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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화 (4/1,214)
  • 4화. 기명제자(記名弟子)

    나씨 도인은 심협을 한참 살펴본 뒤, 결심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심공자, 내 미리 몇 가지 설명하겠소. 만일 모두 승낙할 수 있다면, 공자를 제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오. 춘추관이 비록 선종(仙宗)의 큰 문파는 아니나,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니 말이오.”

    “도장님, 말씀하십시오.”

    심협이 결단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공자의 몸 상태는 빈도가 말하지 않아도 공자가 잘 알 것이오. 공자의 신체 조건은 우리 춘추관의 입문 조건에 부합하지 않소. 그러니 공자는 춘추관에 입문한다 해도, 기명제자(*記名弟子 : 이름만 올리는 제자)만 될 수 있소. 즉, 춘추관 정식 제자의 비법 전수와 대우는 받을 수 없다는 말이오. 그러나 소화양공은 내 장문 사형에게 여쭌 후, 전례를 깨고 공자에게 전수할 순 있다오.”

    “좋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나씨 도인의 말에 심협은 너무나 기뻐, 바로 사부님으로 호칭을 바꿔 불렀다.

    “급히 호칭을 바꿀 건 없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소. 빈도가 전례를 깨고 공자를 입문시키는 대가로, 심가는 빈도에게 황금 이백 냥을 시주해야 하오. 그리고 앞으로 매년 춘추관에 은 천 냥을 계속 시주해야, 공자는 춘추관에 머물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춘추관에 시주하는 은자가 부족해지는 날에는 바로 춘추관을 떠나야 하오.

    그리고 ‘홍설산’은 내 공자 몫을 신청해주겠소. 가격은 하나에 은 백 냥 정도 될 것이오.”

    심협은 비록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도인의 요구가 너무도 큰 탓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그는 속으로 이것저것 따져보기 시작했다.

    심협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에, 옆에 있던 심원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내용은 나씨 도인이 반색할만한 것이었다.

    “돈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희 집안은 십 년 치 비용을 한 번에 지불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우리 낙이가 춘추관에서 너무 고생하지 않도록 도장님께서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이리도 많은 돈을…….”

    심협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지금 우리 심가의 가업 중 반은 네 몫이다. 네가 목숨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그깟 돈이 대수일까?”

    심원각은 연거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에 심협은 자기도 모르게 말이 없어졌다.

    “좋소, 좋소, 아주 좋소! 심가에서 이리 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니, 빈도는 심공자를 기명제자로 거두겠소.”

    나씨 도인은 지극히 기뻐하며 ‘좋다’는 말을 세 번이나 내뱉었다.

    “심협, 사부님을 뵈옵니다.”

    심협은 나씨 도인을 주인이 앉는 상석에 앉도록 한 후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차를 한잔 올렸다.

    “제자야, 너는 앞으로 내 문하의 제자가 되었느니라. 네게는 사형이 한 명 있는데, 네가 춘추관에 입문할 때 소개해 주마. 춘추관의 위치는 너도 알고 있을 테니, 한 달 이내에 증표를 갖고 춘추관으로 오면 정식으로 입관 의식을 치를 것이다. 명심하거라. 너 한 사람만 와야 하며, 간단한 의복만 챙겨서 오거라.

    그리고 이 사부는 네가 사부로 받들며 올린 차를 마셨으니, 네게 뭐라도 남겨줘야겠구나. 내 마침 홍설산 하나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 복용하여 효과가 어떠한지 보거라.”

    나씨 도인은 차를 다 마신 후, 몸에서 작은 담녹색 상자를 꺼내었다. 그는 심협에게 용법을 알려주고는 훌쩍 편전을 나서 심가를 떠났고, 심협은 도인을 대문 밖까지 따라가 배웅하였다.

