래현 현령 유복(劉福)일세.”

“지역의 군정을 맡고 계신 백성의 부모셨군요.”

심협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했다.

‘우대형이 보통의 성 지키는 장정과 달라 보이기는 했지만 관직에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찌 유대인이라는 자는 우대형 앞에서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백성의 부모라니? 그저 글만 읽을 줄 아는 서생일 뿐이지. 평상시 자질구레한 일 처리는 그런대로 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네. 동래현 전체의 군 기강이 해이해져 있으니……. 성안의 장정들이 버텨줬기에 망정이지, 원래의 그 동래현 병사들로는 지금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네.”

우몽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우몽이 왜 유대인을 그런 태도로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나, 유대인이 겁이 많은데도 이곳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민심을 어루만질 줄도 아니……. 인근 다른 현의 관리들에 비하면 훨씬 낫기는 하네.”

우몽이 탄식하며 말했다.

“맞는 말씀이오.”

고개를 끄덕이던 심협은 그 유현령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생사가 걸려있는데,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심협에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심협이 기억하기로, 동래현성은 분명 적수군(赤水郡) 남부였다. 심협은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지역 일대에 이리 공포스러운 늑대 무리가 출몰한다고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 금방 천하에 소식이 퍼졌을 것이다.

“심노제, 가세나.”

우몽은 심협이 멍해져있는 것을 보고 재촉하며 말했다.

* * *

방금 성벽 근처에서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동래현성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동래현성이 꽤 웅장하게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춘화현의 성벽에 비하면 1장(丈)은 더 높을 것 같았다.

성벽은 이상하리만치 높고 두꺼워, 마치 산악처럼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비바람에 침식이 일어나 벽 표면도 떨어져 나가고 훼손된 곳도 꽤 있었지만, 그럼에도 원래 성벽의 웅장한 느낌을 엿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성 안쪽을 향해 뻗은 넓고 긴 주(主) 도로를 걷고 있었다. 길은 네 바퀴의 마차가 나란히 갈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았는지 노면이 울퉁불퉁했다.

주 도로의 양측에 있는 상점과 가옥은 넓이와 높이가 모두 춘화현보다 더 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금 황폐해져 있었다.

이곳의 건축양식도 춘화현과 많이 달랐다.

춘화현의 건축은 구조가 간결하고, 장엄함을 중시했다. 이곳도 건축물이 꽤 크기는 하지만, 처마, 담벼락, 문틀 등에 꽤 많은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집은 문묘 근처에 있네. 심노제, 날 따라오시게.”

우몽은 심협을 데리고 성안 깊숙한 곳으로 갔다.

우몽 뒤를 따르며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었던 심협은 살필수록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밝은 편이었는데도, 성안의 거리에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길 양측의 점포들도 대부분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길 어귀에 위치한 상당히 화려한 주점은 문도 닫혀있지 않은 채, 안에 아무도 없는 빈 상태였다. 바닥에는 회색 먼지만이 가득해, 얼마나 오래 영업을 중단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길 양측에는 쌀이나 면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상점만 아직 문을 연 상태였고, 그마저도 손님이 거의 없어 파리 날리는 수준이었다.

성안의 사람들 중 남성의 복장은 성벽 앞 싸움터에서 본 사람들과 같았다. 모두 머리에 복두(幞頭)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를 감싼 것은 긴 두건이었다. 이 두건은 상의 앞뒤 기장이 모두 심협이 평소에 보던 것보다 짧은 형태였다.

여성의 경우엔 머리를 구름 모양으로 땋아 올리고, 상의는 목과 가슴의 피부가 드러나는 형태의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의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춘화현에서 봐온 복식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심협이 본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조금씩 경직되어 있었다. 특히 눈빛에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았는데, 두려움과 멍함이 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길거리엔 간혹 옷으로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엔 노인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들은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멸시뿐이었다. 암울하기만 한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심협은 마음이 거북해졌다.

‘혹시 이 동래현이라는 곳이, 내가 알고 있는 적수군의 동래현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내가 대당(大唐)의 국경 안에 있기는 한 것인가?’

