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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8화 (18/1,214)
  • 18화. 또 한바탕 꿈?

    며칠이 지난 후, 밤이 되었다.

    심협은 등불을 켜두고, 탁자에 앉아 ‘장천사항요기사’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 곁에는 종이 한 뭉치와 부적을 썼던 붓이 놓여 있었다.

    지난번 꾸었던 악몽은 그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지만, 심협은 책에서 본 부적이 꿈속에서 영험함을 발휘해 자신의 목숨을 살렸던 것만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이틀 전부터 매일 밤 책에 나온 부적을 백지에다가 모사하고 있었는데, 그가 가장 공들여 모사하는 부적은 공(攻) 부적, ‘소뢰부’였다.

    예전에 심협은 소뢰부를 그리 많이 써보지 않았다. ‘장천사항요기사’를 얻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는 붓글씨를 연습하듯 부적 쓰는 것도 열심히 연습한다면 분명 진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부적 쓸 때는 기와 정신을 통일시켜야 했다. 만일 부적의 문양만 비슷하게 그릴 뿐 별로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저 손가는 대로 쓰는 것이 될 뿐이었다.

    영험한 효과를 가진 부적을 쓰는 건 정신적 소모가 꽤 컸기에, 결국 심협은 부적 십여 장을 쓰고 나서 정신적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피곤해진 미간을 문지르다가 먹과 붓을 정리한 뒤 침상에 누웠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졸음이 쏟아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은 반쯤 깬 상태로, 귓가에 돌연 처참한 비명 소리를 들었고, 코에서 강한 피비린내가 전해져 오는 걸 느꼈다.

    그는 순간 놀라 두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선혈이 낭자한 끔찍한 얼굴이 나타났다. 눈을 크게 뜨고서 심협의 얼굴에 붙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그 얼굴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아…….”

    심협이 놀라 소리 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세게 밀치자, 그에게 밀착되어 있던 시체가 한쪽으로 밀려갔다.

    심협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강한 피비린내가 머리 위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순간 심협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회색 늑대의 머리였다. 그 늑대는 시뻘겋게 입을 벌리고 심협의 목을 노리며 다가왔는데,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들엔 피맺힌 살점들이 걸려 있었다.

    심협은 심장이 크게 요동치며 머릿속이 하얘진 나머지, 본능적으로 급히 몸을 움직여 한쪽 옆으로 굴러갔다. 그와 동시에 피비린내로 가득한 늑대의 입이 심협의 코앞을 스쳐갔다.

    곧이어 심협은 양다리에 압박되는 통증을 느꼈다. 그 회색 늑대의 육중한 몸이 심협을 덮쳐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예전 춘화현에서 사냥꾼이 잡은 늑대 시체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늑대는 춘화현에서 가장 크다는 사냥개보다 두 배는 커 보였는데, 지금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 늑대는 예전에 본 늑대 시체보다 한참 더 커 보였다.

    심협은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늑대의 무게를 견디며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늑대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돌연 그 회색 늑대는 뒤로 한번 물러나 섰고, 심협이 몸을 뺄 겨를도 없이 다시 피비린내가 몰려왔다.

    그 회색 늑대가 다시 심협의 목을 겨냥하며 덮친 것이다.

    심협은 침착한 모습으로 꽤 빠르게 대응했다. 그는 연달아 옆걸음질 치며 늑대의 입을 피하더니, 양손으로 늑대의 목을 잡고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나 늑대는 심협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늑대는 몸을 아래로 낮추더니, 그대로 심협과 함께 바닥으로 자빠져 버렸다.

    이번에 심협은 늑대에게 심하게 깔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손을 절대 풀지 않고 필사적으로 늑대의 목을 잡더니, 어깨를 힘껏 위를 향해 올렸다. 모양새가 마치 늑대의 목을 조르려는 듯했다.

    늑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돌연 일어나더니,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 심협을 떨어뜨리려 했던 것이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바로 늑대에게 물려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심협은 여전히 양손에 힘을 꽉 주는 동시에, 양다리 사이에 늑대의 배를 끼워 마치 원숭이 같은 모양으로 늑대의 몸 아래에 매달렸다.

    그러자 늑대는 계속 울부짖고, 펄펄 뛰며 옆의 성벽에 몸을 부딪쳐 심협을 떼어내려고 했다.

    겨우 양손과 양발에 힘을 줄 수 있게 된 심협이 어찌 늑대를 쉽게 풀어줄 수 있겠는가?

    심협은 양팔에 핏줄이 가득 선 채 야수처럼 울부짖었고, 이번엔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늑대의 목을 졸라 잡았다.

    늑대는 계속 몸부림치며, 심협을 매단 채 계속 땅에 넘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죽어도 손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심협은 머리를 늑대의 목에 파묻어가며 버텼다.

    심협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늑대의 목도 더 조여 왔다. 늑대는 내쉬는 숨이 많아졌고, 들이쉬는 숨이 적어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졌다. 늑대의 코에서도 헐떡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잠시 뒤, 늑대의 걸음에 점점 힘이 빠지더니, 한쪽 성벽 밑을 향한 채 쓰러졌다.

    심협의 이마와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늑대가 아직 죽었는지 몰랐기에, 그는 늑대를 잡은 목에 여전히 힘을 풀지 않았다. 왼손으로 오른쪽 팔을 쥐고 있으니, 오른팔에 보랏빛 멍도 올라왔다.

    심협은 늑대의 마지막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게 되자, 천천히 손을 풀어 늑대의 몸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 늑대는 이미 죽었는지, 새빨간 혀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길게 축 늘어져 나와 있었고, 입안에서는 피를 울컥 쏟아내고 있었다.