    * * *

    심협 몸속의 악귀가 물러갔다는 소식과 그가 출가하여 도사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 심씨 가문 전체에 파다하게 퍼지자, 집안 전체가 술렁였다. 위로는 안주인인 둘째어머니부터 아래로는 가장 낮은 서열의 마당 쓰는 노비들까지 각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춘화현의 절반 이상이 심협의 일로 떠들썩해졌다. 춘화현 사람 누구라도 이 병약한 심씨 집안 대공자를 알고 있었는데, 그 대공자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도사가 된다니 놀랄 따름이었다.

    * * *

    약 15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춘화현 밖 작고 황량한 무명산(無名山).

    심협은 혈색이 도는 얼굴에 푸른색 장삼을 입고, 작은 봇짐을 멘 채 정자 안에 서 있었다. 끊임없이 사방을 살피는 것이,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정자 안에는 푸른 이끼가 얼룩덜룩 끼어있는 석제 탁자가 있었는데, 탁자 중심부에는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 크기의 삼각형 철패가 상감되어 있었다.

    거무칙칙한 것이, 정제된 철로 주물 한 듯한 철패에서 어렴풋한 백색광이 발산되고 있어 꽤 신비로워 보였다.

    “자네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심사제인가?”

    심협의 뒤에서 돌연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놀라 급히 뒤돌아섰다. 뒤에 있는 이 도사가 언제 정자에 들어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사는 키가 훤칠하고, 짙은 눈썹에 큰 눈을 하고 있었으며, 웃는 얼굴로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바로 심협입니다. 도장님은…….”

    심협은 공수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바로 나(羅) 사부님의 제자 전철생(田鐵生)일세. 사부님께서 내게 자네를 데려오라 하셨네.”

    청년 도사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우직한 말투로 말했다.

    “전사형이셨군요.”

    심협이 다시 한 번 공수했다.

    “나를 철생이라 불러도 되네. 내 비록 도포를 입고 있으나, 자네와 마찬가지로 정식 도사는 아닐세. 춘추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다 비슷한 상황이지.”

    전철생은 대답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손으로 석제 탁자를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더니, 중심부의 철패가 튀어 올랐다가 전철생의 손안에 안정적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심협은 청년 도사를 따라 정자를 나섰고, 외지고 작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철생 사형, 방금 석제 탁자를 치셨을 때 정말 대단했습니다. 마치 손바닥이 더 커지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것은 무슨 공법입니까? 대단한 것이지요?”

    “허허, 그것은 청양수(靑陽手)로, 외공의 일종이라네. 춘추관 제자들은 대부분 수련해본 것이지. 수련 정도가 심오한 경지에 이르면 칼과 창으로도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고, 금과 옥도 자를 수 있다고 하네.”

    “그리 대단합니까? 사형 말씀을 듣자 하니, 춘추관에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많지는 않네. 내문(內門), 외문(外門)제자를 모두 합쳐봐야 백여 명 밖에 되지 않을 게야. 그 외에 사숙, 사백들도 계시지.”

    “내문, 외문제자요? 그건 무엇입니까? 그럼 저와 같은 기명제자는 내문제자입니까? 아니면 외문제자입니까? 사형은 분명 내문제자시겠지요?”

    “나도 지금은 아직 외문제자일세. 내문제자가 되기는 쉽지 않아. 춘추관을 통틀어 내문제자 정원은 세 명뿐인데, 나는 몇 번이나 간발의 차이로……. 사실 춘추관의 대다수 제자들은 다 외문제자라네. 자네 같은 기명제자도 많지 않지. 지금 춘추관 내에 자네 한 명뿐일 것이야.

    우리 춘추관에 사숙조 한 분이 계속 폐관 중이신데, 듣기로는 이미 몇 백 년을 사셨다고 하네.”

    “한 분…….”

    “심사제, 왜 말이 없어졌나? 나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네와 마음이 잘 맞는 것 같네. 무슨 말이든 자네에겐 다 하고 싶어지니 말일세. 앞으로 우리는 분명 잘 지낼 것 같네.”

    전철생의 걸걸한 목소리가 산속에 메아리쳤다.

    “저…….”

    * * *

    2년 후.

