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용의 제국 ⑷
실제로 마주한 장벽은 영상 기록구의 영상으로 보아왔던 것보다 몇십 배는 끔찍했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파내 그 안에 온갖 불길하고 부정한 것들을 채워 넣는다면 저러할까. 하늘에 닿을 듯 솟아난 장벽은 마치 악의와 증오로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았건만, 장벽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혼돈의 기운에 벌써부터 전롱의 폭급함이 깨어나려고 했다.
근원에 맞닿은 적의와 증오가 장벽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라고 끊임없이 충동질했고, 김선혁의 눈은 금세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는 그 거센 감정의 파도에 저항하는 대신 순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에다.”
[기다리고 있었노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다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장벽이 닿지 못한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장벽은 벽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였다. 마치 검은 뚜껑이라도 덮어놓은 듯 온통 새까만 어둠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저주받을 혼돈의 조각은 필시 저 중심에 있으리라!]
거대한 어둠의 한가운데를 겨냥한 에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금빛 섬광을 토해냈다. 강력한 용의 숨결이 어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태양과도 같은 섬광에 직격당한 어둠이 통째로 녹아내렸다. 마치 봄 햇살에 겨우내 남아있던 눈이 녹아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물어진 어둠은 장막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어둠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강대한 용의 숨결마저도 장막을 완전히 꿰뚫는데 실패한 것이다.
[넷, 어쩌면 다섯, 혼돈의 본신을 이루는 열 개의 조각 중 최소한 절반이 하나가 되었구나!]
에다가 분노를 다 토해내기도 전에 일그러졌던 장막이 처음의 형태를 되찾았다.
“그럼 저 안에 다섯 명의 마왕이 있다는 건가.”
서부를 몰락시킨 마왕 박상진조차도 고작 하나의 조각을 품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존재를 탄생시킨 혼돈의 조각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나 있단다. 그 말은 최소한 서부를 다섯 번은 멸망시키고도 남을 끔찍한 악의가 저 장막 안쪽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혼돈의 조각이 합쳐진다는 것은 단지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나가 더해지면 셋의 마왕과 비등하다 할 만하고, 둘이 더해지면 아홉의 마왕과 비견할 만하다. 셋이 더해지면 서른의 마왕보다 강하니, 다섯 개의 조각이라면 능히 일백의 마왕보다 강하다 여겨도 무방하다.]
에다의 말에 들끓던 분노조차 순간적으로 차게 식었다.
“그럼 하나가 더 모이면….”
[최소한 삼백의 마왕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과 다름없게 되리라.]
“맙소사….”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말았다. 불모의 대지가 되어버린 서부에는 자신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혼돈의 조각이 남아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마저 이곳에 모여든 혼돈과 합쳐진다면 그때는 진짜 지옥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보다 근원에 가까운 조각에 이끌려 다른 조각들이 모여들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에다는 다른 조각들이 언제 합쳐져도 이상하지 않다 말했다. 에다와 만난 뒤로 치열함을 잃은 김선혁의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당장 저 장막을 박살내야 해.”
형벌을 벗은 골드레이크와 블루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벽을 허물어트리고 그 너머에 있을 혼돈의 조각을 소멸시켜야 했다.
[나 또한 그대와 뜻이 다르지 않노라.]
에다가 숨을 들이마시자 사방에서 빛이 모여들더니, 금세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에다는 그렇게 모여든 빛을 내뱉지 않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숨을 들이마셨다.
온 세상의 공기를 모조리 들이마실 것 같은 기세였다.
빛이 뭉치고 또 뭉쳐들었고, 에다는 턱을 꽉 다물고는 빛의 덩어리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태양을 반쯤 삼킨 듯한 모습이었다.
그르르르르.
마침내 빛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에다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에다의 포효가 온 천지를 울리는 순간, 작열하는 태양이 지상에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섬광이 장막을 휩쓸었다. 마치 아침에 쫓겨 밀려나는 밤처럼 어둠으로 빚어진 장막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교국을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은 그 강력한 숨결마저 이겨낼 정도로 거대했고, 또 끈질겼다.
고오오오.
어둠은 흩어진 제 몸의 일부를 끊임없이 재생시켰다.
[반려여!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알아! 나도!”
온 세상을 밝힐 듯 찬란하던 태양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본 김선혁이 전통의 태를 뒤집어쓰고 화염을 토해냈다.
[울부짖어라!]
똑바로 내쏘아지던 화염에 바람이 더해지자,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의 폭풍이 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강력한 화염폭풍이 장막의 일부를 집어삼켰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어둠을 계속해서 불태웠다.
“제길!”
김선혁은 본능적으로 저것만으로는 교국을 둘러싼 장막을 완전히 허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으으읍.
용의 입으로 또 한 번 섬광이 모여들고, 전룡이 불의 숨결을 토해냈다.
하지만 용이 토해낸 금빛 찬란한 섬광도, 전룡이 내뱉은 열화의 숨결도 장막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장막은 빛에 녹아내리고 화염에 활활 타오르면서도 끊임없이 제 몸을 복구해냈다.
“더! 더! 더!”
김선혁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이끌어냈다. 골드레이크에게 받은 땅의 힘, 블루곤과 이어진 물의 힘, 레드번의 독과 블랙웜의 흑염까지 모조리 쏟아 부었다.