심협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몽은 이 광경을 자주 보아 익숙한 듯,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심협도 마음속 의문들을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우몽을 따라갔다.

* * *

“심노제, 여기서 잠깐 기다려주게.”

길을 가던 중, 한 골목을 지나게 되자 우몽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며, 심협을 돌아보고 말했다.

“우대형, 일 보시지오.”

심협이 대답했다.

우몽은 빠른 걸음으로 골목에 들어가더니, 곧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심협은 그곳에 서서 주변을 살피며, 그가 전에 겪었던 상황들을 돌이켜봤다. 그와 동시에 우몽의 집에 이르러, 어떻게 말을 꺼내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제발 저에게 먹을 것 좀 주세요. 저 이틀이나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심협의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심협이 고개를 돌려보니, 일고여덟 살 정도의 어린 소녀가 쭈뼛쭈뼛하며 근처에 서 있었다.

소녀는 지저분한 베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옷에 기운 흔적이 가득했다. 옷이 너무 커서 그런지, 소녀의 팔과 다리가 다 드러나 있었다. 소녀는 양손으로 깨진 밥그릇을 들고서 갈망하는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텐 먹을 것이 없어. 돈도 없고.”

심협은 소녀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져 보이며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을 비췄다.

“심노제, 왜 그러나?”

이때, 우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골목에서 빠른 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몽은 허리에 새로운 검은 장도(長刀) 두 개를 차고 있었다. 그가 전에 쓰던 칼보다 폭은 많이 좁았지만, 길이는 더 긴 칼이었다. 그는 등허리에 칼을 찬 채, 품속에 올록볼록하게 물건들을 담고 있었다.

우몽을 본 소녀는 특히 그가 지닌 칼을 보더니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도망쳤다.

“휴…….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은 가난하니……. 가세나.”

우몽이 이 광경을 보며 탄식했다.

심협은 도망치는 깡마른 소녀를 보고 있자니,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 * *

두 사람은 계속 길을 걸었고, 금방 큰 도로가 끝나는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니, 길가에 수목이 우거지고 길도 좁아져 있었고, 길 양쪽에는 큰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는 행인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갔고, 길은 오랫동안 쓸지 않은 듯 낙엽이 가득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은 우몽을 따라 한 저택 앞에 이르게 되었다. 저택의 정문 편액에는 ‘우부(于府)’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저택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었고, 정문이 매우 넓어서 사람 4, 5명은 동시에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대문에는 금칠이 되어 있었는데, 비록 칠이 절반 이상 벗겨져 나갔어도 휘황찬란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2장 높이의 붉은 칠한 사자 석상이 두 개 놓여 있는 입구는 주변의 다른 가옥과 비교하면 확실히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우대형, 알고 보니 대갓집 자제였소?”

심협은 저택을 보며 미소 띤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다 아버지께서 제멋대로 만드신 것일세. 하지만 지금 천하에 사악한 괴물들이 만행을 일삼고 다니고 세상도 어지러우니, 이런 허울 좋은 집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몽이 이야기하며 대문을 막 두드리려 할 때, 옆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전해져왔다. 우몽의 호종 3인이 빠른 걸음으로 온 것이다.

우몽은 손을 거두고 그들을 맞이했다.

“도련님, 전충은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부조금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검은 얼굴의 호종이 공수하며 말했다.

“잘했네. 자네들 수고가 많았네. 돌아가서 쉬게나.”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 우몽이 끄덕이며 말했다.

호종 3인은 대답한 후 심협에게도 가볍게 목례하여 인사하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심노제, 내 잠시 어디 좀 갔다가 바로 돌아오겠네.”

호종들이 돌아간 후, 우몽은 잠시 망설이더니 심협에게 말했다.

“우대형, 얼마든지 일 보고 오십시오.”

심협은 우몽이 전충의 집에 다녀오려는 것을 알고, 바로 대답했다.

우몽은 공수한 후, 빠른 걸음으로 호종들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심협은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우몽을 눈으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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