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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5화 (15/1,214)
  • 15화. 한바탕 꿈

    소녀는 놀라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며 심협의 곁으로 갔고, 수중의 통에 약간 남아 있던 검은 개의 피를 귀신의 머리에 뿌렸다.

    이미 힘이 다 빠진 귀신이 또 검은 개의 피를 맞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파멸의 불길에 마지막 기름 붓는 격이었다.

    곧이어 귀가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반 이상 줄어있던 귀신의 몸이 맹렬히 폭발하기 시작했고, 곧 검은 기운으로 화하여 흩어져버렸다.

    검은 기운이 모두 흩어지자, 심협의 몸도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핏기가 없었고 뺨도 검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지만, 들이마시는 숨은 적은 반면, 내뱉는 숨이 많은 것이 금방 숨을 거둘 것 같았다.

    귀신이 죽은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던 소녀는 온몸에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심협의 상태를 보고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손으로 심협을 흔들어 보았다. 소녀의 손이 닿은 곳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소녀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손을 뻗어 심협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이때, 심협의 안색이 돌연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양발에서부터 시작해 형태가 모호하고 투명해져갔다.

    잠시 뒤, 심협은 있던 자리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이곳에 나타난 적도 없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그 자리에서 멍해져 있다가, 텅 비어 있는 양손을 보고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고!”

    그때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침상에 누워있던 그 노인이 내는 소리였다. 노인은 크게 숨을 한번 헐떡였다.

    소녀는 노인의 기척을 듣자, 얼굴에 기쁜 표정이 드러나며, 손발로 기어서 침상 앞으로 갔다.

    노인은 눈꺼풀을 몇 번 움직여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밤이 지나고, 날이 점점 밝아왔다. 붉은 태양이 떠오르자, 밖에서 기승을 부리던 비바람도 잠시 멈추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따뜻한 빛이 비쳐 들어오고, 바깥 풍경은 쾌청했다. 산촌 부근의 안개도 많이 사라져, 저 멀리 조금 남은 안개만 보일 뿐이었다.

    소녀는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고, 옷은 풀을 많이 먹여 조금 하얗게 바래버렸다. 소녀는 등에 여기저기 기운 봇짐을 메고, 노인을 부축하여 천천히 문밖을 나섰다.

    노인은 조금 낡은 잿빛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안색은 어젯밤보다 좋아진 듯했으나, 거동은 조금 불편한 것 같았다.

    노인은 손에 반질한 윤이 나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 * *

    문을 나선 두 사람은 마을 입구를 향해 걸었다.

    노인의 몸은 매우 허약하여, 마을 입구에 이르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아…….”

    소녀는 아아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무어라 수화로 이야기했다.

    “할아비는 괜찮다. 그 장발 귀신을 물리쳤다고는 하나 마을 부근의 귀기(鬼氣)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조만간 다른 귀신이 올 것 같구나. 우리 얼른 이곳을 떠나자꾸나.”

    노인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에 소녀는 고분고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사람은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그들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별안간 하늘에서 파란 빛이 내려와 두 사람의 근처에 떨어졌다.

    빛 안에서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백의를 입은 도고(*道姑 : 여성 도인)였다.

    그 여인은 서른 살이 조금 넘어 보였고, 갸름한 얼굴에 피부가 새하얀 것이 아주 아리따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냉랭한 것이 여성에게서 찾기 힘든 맹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여인은 손에 불진을 들고 있었다.

    “귀기가 아주 강하군. 곧 귀기 서린 안개가 나타나겠어. 그런데 어찌 이곳에 자리 잡은 귀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백의의 도고가 중얼거렸다.

    노인과 소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의의 도고를 보자,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있었다.

    “그대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오?”

    백의의 도고가 다가와 두 사람을 살펴본 후 물었다.

    “늙은이가 도고님을 뵙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기쁘게 도고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다만 노인은 몸이 편치 않았기에, 허리를 숙이자마자 기침을 시작했다.

    소녀는 급히 한 손으로 노인의 등을 두드렸지만, 어리고 힘이 약한 탓에 나머지 한 손으로만 노인을 부축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노인장, 예의 차리실 것 없소. 빈도는 부운산(浮雲山)의 뇌음상인(雷音上人)이오. 방금 구름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데, 귀기가 모여 있는 것이 느껴져 살펴보러 왔다오.”

    백의의 도고는 왼손의 불진을 휘둘러 노인의 몸을 안정되게 받쳐주고는 오른손을 세워 인사하며 말했다.

    “네, 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인은 호흡이 돌아오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몸 뒤로 숨은 소녀는 노인의 소매를 잡고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의 도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대들은 이 마을 사람들인 것 같소. 이 마을이 귀신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소?”

    도고는 소녀의 봇짐을 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저는 손(孫)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를 보고 손씨 할아범이라고 부르지요. 이 아이는 제 손녀입니다. 저희는 이 장가장(張家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저희 마을은 원래 황미대왕(黃尾大王)을 수호신으로 모셨는데, 마을이 가난하기는 해도 편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귀신이나 괴물의 습격을 받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러나 황미대왕께서 지난달 천둥과 비가 내리던 날에 갑자기 돌아가시자, 장발의 귀신이 나타나 매일 밤 마을에 와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귀신에게 죽임을 당하여, 이제 저와 손녀 두 사람만 남게 되었지요.”

    손씨 할아범은 한숨과 함께 비통해하며 말했다.

    “황미대왕?”

    도고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정령으로 화한 누런 개입니다.”

