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원석(元石)
삼청전 뒤편에서 오른쪽으로 백 장 정도 가면 평평한 구릉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원 딸린 가옥이 몇 채 지어져 있었다. 춘추관의 내문제자는 이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크진 않지만 각자 독립된 가옥 한 채에 기거하며, 다른 제자들과 생활하지 않았다.
이미 밤이 깊었던 그때. 이 가옥들 중 한 채의 문밖에 세 사람이 모였다.
“전사형, 심사제, 혹시 두 사람 개띠 아니오? 내 방금 돌아왔는데, 두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구려.”
셋 중 한 명이 열쇠로 문을 열더니, 고개를 돌려 다른 두 사람에게 웃으며 말했다.
문을 열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백소천이었다. 그가 말하는 심사제는 물론 심협이었고, 전사형은 바로 2년 전 나 사부가 심협을 데려오라고 보냈던 전철생이었다.
심협은 춘추관에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보니, 전철생이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겁이 많은 편이라, 대다수의 제자들보다 춘추관에 빨리 들어왔음에도 정원 무리에게 놀림을 당하곤 했다.
전철생이 곤란을 당할 때 백소천과 심협은 수차례 도와줬고, 세 사람 모두 나 사부의 제자들이었던지라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들어가서 이야기해…….”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이내 두 사람은 백소천에게 빨리 문을 열도록 재촉했다.
방에 들어간 세 사람은 등불을 켠 후, 안채의 네모난 탁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자 백소천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기름 먹인 우피지(牛皮紙)로 포장된 것 4개와 청색 자기 단지 3개였다.
“우와, 이 냄새…… 홍운루 것인가?”
전철생은 탁자 위의 우피지 포장을 보며 침을 삼켰다.
“뭘 좀 아시는군요.”
백소천은 이리 말하며, 4개의 포장을 모두 열었다. 우피지 포장 안에는 또 연잎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포장을 열자 짙은 고기 냄새가 안채에 가득 퍼졌다.
뒤이어 백소천은 헤헤거리며 웃더니 탁자 위의 청색 단지 중 1개만 남겨두고, 2개를 가져다 침상 한 모퉁이의 칠이 된 나무 상자에 넣어 두었다.
백소천이 워낙 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 심협은 이미 이런 그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편, 전철생은 탁자 위의 거위 구이와 수육에 집중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심사제가 드디어 소화양공에 입문하였으니,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 들어야겠지.”
백소천은 자기 술잔 3개를 꺼내 와서 각각 백옥소(白玉燒)를 가득 따르고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전철생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더니, 바로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심사제가 입문했다고? 언제 입문한 겐가? 우리가 당연히 축하해 줘야지.”
“전사형, 전 소화양공에 얼마 전 갓 입문했을 뿐입니다. 백사형은 이 공법(功法)의 입문까지 2개월이 걸리셨는데, 저는 2년이나 걸렸으니 축하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심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백소천을 비롯한 내문제자는 물론이고, 보통의 외문제자라도 2년의 시간이면 총 10단계의 소화양공을 7단계에서 8단계까지 수련했던 것이다.
“수행의 길은 멀지 않은가. 좀 더 빨리 이루나 늦게 이루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달성할 수만 있다면 된 것이지. 게다가 심사제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니, 앞으로의 성과가 나보다 뒤지리라는 법도 없지 않나.”
백소천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백사제 말이 맞네.”
전철생은 거위 구이와 수육에 눈을 떼지 않으며 호응했다. 그의 눈빛엔 마치 무얼 먼저 먹을지 고민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심협은 그들의 말을 듣고 웃어넘겼다.
‘수행의 길이 멀다고는 하나 한번 뒤처지면 계속 뒤처지게 되는 것인데, 백사형의 말처럼 그리 수월할까? 게다가 내 수행은 생명 연장을 위한 것인데, 그리 뒤처져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심협은 이런 말들을 두 사형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다 좋은 일이지. 우선 건배합시다.”
백소천이 기분 좋게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맞네. 심사제, 축하하네!”
전철생도 호응하며 말했다.
“두 분 사형 감사합니다.”
심협도 감사를 표한 후 함께 술잔을 비웠다.
