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용의 제국 (5)
처음에는 그저 작고 보잘것없는 반짝임에 불과했던 섬광이 하나씩 쌓여 땅거미 짙게 깔린 지상과 검은 장막을 구분 짓는 빛의 고리가 되었다.
쾅!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미약하던 폭음도 어느새 드높은 창공을 울려대고 있었다.
“아….”
머릿속에 쾅쾅 울려대는 이 소음이 지상에서 쏘아 올린 섬광의 폭음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이 심장이 뛰어대는 소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슴속에 치미는 이 열기를 토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에다!”
뜨거운 불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반려의 이름을 부른 김선혁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열기를 뱉어냈다.
크아아아아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에다 역시 강력한 섬광의 숨결을 토해냈다.
출렁.
장막이 요동을 치며 섬광과 불길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한 번 흩어진 제 몸뚱이를 회복해내지는 못했다.
김선혁과 에다는 계속해서 장막을 두들겨댔다. 불이고 얼음이고 바람이고 닥치는 대로 퍼부어대며 어둠을 찢어발겼다.
갸아아아아아.
장막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전룡과 용의 숨결에 이내 집어삼켜져 그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아아....
장막의 비명소리가 조금씩 잦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거세게 출렁이던 어둠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쩌적.
그 속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저적.
시작은 작은 균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균열은 이내 장막 전체로 퍼져나갔고, 어느 순간이 되자 어둠을 가득 뒤덮었다.
[인간들이 얹은 작은 무게추가 마침내 저울의 균형을 무너트렸구나.]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용제의 음성이 어딘지 모르게 탄성에 가까웠다. 그건 아마도 중요한 순간에 보인 인간들의 놀라운 투지 때문이었으리라.
“인간들은 들러리가 아니니까.”
말이 끝나는 순간 잔뜩 금이 간 장막의 한가운데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줄기 거룩한 빛이 솟구쳤다.
언젠가 보았던 용사 박준민의 성광이었다.
“살아있었구나!”
원정대를 이끌고 장막 너머로 사라졌던 용사의 흔적을 발견한 김선혁이 감격한 얼굴로 하늘까지 닿은 빛의 기둥이 시작되는 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경계가 무너졌다고 하여 장막이 품고 있던 어둠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 저곳은 이미 마계나 다름이 없다.]
중심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장막 안쪽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마수와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시공의 폭풍이 무너지고 죄수들이 풀려난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서둘러 근원을 제거하지 않으면, 경계를 무너트린 것은 오히려 마계의 주민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리라.]
“알고 있어.”
잠시 숨을 가다듬은 김선혁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빛의 고리가 있던 방향과 교국의 중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텨주십시오.”
까마득한 지상에 닿을 리도 없는 한마디를 남긴 그가 혼돈이 있을 마계의 중심으로 향했다.
***
장막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수도 없는 마물들과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사라진 경계 탓에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마수들이 뒤늦게 인간들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전 병력! 웨이브에 대비하라!”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마수들을 본 사령관이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아까는 병사들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이번에야말로 우리 기사단이 가장 먼저 저들을 맞이할 것이다!”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고는 검을 잡아 쥐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사력을 다해 장막을 공격해댄 탓에 기사들은 너무도 지쳐있었고, 그들의 검 끝에 매달린 섬광은 전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미약한 섬광이 서린 검을 들고 병사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시간을 끌 테니, 그동안 체력을 회복하시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국적도 소속도 상관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기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마법사들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겠노라 말했다.
무리한 마법력의 사용으로 창백하게 질린 마법사들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회복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전장이었지만 기사들이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그들 역시 마법력을 회복하는 데 모든 것을 건 것이다.
“부관. 나 대신 지휘를 부탁하네. 웨이브라면 수십수백 번은 겪어보았으니, 어려운 부탁은 아닐 거라 믿네.”
사령관이 젊은 부관에게 전장의 지휘를 맡기고는 기사들의 곁에 섰다.
“너무도 오래 손을 놓아 죄 녹슬었겠지만 그런 비루한 검이라도 한 팔 거들겠소.”
기사들이 지친 가운데에도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미약한 검광을 그러모은 사령관의 말에 기사들이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거 오랜만에 앞에 서니 좀 긴장되는군.”
“피가 덥혀지고 나면 긴장도 사라질 거요.”
마지막을 각오한 탓인지 기사들의 대꾸는 격의가 없었다.
“여기서 더 뜨거워지면 싸우기도 전에 타죽을 걸세.”
사령관이 기사들과 대화를 하며 오랜만에 잡은 검의 무게를 극복하는 사이 대열의 이곳저곳에서 지휘관들이 튀어나왔다. 한때 기사를 꿈꿔왔기에 견습 기사로서의 검력이나마 지닌 자들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진짜 기사들하고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기회가 있겠습니까.”
“마음껏 누리시게. 그대 말대로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일 테니.”
그렇게 기사들이 전투 준비를 하는 사이에 마수들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전 기사단! 충격에 대비!”
순식간에 코앞까지 치켜든 마수들을 보며 기사들이 방패를 세우고 검을 움켜잡았다.
크아아아아아!
“으아아아!"
