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환난 중에 벗을 사귀다
심협은 자신에게 조심하라는 소리가 났던 곳을 바라봤다.
십여 장 거리 밖에 중간 체격의 사나운 눈썹을 한 사내가 검은색 작은 쇠뇌를 허리에 다시 차고 있었다. 옆에 있는 오래된 화살 주머니가 텅 빈 것이 아마 방금 마지막 남은 화살 한 발을 쏜 것 같았다.
그 사내는 심협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이어 그 사내는 한 손으로 폭이 넓은 칼을 한번 휘두르더니, 서릿발처럼 매서운 빛이 스치며 사내를 공격해오던 늑대의 목을 베어 죽였다.
모든 과정이 조금의 막힘도 없이 한 번에 이루어졌다.
그 사내의 곁에는 갑옷 입은 청년 서너 명이 있었는데, 모두 사내와 똑같은 모양의 폭넓은 칼을 가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 사내를 호위하는 호종(*扈從 : 임금이나 관리를 호위하는 수행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사내의 사방에서 호위하고 있었는데, 서로 연합하여 늑대를 공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늑대의 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 눈썹이 매서운 사내가 살기등등하게 혼자서 칼을 들고 늑대 무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 늑대를 죽이며 지나가자, 나머지 호종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급히 한 손으로 칼을 휘둘러 늑대들을 죽이며 사내를 따라갔다.
그러나 다른 늑대들은 수시로 튀어나와 그들을 공격했다.
심협은 그들을 보던 시선을 돌리고 손으로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고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칼을 잡은 채, 한쪽 내측 벽을 따라갔다.
심협이 앞에 있는 각루(*角樓 :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성벽 위의 모서리에 지은 누각)를 향해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발 근처에 머리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얼굴의 반이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와 살이 범벅이 된 채, 분노와 여한 서린 표정의 머리가 굴러와 있었다. 이를 본 심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아들……. 이 짐승!”
심협이 처참한 외침이 들리는 곳을 보니, 약 5, 6장 밖에 오십 살 정도의 장대한 노인이 비통한 얼굴을 하고 양손으로 붉은 술이 달린 긴 창을 든 채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태도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창을 내찌르자마자, 회색 늑대 한 마리의 목을 관통시켰다.
하지만, 그 노인이 창을 뽑기도 전에 다른 회색 늑대가 나타나 노인의 목을 물었고, 노인은 그대로 무릎 꿇은 자세로 쓰러지고 말았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급히 칼을 들고 달려가 그 장대한 노인을 구해보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를 제지했다. 심협이 고개를 들어보니, 치켜세운 거친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자신을 구해준 사내였다.
“이미 늦었소.”
사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회색 늑대가 달려들더니, 노인을 물었던 늑대와 앞다퉈 노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노인은 순식간에 생으로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 광경에 심협은 미간을 심히 찌푸리고는, 다시 그쪽을 보지 않았다.
“이보게 도사 청년, 성 방어전에 처음 나왔는가?”
사나운 눈썹의 사내는 눈으로는 사방을 경계하며 물었다.
심협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충 대답했다.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춘추관 제자의 의복은 비록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그 사내는 심협이 입은 옷이 도사의 의복인 걸 알아본 듯했다.
“처음인데도 혼자서 늑대 한 마리를 해치웠다니, 대단하군. 이름이 어찌 되는가? 내가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돌아가 도사에게 술 한 잔 대접하겠네.”
사나운 눈썹의 사내가 피 한 모금을 힘껏 내뱉으며 물었다.
“심협이라 하오.”
“좋네, 심노제! 나는 우몽(于蒙)이라고 하네. 자네만 괜찮다면, 나를 우대형이라 부르시게.”
그 사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대형.”
심협은 전혀 망설임 없이 그 사내를 바로 우대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방금 우몽의 화살이 아니었다면, 심협은 분명 또 한 번 죽었을 터였다.
“좋군! 자네 내 뒤에 서서 내 뒤편 방어를 해 주게. 앞은 내가 방어할 테니 말이야. 자네한테 술대접을 할 수 있게 잘 지켜야 하네.”