밖에는 달이 떠 있었지만,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퍼지는 것이 꼭 밤이 깊지 않은 것만 같았다.
심협은 체질이 허약하고 주량도 세지 않았기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반면, 백소천은 주량이 워낙 세서 벌주 등의 각종 핑계로 술을 많이 마셨지만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았고, 전철생은 주량이 약한 지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다.
전철생은 수육과 거위 구이를 많이 먹고 배가 부르니 졸음이 쏟아져, 결국 백소천과 심협의 부축을 받아 편전의 연탑(*軟榻 : 소파처럼 부드러운 의자)으로 자리를 옮겨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이 안채로 돌아와 앉으니, 편전에서 바로 전철생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소천은 그 소리에 웃으며, 소매 속에서 황지 한 뭉치와 자기병 3개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백사형, 감사합니다.”
심협은 탁자에 놓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얼른 감사를 표했다.
“부탁한 것은 가지고 왔네. 그러나 내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네.”
백소천이 웬일로 얼굴에 웃음을 걷으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적 쓰는 일은 문규가 엄하니 내 자네에게 말해줄 수가 없네. 다만 정성이 지극하면 통한다고, 자네가 줄곧 꾸준히 바라던 것이니 아마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야. 그러나 자네는 법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부적이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는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백소천이 말했다. 심협은 백소천이 자신을 도우려는 것을 알아채고 기뻐하며, 대답 대신 모른다는 뜻으로 급히 고개를 저었다.
“부적 안에 신(神)과 기(氣)가 들어있어야만 천지의 귀신과 통할 수 있다네. 부적을 사용할 때는 법력으로 부담(符膽)을 태워야 부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 다만 법력이 없음에도 부적의 효과를 나타나게 하려면, 원석(元石)과 같은 외물(外物)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네.”
백소천이 말했다.
“원석이 무엇입니까?”
심협이 의문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원석이라는 것은 그가 보아왔던 고서적에도 나온 적이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일세.”
백소천이 말하며 품속을 뒤지더니, 비둘기 알 크기의 회백석 옥돌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심협은 이 옥돌의 재질이 평범하고, 표면에 광택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옥돌엔 갈색 반점도 몇 개 있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은 빛에 비췄을 때 돌 안에 백색 기체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 돌로 부적을 태우면 되는 것이오?”
심협이 원석 한 알을 집어 들고 물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안 되네. 자신 몸속의 양기와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을 볼 수 있네. 자네가 소화양공의 입문에 이르렀으니,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만 주의하며 억지로 시도해보면 아마 가능할 것이야.”
백소천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양기도 있어야한다…….”
심협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할 것이 있겠나? 양기가 비록 법력은 아니나, 양기가 충분한 사람은 부적 쓰는 것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쉽다네. 하지만 명심하게, 부적 쓰는 일은 양기도 소모되고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있으니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되네.”
백소천이 주의를 주며 말했다.
“백사형, 알려주어 고맙소.”
심협은 백소천이 자신에게 이리 많은 것을 알려준 것이 엄청난 호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할 것 뭐 있나. 우선 원석부터 챙기고 이야기하세나.”
백소천이 턱으로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심협은 사양하지 않고 원석을 챙기기 시작했다. 백소천이 아니었다면, 이런 원석들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나큰 은혜에는 인사치레하지 않는다고 하나, 내 나중에 기회가 있거든 반드시 보답하리다.”
심협이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됐네, 나중에 내게 좋은 술이나 몇 번 대접하게. 춘화현의 화주도 괜찮다네, 하하…….”
