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화 (9/1,214)
  • 9화. 백색광

    경험이 한번 생기니, 이번에는 절반의 시간만 들여 백색광을 부적에 주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뢰부의 문양이 한번 반짝이고는 끝이었다. 게다가 빛나는 시간도 처음보다 짧았다.

    “아직 3장이 더 있구나.”

    심협은 이를 악물고는 다시 부적을 집어 들었다.

    * * *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심협의 수중에는 원석 2개와 소뢰부 1장만이 남게 되었다. 시험을 마친 부적 4장 중 단 1장도 부적의 효과를 발휘시키지 못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심협은 부적에 백색광을 가장 잘 주입시켰다. 그때는 적어도 백색광이 부적의 문양을 따라 퍼져, 부적 전체가 사람이 한번 호흡할 시간 동안 빛났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시도했던 3번에선 모두 빛이 지속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심지어 4번째 시도했을 때에는 백색광이 부적 문양의 1/3 정도만 퍼졌다. 이건 분명 부적의 문양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심협은 진작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리 실패를 거듭하니 망연자실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어쨌거나 부적을 시험하겠다고 그리 많은 준비를 했고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심협은 몸에 무리가 온 듯 얼굴이 상기되어 갔다. 부적의 효과를 발휘시키는 일 자체가 그의 몸에 큰 무리가 따르는 일인데, 연속으로 4번이나 시도했으니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피로가 느껴졌던 것이다.

    “정말 형편없는 몸뚱이로군.”

    이렇게 중얼거리던 심협은 부적과 원석을 한쪽에 감춰두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화양공을 운공하며 심호흡했다.

    그러자 한 줄기 옅은 붉은 선이 그의 아랫배에서 일어나, 체내의 경맥을 에워싸고 천천히 퍼졌다.

    * * *

    반 시진 즈음이 지나 심협이 눈을 떴다. 얼굴엔 피곤했던 기색이 사라지고, 약간의 혈색이 돌고 있었다.

    예전에 사부가 소화양공이 몸에 좋다고 했던 말은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소화양공의 입문에 이르고 나니, 체력을 회복하는 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한 시진은 지나야 겨우 이 정도로 회복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겨우 반 시진 가량이면 체내의 기혈을 고르고 기력도 처음과 같이 회복했다.

    심협은 일어나서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마지막 부적을 꺼내었다. 이번 부적의 다른 점은 검은 개의 피에 주사를 섞어 쓴 부적이라는 것이다.

    “분발해보자!”

    심협은 이번 부적을 몇 번이고 살펴보며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았다.

    그는 바위 위에 부적을 둔 채 다시 원석을 부적 위에 놓아두고는 또 한 번 동일한 자세를 하고 운공을 시작했다.

    조금 전 4번의 실패 경험에서 그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소화양공으로 체내에 축적한 양기를 통해 원석의 효과를 발휘시킨 것이었다.

    진정한 지식은 실천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4차례 시도를 통해 심협은 체내의 양기를 조절하는 능력을 진일보 시켰을 뿐 아니라, 원석의 사용법도 익히게 되었다.

    만일 이번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면, 더 능숙하게 원석의 힘을 발휘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윽고 익숙한 빠직 소리와 함께 원석이 부서졌고, 안에 있던 백색 기체가 백색광으로 변화해 나타났다. 뒤이어 심협의 오른손 장심에 응집되어 있던 붉은 선이 반짝이더니 백색광을 이끌고 부적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단숨에 이루어졌다. 심협은 가득 충혈된 눈으로 부적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아주 작은 변화 과정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백색광이 들어간 이후 함흥차사라도 된 듯, 부적에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금 얼굴이 상기된 심협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박동 수가 더 빨라진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검은 개의 피에 주사를 섞는 방법이 잘못된 것 같구나. 그 ‘장천사’라는 이에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더니, 역시나 잘못된 방법이었어.”

    심협은 이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를 기쁘게 할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던 부적의 중간 부분에서 갑자기 눈부신 백색광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부적의 문양을 따라 전체 부적을 뒤덮었던 것이다.

    백색광으로 눈이 부신 부적을 본 심협은 마음속에 흥분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급히 뒤로 7, 8 걸음 물러서며 부적과 거리를 두었다.

    이 부적은 요괴들조차 두려워한다는 소뢰부였기에, 만일 부적의 효과라도 나타났을 때 그가 부적 근처에 있다면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부적 표면의 백색광은 이미 부적 자체에 흡수되었다. 곧이어 부적은 격렬히 요동침과 동시에 점점 밝아지더니, 주위 수 장(丈)을 환하게 비출 수 있을 정도로 빛나게 되었다. 마치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협은 백색광으로 눈이 부셨지만, 여전히 부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속은 더욱 흥분되었고,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올 기세로 뛰고 있었다.

    “성공하는 것인가?”

    막 기대하기 시작할 무렵, 눈앞의 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부적에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이내 부적을 뒤덮고 있던 빛이 순식간에 거두어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바위 위에는 소뢰부 부적만 남게 되었다.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심협은 이 모든 걸 잘못 본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는 힘주어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살펴봤으나, 소뢰부가 놓인 자리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에 심협은 크게 실망하고야 말았다. 5장이나 되는 부적이 모두 실패한 걸 보니, 이는 분명 부적을 쓸 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적 문양 자체가 문제였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부적의 도안은 잡서와 유람기에서 찾아낸 것이라 거짓으로 꾸며낸 부적 문양일 가능성도 컸던 것이다.

