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이한 산촌(山村)
심협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모질게 때렸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전해지는 것이 분명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것이지? 난 분명 정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찌 돌연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누군가 나를 몰래 춘추관에서 납치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심협은 급히 입고 있는 옷을 살피기 시작했다. 소매를 들어 소매에 새겨진 춘추관의 표식을 자세히 살펴보고, 손발을 풀어주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어제 너무 피곤했던 까닭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이 들었었는데…….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대로이고, 몸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군.’
심협은 마음속으로 의아했지만,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게 가장 급선무라 생각해 억지로 진정한 후 다시 사방을 살폈다.
부근의 공기에 음한한 기운이 가득한 것을 보면 분명 여름인 것 같았지만, 추위는 마치 늦가을과 같아서 옷이 너무 얇게만 느껴졌다. 이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겉옷의 옷섶을 여미었다.
그러다가 심협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끝이 없는 흑막(黑幕)과 같았다. 오직 외로운 달만이 하늘에 떠서 그리 밝지 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은 분명 한밤중이었다.
이때, 멀리서부터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마치 귀신 우는소리처럼 들렸다. 안개가 많이 걷혀진 덕에, 심협은 어렴풋이 눈앞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오솔길을 따라 조심스럽고 천천히 걸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길 양쪽에 평평하게 고른 토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는 농작물도 심어져있는 게 아마 밭인 것 같았다. 농작물이 없는 밭에도 진흙이 흐트러져 있는 걸 보니, 분명 낮에 경작하고 난 흔적인 듯했다.
이 광경을 보자, 심협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밭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살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닐 것이다.
심협은 자신이 비록 어쩌다 연고도 없는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따져볼 여력이 없었다.
그는 걸음이 빨리하며, 계속 이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향했다.
* * *
밤안개가 점점 옅어지자, 저 멀리 있는 곳이 점점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약 1 리(里) 앞에는 산을 따라 띄엄띄엄 지어진 민가가 있었고, 흐릿하게 등불도 보이는 듯했다.
이를 발견한 심협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면 분명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야.’
이러한 생각 때문인지 그는 멀리 보이는 등불에서 따뜻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은 등불이 보이는 곳에서 백 장(丈) 정도의 거리까지 이르렀다.
이곳에는 역시 작은 산촌이 있었는데, 마을은 약 10여 가구 정도로 크지 않았다.
이미 밤이 깊어서인지 마을 전체가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만이 깔려있는 가운데, 마을 중앙의 한 민가에서만 등불이 비쳐오고 있었다.
심협은 계속 길을 따라 걷다가 마을 입구에 이르러 잠시 멈추었고, 나와서 활동하는 마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마을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는 팍 소리와 함께 발끝에 통증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찬 것이다. 발에 차인 것은 일 장 밖으로 굴러갔다.
크게 놀란 심협은 얼른 무엇인지 확인했다. 굴러간 것은 반 토막이 난 지저분한 말뚝이었는데, 자신의 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머지 반 토막도 떨어져 있었다.
얼핏 봐도 평범한 말뚝 같지는 않았다. 말뚝 위에 익숙하고도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심협이 정신을 집중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뚝 위에 새겨진 것은 부적 문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굽혔고, 자신의 발밑에 있던 말뚝 반 토막을 주워 자세히 살펴보았다.
말뚝 위의 부적 문양은 투박하고 단순해서 그가 그려왔던 부적처럼 복잡하진 않았지만, 말뚝의 부적 문양이 범상치 않은 것이 왠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졌다.
잠깐 자세히 살펴봤을 뿐인데도, 심협은 돌연 어지러움을 느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부적은 말뚝 위에 새겨도 이리 효과가 대단한데, 만약 황지에 그린다면 어떠할까?’
심협은 마음속으로 추측을 해보다가, 묵묵히 소화양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양기가 단전에서부터 생성되어 몸속을 돌아 오른손까지 이르자, 순식간에 손바닥이 은은하게 따뜻해졌다. 그 손으로 말뚝의 부적 문양을 만져 본 그는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자 손을 거두었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수중의 반 토막 난 말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등불이 켜져 있는 민가로 향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뚝의 부적은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연구해도 늦지 않을 것이야.’
심협이 걸어가며 생각했다.
* * *
심협은 민가의 문 앞에 이르러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민가의 문 앞에 허물어진 감실(*龕室 : 종교에서 신위 및 작은 불상·초상 등을 모셔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등불에 의지해 감실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감실은 사람 한 명의 크기는 되었고, 전체가 새까만 색이었다. 신위는 없었고, 향로(香爐) 하나만 넘어져 향을 태운 재가 흩어진 채로 있었다.
심협의 주의를 끈 것은 감실 윗부분에 새겨진 부적 문양들이었는데, 마을 입구의 말뚝에서 본 것과 꽤 비슷했다. 다만 감실의 부적 문양은 선홍색을 띠는 것이 선혈로 그린 것 같았다.
심협은 감실을 바라보며 소름이 끼쳤던 나머지 표정이 계속 변했다.