부적 얘기를 마치자, 백소천은 다시 원래의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자리가 파하자, 심협은 전철생이 술에 취해 잠들었기에 혼자 청석평 정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산속 돌계단에는 맑은 달빛이 비쳐와, 몽롱한 백광이 뒤덮여 있었다. 사방에는 벌레 우는소리가 삼삼오오 들려오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청량한 산바람이 불어오자 심협은 약간의 취기도 점점 가라앉아, 정실에 돌아왔을 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 * *
심협은 탁자 한 모퉁이에 등불을 켜고, 소매 안에서 작은 자기병 3개와 몇십 장밖에 되지 않은 황지를 모두 꺼내 앞에 펼쳐 놓았다. 황지는 부적 쓰는 데 쓸 것이라 부적 크기로 잘라야 했다. 다만 재질이 조금 거칠어, 만졌을 때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황지를 자른 후, 자기병들을 열어본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탉의 피가 이미 응고되어 덩어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굳어버린 수탉의 피는 따르려고 해도 따라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검은 개의 피는 완전히 응고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걸쭉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안 되겠다. 지금 바로 쓰지 않으면, 내일은 모두 못쓰게 되겠구나.”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탁자의 서랍을 열어 털이 빳빳한 붓과 백옥 벼루를 꺼냈다. 붓의 털은 늑대의 털로 만든 것이었고, 벼루는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든 것이었다. 둘 다 그리 귀한 물건은 아니었으나, 심협이 입관할 때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심협이 우선 검은 개의 피를 벼루에 따르니, 공기 중에 피비린내가 그윽하게 퍼졌다. 뒤이어 그가 붓을 잡고 피를 잠시 젓자, 붓 끝은 바로 피를 머금어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심협은 황지 한 장을 들어 앞에 펼쳐놓고 붓을 들었다가 다시 멈추었다.
“다시 한번 봐야겠다.”
심협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장천사항요기사’와 ‘비법부록진감’을 찾아내 펼쳐놓고 한쪽 옆에 두었다.
‘비법부록진감’ 앞부분의 개괄적인 내용을 보면,
‘부적이란 합(合)이며, 믿음이다. 나의 신(神)을 천지의 신(神)과 합하고 나의 기(氣)를 천지의 기(氣)와 합하는 것이니, 신(神)은 형태가 없으나 부적으로 형태를 나타낸다.’라고 되어 있었다.
해석하자면, 부적이 신령과 귀신들도 예측할 수 없는 영험함을 지닌 까닭은 사람의 정(精), 기(氣), 신(神)이 천지의 정(精), 기(氣), 신(神)과 통하여, 형태가 없는 신력(神力)이 형태가 있는 부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적을 쓸 때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할 뿐 아니라, 잡념을 없애고 단숨에 생동감 넘치게 써내야만 정기가 끊이지 않고 천지와 합을 이루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알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심협은 책에 나온 부적술의 진위 여부를 반신반의하고 있었기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 잡념을 없애는 것은 무리였다.
심협은 붓을 잡고 있었으나, 마음속은 아직도 복잡했다.
사실 심협이 부적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백지에 수차례 연습해봤던 것이다. 다만 제대로 된 황지에 부적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적이라는 것은 음양이 부합하고, 정성이 지극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깊이 숨을 들이쉰 심협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마(騎馬)자세를 하고는, 입으로 책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손으로는 황지 위에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칙령(勅令)’이라는 두 글자를 시작으로, 그는 부적문(符籍文)을 물 흐르듯이 써내려갔다.
그렇게 백사피퇴(百邪避退)라고 쓰인 호신 부적을 빠르게 써 내려간 심협은 이 부적이 책에 나온 것 중 가장 간단한 부적이라고 생각했다.
심협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부적의 그림을 ‘장천사항요기사’에 나온 부적 도안과 대조해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부적 도안이 자못 비슷하기는 했으나, 살펴보니 뭔가 잘못된 것 같았던 것이다.
“운필법은 책에서 본 모양대로 따라 고쳤는데……. 어째 내가 쓴 것은 숨이 끊어진 것 같고, 책에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 없는 거지?”
심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살펴보던 그는 돌연 자신이 부적을 쓸 때 중간에 몇 번 멈춘 적이 있던 것이 떠올랐다. 책에 적힌 것처럼 한 번에 거침없이 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는 급히 숨을 참아가며 다시 순식간에 부적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숨을 참은 것이 힘들어 결국 더욱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처음 쓴 부적보다 못한 부적이 나왔다.
심협은 낙담하지 않고 잠시 휴식하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붓을 집어 들어 한 장 한 장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심협은 부적 쓰는 일도 쓰다 보면 숙련될 것이라 생각했다.
‘예전에도 백지에 수차례 진짜가 맞는지도 모를 부적을 써봤잖아. 지금은 감이 조금 떨어진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