끔찍한 포효와 고함이 뒤섞이는 순간, 마수들이 기사들의 대열을 덮쳐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수십의 마수들이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온몸이 난도질 당해 절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배는 많은 수의 기사들이 마수들의 돌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난전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마들을 상대해온 기사들은 비록 지친 상태였을지언정 쉽게 뚫리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었기에 마수들의 포악함을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사들의 검 끝에 매달린 광채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개중에 경지가 낮은 몇몇 기사들은 검력이 고갈되어 박히지도 않는 검을 휘두르다 마수들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전장에는 오로지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장보병대! 발 내질러!"
“하!”
무장만큼은 기사들에 못지않은 중장 보병들이 사납게 발을 구르며 전용의 가시 방패를 밀어 올렸다.
“궁병대 일제사격!”
그리고 그 위로 수천 발의 화살이 높게 떠올랐다 떨어져 내렸다.
“투석기 발사!”
“돌격!”
투석기가 굉음을 내며 거석을 내던지고, 중장기병들과 경기병들이 달려오던 힘을 실어 마수의 몸에 창을 박아 넣었다.
대열을 갖추고 뭉치지 않고서는 마수들을 상대할 수 없기에 뒤로 물러나 있던 보병들과 기병들이 마침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참가만으로 전황이 단번에 뒤집히지는 않았다. 병사들의 창과 칼에는 기사들의 그것과 같은 파괴적인 위력이 없었고, 마수들의 가죽은 평범한 창칼이 꿰뚫기에는 너무도 질겼다.
하지만 전장에는 마수보다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마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방어선의 병사들은 평범한 칼과 창으로도 어지간한 마물들은 상대할 정도로 단련이 된 정예병들이었다.
“항상 막아왔던 웨이브다! 오늘이라고 다를 게 무언가!”
“창! 밀어!”
보병 중대장들의 지시에 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기사들의 측면을 노리고 이동하던 마물들이 창병들의 창에 꿰뚫리고 난도질당해 쓰러졌다.
마물들의 진로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한 창병들이 내질렀던 창을 미처 회수하기도 전에 마수 한 놈이 창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마에 돋아난 날카로운 뿔 끝에 기사 하나를 마치 트로피처럼 내건 짐승형 마수였다.
“끄악!"
마수의 난입에 창병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사방으로 육편이 튀어 오르고 피가 흩뿌려졌다. 수많은 전투 경험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창병들은 순식간에 마수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턱.
그때 마수의 뿔에 꿰뚫려 허우적거리고 있던 기사가 마수의 쁠을 꽉 움켜잡았다. 마수는 다 죽어가는 기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손쉬운 먹잇감을 학살하는 데 심취했다.
“이익.”
마수가 한창 인간을 죽이는 데 재미가 들려 있는 사이 뿔을 끌어당긴 기사가 마침내 거대한 머리통에 손이 닿을 만큼 다가섰다. 그 대가로 복부에 입은 관통상이 더 심각해졌지만,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들어 올렸다.
꺼져가는 생명을 담보로 한 마지막 검광이 마수의 눈을 베어냈다.
끄아!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순간적으로 창병들의 피해가 증가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뒤로 물러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부상자 빠지고 다시 창 잡아!”
잠시 그 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던 마수가 방향을 잃고 뛰어가다 다른 마수들에게 짓밟혀 죽는 것을 본 보병 중대장이 병사들을 수습하고 다시금 전투에 뛰어들었다.
***
"으으…."
최초의 충돌로 정신을 잃었던 사령관이 뒤늦게 의식을 되찾았다.
“아…?”
진창이 되어버린 바닥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던 사령관은 자신의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른하다.
도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온 정신이 꿈을 꾸듯 몽롱하기만했다.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시도하던 사령관은 결국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애써 움직여 전장을 살펴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제국의 상급기사 하나가 마수의 정수리로 뛰어올라 검을 박아 넣는 것이 보였다.
마수가 쓰러지고 또 다른 마수가 나타나 마수의 시체에 깔려 버둥거리는 상급 기사의 머리통을 물어뜯었다. 그 마수마저도 기사들의 맹공에 쓰러지고, 다시 새로운 마수가 나타나 기사들과 드잡이질을 했다.
한참을 기사들의 전투를 바라보던 사령관은 뒤늦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마수들의 돌격에 휘말렸을 때 고막이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잘 싸우고 있군.
사령관이 미소를 지었다. 힘겹지만 마수들의 파도를 잘도 막아내는 연합군 병력이 너무도 대견했다.
이대로라면 뒤를 걱정하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고, 썩 괜찮은 죽음이었다. 고통도 없으니 그 또한 복이라면 또 복이었다.
눈앞이 조금씩 흐릿해져갔다 아마도 이 희뿌연 세상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죽음이 찾아오리라.
그때 뿌옇게 바랜 시야 너머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도통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난 좀 쉬겠네.
흐릿한 형체나마 자신을 부여잡고 어딘가에 손짓을 하는 상대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은 죽을 테니까.
팟.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시야 너머로 새하얀 빛이 번뜩이더니, 온기가 닿았다. 감각마저 사라져버린 와중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온기였다.
스멀스멀.
온기에 닿은 어딘가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건 금세 끔찍한 통증이 되었다.
“끄아아악!”
마치 사라졌던 통증이 한꺼번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한 기분, 사령관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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