    죽다 살아난 심협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때서야 심협은 겨우 사방을 살피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해볼 수 있었다.

    사방을 살피던 그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지금 심협은 무너진 성벽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는데, 성벽의 마도(*馬道 : 성벽 위로 말을 달릴 수 있게 닦은 길)에서 병기를 든 장정 여럿이 수십 마리의 거대한 회색 늑대들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장정들의 의복과 병기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몸에 철편으로 만든 조잡한 갑옷과 투구를 입고 있었고, 어떤 이는 정제된 철로 만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망치를 들고 웃통을 벗은 채 싸우고 있었는데,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늑대 한 마리를 에워싸고 싸우는 중이었다.

    “설마 또 꿈인가?”

    심협은 망연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심협은 돌연 자신의 허벅지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허리를 숙여 살펴보니, 허벅지에 늑대와 사투를 벌이며 생긴 찰과상이 있었다. 언제 생긴 상처인진 몰랐으나, 이미 바지 절반은 다 선혈에 물들어 있었다.

    심협이 상처를 감쌀만한 것이 있는지 찾으려던 그때, 곁에서 돌연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또 다른 회색 늑대가 나타난 것이다.

    늑대는 매섭게 심협을 덮쳐왔다.

    너무 급작스러워 심협은 방어할 틈도 없이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바로 근처에 있던 무너진 성벽에 마대 자루처럼 내동댕이쳐졌다.

    심협은 그대로 성 밖으로 추락했다.

    * * *

    공중에서 추락하면서 심협은 성벽 밖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새까맣게 늑대 무리가 빽빽이 몰려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 늑대 무리는 해자(*垓子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맞은편의 기슭에서부터 무리 지어 오고 있었다.

    늑대들은 해자를 가득 메웠을 뿐 아니라 층을 이루어 성벽을 오르며 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벽 외벽에는 늑대가 한가득 걸려 있었다.

    늑대 무리 중에는, 회색 늑대들보다 체구가 두 배는 더 큰 검은 늑대들도 있었다. 검은 늑대는 하나같이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이빨에 흉악한 눈빛을 하고 있어, 가히 거대한 야수라고 부를 만 했다.

    심협이 더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그의 몸이 우글거리는 늑대 무리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앞다투어 성벽을 오르고 있던 회색 늑대들은 바로 몸을 돌려 심협 주변으로 모여들더니,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물어뜯기 시작했다.

    심협은 더 발버둥 칠 여력이 없었다. 두 다리, 두 팔, 어깨, 그리고 목이 모두 한 점 한 점 피비린내로 가득한 늑대들의 입에 물어 뜯기자, 심협은 그저 온몸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윽고 눈앞이 흐려지더니 그는 다시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성 위에서 외마디 비명이 울려왔다.

    돌연 눈을 뜬 한 청년이 자신의 앞에 있던 머리와 몸이 분리된 시체를 밀어냈다. 바로 심협이었다.

    “또 죽었다가 부활하다니……. 설마…….”

    심협은 또다시 깨어났을 때 두 번째로 피가 낭자한 얼굴을 마주하자, 우선 놀랐다가 바로 사실을 직시했다. 그는 자신이 또 위험한 악몽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

    “으르렁…….”

    피비린내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며 귓가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심협은 무언가 생각난 듯 바로 왼편을 향해 굴러갔고, 자신을 덮쳐오던 회색 늑대를 피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기 전, 근처 성벽 아래에 피 묻은 좁고 긴 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던 심협은 그대로 다시 굴러가 그 칼을 손안에 넣었다.

    그 회색 늑대는 심협을 덮치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허리를 틀어 돌아서더니 뒷발을 땅에 디디고 입을 벌리며 심협을 덮쳐왔다.

    심협은 이미 한번 이 늑대를 죽여본 데다 여러 번 죽어봤던 터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해져 있었다.

    때문에 그는 몸을 굴려 피하지 않고 회색 늑대를 똑바로 노려보다가, 늑대의 머리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피비린내가 엄습했을 때에야 머리를 옆으로 치웠다.

    회색 늑대는 심협의 머리 대신 공중을 물어뜯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심협은 칼을 꽉 쥐고 위로 비스듬히 찔렀다. 푹 소리와 함께 칼이 늑대의 목구멍을 찔러 목덜미까지 관통했고, 쓰러지는 힘에 늑대의 목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뒤이어 늑대의 목에서 순식간에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나와, 심협의 얼굴은 반쯤 선혈에 적셔졌다.

    심협의 몸을 반쯤 누르고 있던 늑대는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야 심협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의 반은 이미 늑대 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는 한 손으로 늑대 시체를 밀어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칼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아직 제대로 서기도 전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별안간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이와 동시에 심협은 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꼈다.

    긴장하면서 아직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던 심협의 귓가에 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자신의 귓가를 스쳐간 것이다.

    푹.

    심협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회색 늑대 한 마리가 비뚤어진 자세를 한 채 성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늑대는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며, 왼쪽 눈 근처에서 선혈을 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심협이 살펴보니, 금빛을 은은히 발하는 화살에 맞은 늑대가 머리를 관통당한 채 뒤편 성벽의 벽돌에 박혀 있었다.

    늑대를 맞힌 화살은 엄청나게 빨랐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심협은 그 늑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깃털에 진동이 남아 있는 화살에서 은은한 금빛이 점점 사라져가며 주홍색 화살대의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대에는 금색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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