    회백색 큰 바위 위, 20여 세로 보이는 청년이 천천히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마주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있었고, 두 손은 둥근 원처럼 만든 채 미동조차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년의 두 손안에 너무 희미해 잘 보이지 않는 붉은 선이 응집되어 나타났다. 붉은 선은 처음에 1촌(*寸 : 약 3cm 정도)여 정도의 길이로 시작하여, 점점 1촌 반, 2촌, 2촌 반에서 3촌 길이까지 응집되더니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하게 움직여서인지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청년이 돌연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손안에 있는 붉은 선이 붉은 노을로 변화하며 그의 코와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제야 손을 풀고 두 눈을 떴고, 순간 그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붉은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바로 입문한 것이로구나.”

    청년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체내가 훈훈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던 청년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이 청년은 물론 심협이었다.

    짝. 짝.

    “역시 우리 심사제로군. 다른 사람들은 내기에서 모두 자네가 삼 년 안에 소화양공을 입문 단계까지 수련하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 오직 나만이 사제가 성실함으로 수련할 수 있을 것이라 했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군.”

    돌연 바위 뒤에서 얼굴이 훤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파란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정교한 백옥 허리 장식을 차고 있었다.

    청년은 손뼉을 치며 해죽해죽 웃더니 심협에게 말했다.

    “백소천(白霄天) 사형, 어찌 여기 있는 것이오? 또 나를 두고 내기를 한 것이오?”

    파란 도포의 청년을 보자, 심협은 순간 골머리가 아파왔다.

    “내기라고 할 수도 없지. 그까짓 돈 좀 따내는 걸 자네 같은 재력가에게 논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나.”

    백소천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마 손에 들고 다니던 부채를 찾는 듯했다.

    심협은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백소천에게 눈을 부라렸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 해도, 심협 자신조차 모를까? 춘추관 백여 명의 제자들 중 가장 부유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기껏해야 세 번째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는 자신과 거의 동시에 입관한 눈앞의 백소천이었다.

    백소천이 차고 있는 허리 장식만 하더라도, 심협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금 백 냥은 족히 되는 진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심 고까운 일일지라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여 심협은 백소천의 말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왕 내 덕에 돈을 땄으니, 나와 그 돈을 반분(半分)은 못해도 내게 제대로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은 괜찮지 않소?”

    심협은 눈썹을 한번 치켜세우더니, 웃으며 백소천에게 말했다.

    “식사 대접이야 문제 될 것이 없지. 다만 춘추관의 음식은 너무도 입에 맞지 않으니 좋은 음식을 먹자면 하산하여 다녀와야 할 것인데, 산문을 지키는 사형이 워낙 엄해서…….”

    백소천은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하며 말했다.

    “곤란한 척하지 마시오. 얼마 전에도 몰래 하산하여 술을 샀으면서! 어찌 여태껏 하산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걸 한번 본 적이 없었을까?”

    심협이 백소천의 거짓말을 들춰냈다.

    “문을 지키는 우대담(牛大膽) 사형이 워낙에 독종이라, 매번 큰돈을 요구하신다네. 내가 갖고 있는 것의 절반을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돌아올 수 있었겠나? 다행히 내 뒷산에 숨겨진 작은 길을 발견하여, 이제 산문을 지나지 않고도 하산할 수 있다네. 하하, 다음번에 내 자네를 데리고 나가지…….”

    백소천은 발끈했다가, 다시 곧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당신이야 정식 내문제자이니 하산했다가 잡혀도 별일이 아니겠으나, 나 같은 기명제자가 그리했다가는 분명 쫓겨날 것이오.”

    심협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다른 제자들은 도술을 배우고자 왔을지 모르나, 심협은 달랐다. 연명하려고 온 그가 뭐 하러 공연히 일을 만들겠는가?

    “내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이왕 하산할 것이라면, 약방과 지찰점(紙扎店)에 들러 주사(朱砂)와 황지(黃紙)를 좀 구해주시오.”

    심협은 또 무언가 생각났는지, 몇 걸음 따라가 정색하며 말했다.

    “부적을 쓰려는 것인가? 나 사부님이 가르쳐주신 겐가?”

    백소천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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