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302화 (302/305)

303. 용의 제국 (6)

“…관님!”

“정… 차리십….”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져갔다.

“사령관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되었을 때, 사라졌던 전장의 소음이 돌아왔다.

크아아아악!

끔찍한 포효와 비명소리, 사령관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령관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몇 년을 함께 지낸 부관을 못알아볼 정도로 나는 늙지 않았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음성은 자신을 대신해 전장의 지휘를 맡긴부관의 것이었다.

“다행이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부관이 뒤늦게 손을 뻗어왔다.

“일단 자리부터 피해야 합니다!”

“어떻게 된 건가? 나는 아직 죽지 않은 건가?”

비칠거리며 일어난 사령관이 물었다.

“잃어버린 팔은 되돌릴 수 없지만, 사령관님은 분명 살아나셨습니다.”

통증이 사라진 팔뚝의 절단면은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사령관의 질문에 부관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을 쫓아 고개를 돌리니 비록 얼룩덜룩 피로 더럽혀져 있었을지 언정 특유의 순결함을 잃지 않은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음?"

그 모습을 본 사령관은 하나 남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사제?”

새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전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인물은 재앙에 휘말려 사라져버린 사제였다.

“생존자들입니다!”

부관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장벽 안쪽에 갇혀있던 교국의 사제단과 신전 기사들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몽롱했던 사령관의 정신이 번쩍 깨어 났다.

“그들이 어떻게?”

사령관은 그제야 사방에서 번쩍이는 새하얀 갑주와 옷자락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색 빛무리 대신 새하얀 성광을 검날에 그러모은 자들은 분명 교국의 신전 기사들이었다.

“일이 일어나기 직전 이변을 알아차리고 테네시아의 국경을 통해 교국을 탈출하려던 교국의 군대가 재앙 속에서도 살아있었습니다!”

“아….”

사령관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지친 기사들을 대신해 신전 기사들과 성전사들이 마수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체력을 회복한 마법사들의 집중 포화 역시 그들과 함께였다.

“북방의 기병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대륙 제일의 기병들이 말을 내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사나운 기병들에게 쫓겨 마물들과 마수들이 원래의 자리로 도망치고 있었다.

“맙소사. 정말로 이겼군.”

기적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도, 방어선을 지켜낸 것도 모두 기적이었다.

"저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우연히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다.

“눈부신 백광이 저 먼 하늘을 비추더니, 금빛 서기가 여기까지 보일 정도로 흘러나왔습니다. 그 직후 마물들과 마수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누구인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용사와 전승 대공. 아마도 그들이 어둠과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관의 말에 확인이라도 해주듯 머나먼 하늘 저편에서 누렇고 하얀 빛이 솟구치다 사라졌다.

***

아덴버그 제국의 정예가 상당수 잔류했던 남부 방어선과는 달리 모든 방어선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서부와 북부의 방어선들이 뚫려버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곳은 서부 방어선이었다. 북부 방어선은 그나마 통신이 회복되어 어렵사리나마 전황을 확인하였지만, 서부 방어선은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방어선의 병력이 전멸했을 경우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뒤치다꺼리는 영 체질에 안 맞지만, 그래도 밥값은 해야겠지.”

다륜과 휘하의 기병들이 서부의 전황을 확인하고, 혹시라도 방어선을 빠져나온 마물들이 있다면 처리하겠노라며 전장을 떠나갔다.

[북부 방어선은 이미 환수사제 최민영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구원을 위해 출발했다. 사령관은 남부의 병력들을 추스르고 혹시 모를 웨이브에 대비하라.]

발 빠르게 움직인 제국이 그리핀 라이더까지 동원해가며 지원병력을 파견한 덕에 북부 방어선의 문제 또한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끔찍한 재앙을 일으킨 원흉뿐이었다.

“나는 저 안쪽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네.”

끝없이 밀려드는 마수들을 맞아 가장 큰 활약을 펼친 검성이 저 너머의 상황을 확인해봐야겠노라며 떠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전선을 떠나는 검성의 곁에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 함께 있었다.

전장을 빠져나온 마렉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친 그리핀을 재촉하는 손길 역시 거칠기 짝이 없는 것이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 었다.

“이렇게 서둘러도 막상 도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걸세.”

그런 마렉과는 상반되게 동행자의 태도는 너무도 느긋하기만 했다.

“저들이 싸움을 끝마치지 않는 이상 저울추로서 힘을 잃은 자네는 전장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할 테니까."

동행자는 놀랍게도 마렉의 숨겨진 정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대신 나서줄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자네와 다르게 아직 저울추이네만.”

동행자 역시 마렉과 같은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남겨진 전대 대소환의 인물이었으니까.

동행자는 중부의 조율자였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왜 따라온 겐가! 내 복장 터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인가!”

마렉이 버럭 소리를 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중부의 조율자에게 단단히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애당초 자네가 제대로 일을 했다면 내가 이리 부산을 떠는 일도 없었을 것을, 뭘 그리 잘했다고 그리 뻗대기를 뻗대!”