우몽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칼을 쥐고 우몽의 뒤편에 섰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섰는데, 서로 의지가 되니 오래 함께한 전우와 같이 전쟁에 나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 심협은 우몽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곳은 어디이며, 그 많은 거대한 늑대들은 또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물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해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우몽이 앞에서 늑대 한 마리를 막아냈다.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칼날에 부딪히자, 소름 끼칠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일었다.
이를 본 심협은 바로 앞으로 나가 양손으로 칼을 잡고 우몽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부터 맹렬히 찌르며 순식간에 늑대의 왼쪽 눈을 공격했다.
공격을 당한 그 늑대는 처참히 울부짖으며, 우몽을 방어하던 힘이 순간 풀어졌다.
우몽은 이미 수차례 늑대와 맞붙었던 경험이 있는 자였기에, 이리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우몽은 몸을 한번 움츠리는 것 같더니 꿇은 자세를 하고 늑대의 몸 아래쪽을 공격해갔다. 그가 칼을 들어 위쪽으로 맹렬히 휘두르자, 순간 핏빛이 튀어 오르더니 늑대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늑대를 마주한 채 있었던 심협은 순간 온몸이 늑대의 피에 젖고 말았다.
“심노제, 정말 잘했네!”
우몽은 늑대 시체 아래에서 나오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말했다.
심협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한바탕 혼란이 인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체구의 검은 늑대 한 마리가 돌연 성 안으로 넘어온 것이다.
검은 늑대는 성벽에 구멍 난 곳을 몸으로 세게 부딪쳐, 약 3, 4장(丈)의 더 큰 구멍을 만들어내고는 다시 성벽 바깥쪽으로 나갔다.
검은 늑대가 양 발톱을 몇 차례 휘두르자, 성을 지키던 장정 네다섯 명의 인후(咽喉) 부위가 베어져 나갔다.
검은 늑대는 인육을 탐하며 사람을 죽이는 회색 늑대와는 달랐다. 검은 늑대는 시체를 물어뜯지도 않았고, 그저 발톱을 휘둘러 시체들을 다 날려버리고는 바로 다른 장정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 공격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성의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면서, 수십 마리의 회색 늑대들이 기세를 몰아 성으로 밀고 들어와 전쟁에 가담했다.
그 검은 늑대는 혼란스러운 틈에 이리저리 뛰어오르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사방에 흩어져있는 늑대들 때문에, 심협과 우몽은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더 벌어지게 되었다.
심협은 마음이 급해져 고개를 돌려 우몽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돌연 낯빛이 크게 변하며 소리쳤다.
“피하시오!”
우몽도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기엔 너무 늦어버렸기에, 양손으로 칼을 잡고 몸 뒤를 향해 위로 비스듬히 찔렀다.
순간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왔다. 언제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를 검은 늑대가 우몽 수중의 넓고도 큰 칼을 물었던 것이다. 칼에서는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이 났고, 우몽이 아무리 뽑아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은 늑대가 머리를 흔들며 견고한 이빨을 다물자, 와작 소리와 함께 우몽의 칼이 그대로 동강 나버렸다.
칼이 부서질 때, 우몽은 앞을 향해 굴러가 검은 늑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심협에게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도망치게!”
하지만, 그때 늑대는 검은빛이 번득이는 발톱을 들어, 형태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우몽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본 심협은 이를 악물고 검은 늑대에게 달려들어, 들고 있던 칼로 매섭게 찔렀다.
이때 심협은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기에, 칼은 검은 늑대의 어깨를 수 촌(寸)의 깊이나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 검은 늑대의 근골이 회색 늑대에 비해 몇 배는 더 강한 탓에, 그리 깊이 칼을 찔렀음에도 심협은 늑대의 어깨뼈까지만 찌를 수 있었다. 칼은 더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뽑히지도 않았다.