    손씨 할아범이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음. 정령과 같은 부류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정도(正道)에 어긋날 건 없지. 천둥과 비가 내리던 날 죽었다는 것은 아마도 천둥의 힘을 빌어 화형지겁(化形之劫)을 넘어보려다 실패해 목숨을 잃은 듯하네.”

    도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손씨 할아범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고에게 더 묻지는 못했다.

    “그대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로 혈기가 왕성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해를 당했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소?”

    도고는 두 사람을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건…… 황미대왕께서 생전에 감실을 저희 집 근처에 놓아두었습니다. 아마 황미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셨어도, 그가 남긴 위력이 저희를 보호해 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희 집에 검은 개의 피가 있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도고의 물음에 손씨 할아범은 멍해졌다가 주저하며 말했다.

    도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는 분명 손씨 할아범의 대답이 시원치 않다는 뜻이었다.

    도고는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소녀에게 시선을 멈췄다.

    “어!”

    도고의 시선이 돌연 소녀에게 향하더니, 위아래로 살피며 훑어보기 시작했다.

    고도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굽히자, 한 줄기 순백색 빛이 도고의 손가락에서 나오더니 순식간에 소녀의 미간에 들어갔다.

    순간 소녀는 몸이 굳더니, 몽롱하게 두 눈의 초점을 잃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옅고도 영롱한 백색광이 끝없이 반짝였다.

    “이제 보니 네가 백호살(白虎煞)을 타고났구나! 어쩐지 귀기의 침입을 이리 오랜 시간 막고 있었더라니……. 대단하구나, 대단해.”

    도고의 기쁜 내색을 보였다.

    백색 빛이 소녀의 얼굴에서 빠르게 사라지자, 소녀의 양 볼이 붉게 변했다. 소녀는 맥없이 쓰러지며 혼절하였다.

    “도고님!”

    손씨 할아범은 놀라 소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오히려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노인장, 놀라지 마시오. 손녀는 잠이 든 것뿐이니, 별문제 없을 것이오.”

    도고가 손을 뻗어 노인을 부축하며 천천히 설명했다. 손씨 할아범이 이 말을 듣고서야 한숨을 놓았다.

    “한 마을 사람들을 살해했다니, 이 귀신 놈은 담도 크구나! 노인장, 장발 귀신이 낮 동안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시오? 내가 가서 그 귀신을 없애 장가장 사람들의 원혼을 위로하겠소.”

    도고의 살기 띈 얼굴에는 매서운 파란 빛이 은은하게 비춰왔다.

    “도고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 다만 손녀에게 듣기로는 어젯밤 그 귀신이 또다시 마을을 습격했을 때, 길 가던 청년이 물리쳤다고 합니다.”

    손씨 할아범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청년은 어떤 모습이었소? 뭔가 특이한 점이 있었소?”

    도고는 의아해하더니, 왼손에 있던 불진을 오른손으로 옮기며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제가 요 며칠 계속 와병 생활을 한데다, 어젯밤에는 계속 정신이 혼미하여 그 청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손녀가 깨어나면 다시 물어보시지요.”

    손씨 할아범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도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일을 더 캐묻지 않았다.

    도고가 이어서 말했다.

    “그 귀신은 물리쳤다고는 하나, 이곳은 더 이상 머무를 곳이 못 되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거처를 찾아보는 게 좋겠소.”

    “네, 감사합니다.”

    손씨 할아범은 크게 기뻐 감사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백의의 도고가 불진을 휘두르니 하얀 구름 덩어리가 공중에서 나타났다. 구름 덩어리는 세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더니, 아주 빠른 속도로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새 지저귀는 소리가 상쾌하게 퍼지는 새벽, 한 줄기 햇빛이 소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 반쯤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침상에 누운 이의 얼굴 위를 비추었다.

    심협은 눈꺼풀을 미미하게 떨며 실눈을 뜨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아야.”

    그런데 손을 들자마자 근육이 뽑힐 듯한 뻐근함이 느껴져, 심협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극한의 공포가 밀려오자, 그는 침상에 앉아 몸을 웅크리며 급히 사방을 살폈다.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는 벽에 딱 붙어있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 오래된 서적이 쌓여 있었다. 탁자 근처에는 창문과 문이 있었는데, 이 모든 건 심협에게 지극히 익숙한 것들이었다.

    심협은 뛸 듯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숙여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의복은 손상된 곳 없이 멀쩡했고, 참기 힘들 만큼 몸이 뻐근했으나 전혀 다친 곳은 없었다. 몸 상태는 마치 무리해서 운동하고 난 후에 느껴지는 불편함과 비슷했다.

    그때, 습한 곰팡이 냄새와 단향의 향이 섞인 익숙한 냄새가 코를 자극해, 순간 재채기가 난 심협은 그제야 자신이 춘추관의 정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젯밤 일어났던 일이 한바탕 악몽이었다니!”

    심협은 자신의 침상을 만져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겪은 상황 하나하나가 이리도 눈에 선한데.’

    심협은 순간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소매도 들어보고, 이마도 만져보고서야 자신의 이마와 귀밑머리가 식은땀에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등에도 습기가 가득해, 옷이 등에 붙어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심협은 잠시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자신이 항상 기상하던 시간이 이미 지난 것을 알아챘다. 심지어 아침 수련까지 지각할 것 같았다.

    “한바탕 꿈이었구나…….”

    심협은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시키려는 듯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리고는 몸을 움직여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두 발로 신발을 딛고 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심협은 넘어지며 양팔로 몸을 지탱하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심협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겨우 일으키고 다시 침상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원래도 그의 체질이 허약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너무 심하게 힘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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