마렉의 분노에도 조율자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 상대가 작정하고 규칙을 무시하면 방법이 없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지껄여대는 태도에 마렉이 더욱 성을냈다.

“그걸 말이라고!”

“세상의 의지조차도 설마 그자가 자신의 신성을 되찾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네. 힘도 다 잃어가는 내가 무슨 재주로 세상도 알아내지 못한 그자의 꿍꿍이를 알아냈겠는가.”

마렉이 세상에 녹아드는 것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중부의 조율자는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 숨어드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온 이백 년의 세월은 중부의 조율자를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마치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건조한 태도는 희로애락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로다!”

화가 난 마렉이 애꿎은 이만 갈아댔다.

“나야말로 자네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미 초월자들이 세상의 전면에 나선 순간 대리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게 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그런 마렉을 보며 조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렉의 조바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자네야 아직까지 세상의 의지를 떠받들고 있으니, 초월자들이나 대리인들이나 죄다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 누가 남든 간에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니야.”

마렉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최소한 나는 초월자들 중 하나만 세상에 남겨질 거라면 그게 용이기를 바라네.”

“그건 자네가 용의 반려와 친분이 있기 때문인가.”

조율자의 질문에 마렉이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내가 이리 용의 반려를 신경 쓰는 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네.”

마렉이 저 멀리서 번쩍거리는 금빛 서기를 바라보았다.

“용의 반려와 용은 적어도 중도를 알고 절제를 아는 자들이지 신성을 위해서라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미치광이와는 다르다는 말일세. 자네도 그걸 알기에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

어느새 마렉의 눈빛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자네도 세상도 악수를 둔 걸세. 차라리 처음부터 용의 반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면, 최소한 저 신성에 도취된 미치광이에게 이리 농락당하고 휘둘리는 일은 없을 테지.”

조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드러났다.

“세상의 의지는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네.”

거부감을 드러내는 조율자를 보며 마렉이 피식 웃었다.

“이미 내가 실패했고, 자네가 실패했어. 세상의 의지라고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야. 그저 세상에 흐르는 수많은 의지 중 가장 크고 거대한 하나일 뿐.”

조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초월자 들의 귀환을 막으려던 세상의 의지가 어긋나 이미 수많은 초월자들이 세상의 전면에 나선 지금에 와서는 마렉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실패를 되돌리고 싶다면 도와주게.”

하지만 마렉은 말문이 막힌 조율자를 더 몰아붙이는 대신 간절한 얼굴로 부탁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단지 내가 용의 반려에게 가까이 갈 수만 있게 해주면 될 뿐이야."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조율자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노력해보겠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리핀이 어느덧 교국의 중심부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두 발로 뛰어야겠군.”

진즉부터 힘겨운 기색이 역력하던 그리핀을 돌려보낸 마렉과 조율자가 한층 더 강렬해진 섬광을 따라 내달렸다.

마물들과 마수들이 그들을 보고 달려들었지만, 중부의 조율자가 일으킨 한 번의 마법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혼돈의 군세를 거스르며 나아간 마렉과 조율자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눈부신 서기에 둘러싸인 백금의 용이 거대한 어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하늘 끝까지 치솟은 빛의 기둥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사내가 있었다. 마렉이 애타게 찾던 용의 반려, 김선혁은 전룡의 태를 뒤집어쓴 채 난동을 부리는 어둠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절묘하군. 딱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야.”

만약 하나의 조각이 더해졌다면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자리에 모인 것은 다섯 개의 조각뿐이었고, 그것만으로는 용과 신의 화신을 압도할 수 없었다.

“거의 끝나가는군.”

교국을 넘어 세상의 안위마저 위협하던 거대한 악과의 싸움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늦겠지. 그렇다고 너무 일찍 끼어들면 그 또한 균형을 깨버릴 걸세. 그래도 지금 나서겠는가?”

조율자의 질문에 마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부탁하네.”

조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바삐 움직이며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퍼져 나와 마렉을 감싸 안았다.

“의지를 갖고 집중하면 자네의 사념을 전할 수 있을 걸세.”

아무래도 조율자는 마렉을 도와 흉험한 전장에 접근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렉으로서는 무슨 방법이 됐든 간에 김선혁에게 말만 전하면 그만이었으니, 불평할 이유는 없었다.

“나일세. 마렉."

정신을 집중한 마렉이 멀리 떨어진 김선혁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제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창 바삐 싸우던 전룡이 주춤하는 것을 보니 마법이 제대로 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싸우면서 내 말을 들어주게.”

정신이 흐트러진 탓인지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던 전룡이 금세 방금처럼 어둠을 몰아쳤다.

“용사를 조심하게.”

마렉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그게 스스로의 의지였건 아니었건 간에 혼돈의 조각을 풀어준 게 바로 용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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