    “됐다, 그냥 법술을 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구나. 다만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심협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부적을 수습하러 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뒷산이 워낙 고요하여 분명하게 들렸다.

    이 소리에 실망에 빠져있던 심협은 크게 놀랐다.

    이윽고 바위 위에 있던 부적에서 문양이 시작되는 ‘뢰(雷)’자가 갑자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드러운 백색광이 부적 표면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주위 4, 5 장(丈) 정도를 비추었다. 마치 보름달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이를 본 심협은 십여 보(步)를 뒷걸음쳤다. 그의 마음에는 놀람과 기쁨의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가짜 부적으로 의심하던 이 소뢰부가 정말 영험한 힘이 있는 것 같았고, 장천사를 오해한 것도 괜스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심협은 또다시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부적이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칙칙 거리는 소리를 냈던 것이다.

    백색광이 부적에서 비쳐 나와 꽤 신기했지만, 이 현상은 소뢰부가 지녀야 할 효과 같지 않았다.

    표정이 계속 변덕스럽게 변하던 심협은 속으로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가 돌연 흠칫 놀라며 급히 주변을 살폈다.

    눈앞의 백색광이 이리도 눈에 띄니, 누군가 부근을 지나다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듯했다. 이 시간 즈음 뒷산으로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는 하나, 혹시라도 식사하고 소화시킬 겸 뒷산으로 산보 나오는 제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됐기에, 심협은 재빨리 시험하고 난 부적들과 마지막으로 남은 원석 한 알을 품에 쑤셔 넣고 남아 있던 원석 파편 등을 정리했다.

    심협은 누군가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정리가 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부적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약 한 척(尺) 정도 길이의 마른 가지를 주워 천천히 백색광으로 다가갔다.

    백색광에 가까이 이르러 걸음을 멈춘 그는 조금 더 살펴본 다음, 조심스럽게 마른 가지로 백색광의 가장자리를 건드려 보았다.

    마른 가지의 끝부분이 천천히 백색광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당장이라도 도망칠 기세였던 심협은 그제야 안심했다.

    다시 고민하던 심협은 마른 가지를 버리고 한 손을 백색광에 갖다 댔다가 아예 팔 한쪽을 백색광 안으로 넣어 휘둘러보았다. 그러고도 팔에 아무런 이상 현상이 발생하지 않자, 그는 아예 백색광 안으로 들어가 소뢰부가 놓여있는 바위 앞까지 다가섰다.

    부적은 여전히 부드러운 백색광을 발하고 있었다. 이건 책에 묘사된 소뢰부가 효과를 발휘했을 때의 상황과 한참 달랐다.

    심협은 지금 기뻐해야 할지, 아님 실망해야 할지 헷갈렸다. 기뻐하자니 힘들게 써낸 부적 5장 중 1장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아까운 원석 다섯 알만 사용해버린 게 생각났다.

    그렇다고 실망하자니, 눈앞에 있는 이 부적은 확실히 뭔가 효과가 나긴 하였다. 이건 심협이 처음으로 효과를 발휘시킨 부적이었기에, 그에게도 꽤 자신감이 생길 만한 일이었다.

    “이 부적이 비록 공격 효과는 없으나, 빛이 밝으니 어두운 밤중에도 잘 사용할 수 있겠구나. 다만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군.”

    심협은 허리를 숙여 두 손가락으로 부적을 집어 들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왔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계곡 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부적이 발하는 백색광이 심협 주변의 4, 5 장 거리에 부드러운 원을 형성했고, 심협이 지나는 곳을 모두 뚜렷하게 비추었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호기심이 일었던 심협은 이 빛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궁금하여 계속 사방을 살폈다.

    어느덧 그는 계곡 깊은 곳에 있는 산벽에 이르렀다. 산벽은 전체가 녹색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더 앞으로 가면 낭떠러지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심협은 부적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더 관찰하려 했으나, 이때 돌연 엇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산벽에 가득 덮여있던 녹색 덩굴들이 백색광이 비쳐오자 빠른 속도로 수축되기 시작하더니, 가려져 있던 산벽의 원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산벽은 거울처럼 매끄러운 것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자르고 다듬은 것만 같았다.

    심협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 산벽에 자신이 들고 있는 부적의 백색광이 투사되자 조금 투명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마치 유리 같은 표면 때문인지 산벽 안 1, 2척 이내에 있는 것들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런 신기한 광경을 그동안 심협이 어찌 볼 수 있었겠는가. 그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신도 모르게 산벽 근처로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부적이 돌연 불덩이로 변하더니, 부적이 닿아있던 손도 급격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협은 크게 놀라 팔을 마구 휘두르며 부적을 버리고자 했지만, 부적이 손가락에 달라붙어 떨쳐낼 수가 없었다.

    참기 힘든 아픔이 서서히 손에서부터 전해져왔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팔의 감각도 마비되는 것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망했다!”

    심협은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한 손으로 급히 부적을 잡고 막 찢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부적이 흩날리는 재로 변해버렸다.

    재는 심협의 손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부적에서 나오던 백색광도 재와 함께 깨져버려 크고 작은 빛 조각이 되어버렸다. 빛 조각들은 그 주변에서 흩날렸다.

    순간 멍해졌던 심협은 급히 손을 살펴봤는데, 전혀 불에 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참기 힘들었던 아픔도 이와 함께 돌연 사라졌다.

    그는 방금 경험한 것들이 모두 헛것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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