바로 이때, 음산한 밤바람이 불어오더니 민가 근처의 나무들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수많은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떨어졌다.
뒤이어 자욱한 안개가 바람에 휩쓸려 마을 밖에서부터 몰려오고 있었다. 순간 안 그래도 어두컴컴했던 민가 앞이 더욱 어두워져, 다른 민가들이 안개 속에서 사라질 듯 흐릿해져갔다.
심협은 공기가 더욱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체온도 급격히 떨어져가는 바람에 사지가 바람 속에서 감각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우선 마음속 걱정을 접어둔 채 등불 켜진 민가 문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 * *
문 앞에 선 심협은 문을 두드리려다가 주저하며 손을 거두었다. 뒤이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냄새를 맡던 그는 바닥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닥에는 검은 피가 문 틈새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피는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곧 그의 발밑까지 흘러올 기세였다.
심협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 그대로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미친 듯이 고막을 울려댔고, 호흡 또한 이상하리만치 싸늘해져 마치 그의 몸속에서 칼들이 끊임없이 마찰하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심협은 자신이 평생 이리도 빨리 뛰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는 마치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마을 입구에 이르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바로 마을 밖으로 벗어났다.
이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돌연 심협이 멈춰 섰다. 그는 빳빳하게 굳은 채로 땅에 쓰러졌는데, 지면에 반 장(丈) 정도 깊이의 흔적이 남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심협은 굳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슴 부분에는 무언가 심히 차가운 것이 붙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심협은 힘겹게 낮은 소리를 일갈하면서 필사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조금은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급히 가슴 쪽 의복을 풀어헤친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 숙여 살펴보니, 그의 가슴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뚜렷한 검은 손바닥 자국 두 개가 보였다.
보통 사람의 손 크기와 비슷하고 칠흑처럼 검은 것이 점점 위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심협은 손바닥 자국이 지나는 곳이 심히 차가워, 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손바닥 자국은 목의 측면까지 올라와, 마치 진짜 손처럼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심협은 놀라면서도 분했지만, 점점 호흡곤란에 처해지고 있어 자신의 감정에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었다.
이때, 그는 그동안 춘추관에서 읽었던 잡서들의 내용이 떠올렸다. 왠지 지금 상황을 책에서 읽어봤던 것 같았다.
심협은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으로 원 모양을 만들고, 필사적으로 소화양공을 운공하였다.
따뜻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빠르게 온몸으로 퍼지자, 목에도 옅은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이로 인해 검은 손바닥 자국도 조금은 흐릿해졌다.
심협은 자신의 목을 조르던 힘이 조금은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잠시 기뻐했으나, 다시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갑자기 스산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고막이 떨리고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기에, 심협은 결국 소화양공의 운공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운공을 멈추니 그의 목에 있던 손바닥 자국이 다시 짙어졌다.
주변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이윽고 잿빛 스산한 안개가 일기 시작하더니, 심협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심협의 몸은 물에 잠겨있는 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체내의 양기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지에 감각을 잃은 심협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다시 호흡곤란을 느꼈다.
그렇게 심협은 점점 의식을 잃어가더니, 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촌은 순간 늪처럼 변해 버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심협의 몸은 미동도 없이 진흙탕에 누워 있었다.
* * *
요란한 벌레 우는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심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고는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협소한 길, 습한 공기, 짙은 풀 내음, 잡초가 무성한 지면, 그리고 멀지 않은 곳의 안개까지.
“여기는…….”
순간 눈이 동그래진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땅에서 습한 진흙을 한 주먹 쥐었고, 이 모든 것이 실제임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말도 안 돼…….”
그는 손안의 진흙을 버리고, 재빨리 일어나 다시 사방을 확인하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말…….”
심협은 그 자리에서 반신반의하며 서 있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길 양쪽에 위치한 개간된 밭, 저 멀리 산을 따라 지어진 어두운 산촌, 그리고 산촌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까지…….
심협은 다시 한번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어떻게 왔던 곳을 다시 되돌아왔단 말인가? 설마 내가 정말 죽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방금 일어났던 일들은 모두 한바탕 꿈이었던 건가?’
심협은 지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심협은 조금 전에도 이곳에 왔었고, 그때 봤던 풍경도 지금 보이는 것과 똑같았다는 것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뒤이어 산촌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겪은 일들을 떠올린 그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심협은 급히 자신의 목을 만져보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아무 이상이 없으니, 아마 방금 발생했던 일들은 분명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분명 죽음의 공포를 여실히 느꼈었으니 말이다.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검은 피, 감실, 그리고 검은 손바닥 자국……. 뭔가 이상해.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어!’
저 멀리 산촌을 바라보던 심협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심협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생각해보다가 뭔가 결심한 듯 돌연 손을 들어 식지를 피가 나도록 깨물고는, 선혈로 상의의 가슴 부분에 부적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부적 문양은 예전에 잡서에서 본 귀신 쫓는 부적이었다.
책에 기재되어 있기를, 법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양기(陽氣)만 충분하다면 그 선혈로 귀신 쫓는 부적을 써도 약간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이 진짜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 시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