통증 때문에 검은 늑대의 발톱 휘두르는 속도가 느려지자, 우몽은 그 틈을 타 옆으로 피해 굴러간 후, 자리에서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심협은 이 상황을 보고는, 바로 칼을 포기하고 후퇴한 뒤 우몽과 나란히 섰다.
“이 검은 늑대는 체력이 엄청나네. 게다가 내 칼도 잃었으니, 저 늑대를 되는대로 방어하다가 자네는 기회를 봐서 도망치게.”
우몽이 감격에 찬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심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땅에 떨어져 있던 칼을 하나 들더니 자신에게 달려드는 회색 늑대에게 휘둘렀다.
바로 검은 늑대와 사투를 벌이던 우몽은 순식간에 열세에 처해, 계속 위험한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심협은 땅에 떨어져 있던 깃발을 발견하고 돌연 무언가 생각해냈다. 저 검은 늑대가 이리도 강력해 보통의 무기로는 물리칠 수 없을 테니, 소뢰부를 사용해 보려는 것이다.
비록 심협이 현실 세계에서는 소뢰부의 효과 발휘에 모두 실패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그런 것까지 따질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뭐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그는 급히 몸을 숙여 깃대에서 그 깃발을 떼어냈고, 손가락에 몸에 묻어있던 늑대의 피를 묻혀 깃발에 부적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심협은 손에 묻은 늑대의 피를 닦아내고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피를 냈다. 뒤이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기마자세를 취할 틈도 없이 바로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꾸준히 소뢰부 쓰는 연습을 해 온 심협에게 지금 소뢰부 부적 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순식간에 부적을 다 쓴 심협은 깃발을 들고 우몽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고작 호흡 7, 8번 정도 할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전세에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많은 회색 늑대들이 성안으로 진입해 있었고, 검은 늑대들도 늑대 무리에 섞여 있었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양쪽에 있는 각루로 퇴각하고 있었다. 우몽과 심협은 더더욱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많은 회색 늑대들은 방향을 틀어, 우몽을 둘러싼 늑대 무리에 합류하고 있었다.
“도련님…….”
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우몽의 호종 4명이 있었다. 그들도 전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각루에서 이쪽으로 오려고 늑대 무리를 헤치며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성안의 늑대가 너무도 많으니, 그들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이곳까지 늑대 무리를 헤치고 올 수는 없었다.
심협과 우몽이 있는 곳도 이미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쿵!
그때 갑자기 하늘을 울릴 듯한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심협이 얼른 시선을 돌려보니, 우몽이 검은 늑대에 의해 성벽으로 몰려 있었다. 우몽의 몸은 성벽 내측에 딱 붙을 정도였다.
검은 늑대의 뒤에 있는 회색 늑대 두 마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자세로 우몽을 노리고 있었다.
우몽의 상황은 점점 아슬아슬해지고 있었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심협은 굳게 마음먹고, 우몽이 있는 곳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늑대가 가까워지자, 그는 성벽을 딛고 뛰어올라 소뢰부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늑대 머리에 덮었고, 바로 소화양공을 운공해서 양기를 부적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깃발에 선혈로 그린 부적의 제일 윗부분 ‘뢰(雷)’자에서부터 하얀 빛이 일기 시작하더니, 아래를 향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적의 반 정도까지 퍼지고 나자, 돌연 빛이 끊어지며 사라져버렸다.
“실…… 실패했어…….”
이미 땅에 내려와 있던 심협은 그 모습에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돌연 우르르 쾅쾅 소리가 울렸고, 뒤이어 찬란한 하얀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치더니 소뢰부 깃발을 쓰고 있는 검은 늑대의 머리 위에 적중했다.
검은 늑대의 머리는 순식간에 잘 익은 수박처럼 벼락에 맞아 떨어졌다. 그곳에선 짙고도 푸른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는데, 역한 탄내도 함께 풍겨왔다.
머리를 잃은 늑대의 시체는 힘없이 푹 쓰러지며 우몽을 덮쳤다. 늑대 시체 쓰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검은 늑대 뒤에서 우몽을 누리던 회색 늑대들은 순간 놀라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