에다 역시 몇 번이나 숨결을 토해내며 어둠을 공격했다.
갸아아아아아!
장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더니, 오물을 내뱉듯 수백의 마수들을 토해냈다. 하나같이 기세가 심상치 않은 비행 마수들이었다.
[저곳은 이미 마계와 다름없이 되었으니 우리가 허물어야 할 것은 그저 혼돈의 껍데기가 아닌, 세상의 경계 그 자체이니라!]
“제길! 어쩐지 더럽게 오래 버틴다 했어!”
아귀처럼 달려들던 마수들이 에다의 숨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것을 바라보며 김선혁이 다시 한 번 턱 끝에 화염을 그러모아 내뱉었다.
“좀 없어져라!”
하지만 교국을 덮은 어둠은 없어 질 듯 없어질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텨 냈다.
“에다! 다른 방법 없어? 너 용이잖아!”
답답한 마음에 에다를 채근했더니, 에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가두었던 시공의 폭풍과는 비할 수 없다 하나 엄연히 세상의 경계를 구분 짓는 장막이다. 그런 세상의 경계를 쉽게 걷어낼 수 있었다면 나 또한 천 년씩이나 경계밖에 머물지는 않았으리라.]
결국은 장막이 허물어질 때까지 공격을 퍼부어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제길! 이러다가는 혼돈의 조각과 만나기도 전에 지치겠어!”
말을 하는 순간에도 김선혁은 쉬지 않고 장막을 공격하고 있었고, 그런 사정은 에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막이 무너지고 일그러진다. 그리고 다시 재생된다.
장막이 허물어지는 속도와 재생되는 속도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균형을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장막을 허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조금의 차이를 벌리는게 영 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하루를 더 싸운다고 해도 답이 나올것 같지 않았다.
“어?”
한참을 장막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대던 김선혁이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통.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깔린 까마득한 지상, 저 남쪽에서 작은 빛이 번쩍였다.
통, 통.
또다시 섬광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서쪽으로 더 치우친 곳 이었다.
통, 통, 통.
처음에는 그저 간헐적으로 번쩍이던 섬광들이 조금씩 늘어나다 어느 순간이 되자 온 사방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저건….”
[인간들이구나.]
용과 용기사가 일으킨 이적에 비하면 너무도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빛, 그건 지상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쏘아올린 마법이었다.
***
“쉬지 말고 쏴라!”
제국의 사령관은 목이 쉬어라 고함을 쳐대며 저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까맣게 밤이 내려앉은 하늘 저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사령관은 알고 있었다. 저 어딘가에 분명 전승 대공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하늘에서 금빛 섬광이 떨어져 내렸을 때까지만 해도 방어선에 있는 어느 누구도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 빛이 장막을 두들겨대는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승 대공이 장막을 뚫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다.”
그때 검성이 나서서 저 찬란한 빛이 누구에게서 기인한 것인지 알려주었다.
"대공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 드높은 창공에서 저리 찬란한 빛을 뿌려댈 수 있겠는가.”
검성의 말은 마법 전문을 통해 온 방어선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연합군은 초인이고 병사고 할 것없이 손을 모아 저 상서로운 섬광이 장막을 물리쳐주기를 바랐다.
“언제까지 대공이 혼자 싸우게 둘 것인가!”
그때 다시 검성이 연합군을 일깨웠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도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는데.”
이미 몇 번이나 장막을 공격해보았지만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혼자 싸우게 둘 것인가! 제국 마법사단의 이름이 울고 기사단의 이름이 운다!”
검성은 패배감에 절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들은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언제 웨이브가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힘을 낭비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툭.
그때 연합군의 보병 하나가 바닥에서 돌을 주워 장벽을 향해 던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병사들뒤따라 돌을 던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쐬에에엑.
아무런 명령도 없었건만 궁병들이 장벽을 향해 활을 쏴댔다. 창병들이 단창을 꼬나 잡고 도움닫기를 하더니 힘차게 창을 내던졌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쏘아올린 화살과 단창은 장막에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던 초인들의 가슴에 불씨를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그간 전장을 경험하며 조금은 나아진 줄 알았더니, 자네들은 여전히 온실 속의 화초구만. 저 평범한 병사들만도 못해.”
혀를 한 번 찬 검성이 병사들 옆에 서더니 검을 꼬나 잡았다. 금세 검날 가득 검광을 불러일으킨 검성은 한 점 망설임도 없이 장막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썩어도 준치라고 조율자로서 지닌 대부분의 힘을 잃고 레벨마저 다운된 검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격이 어설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막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검성의 공격을 받아냈고, 검끝에 매달린 섬광은 어둠과 닿기가 무섭게 꺼져버리고 말았다.
“징글징글한 놈이구나.”
공격이 실패했지만, 검성은 포기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검날에 검광을 그러모아 장막을 향해 휘둘러댔다.
"단장님, 저희는 어떻게….”
지켜보고 있던 기사 하나가 단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어떻게 해!”
단장이 버럭 소리를 치니 기사가 찔끔 놀라 물러났다.
“죄, 죄송….”
“저 병사들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 싫으면 이제부터라도 한손 거들어야지.”
그렇게 말한 단장이 검광을 피워올리고는 검성의 곁에 섰다.
“전 기사단! 장막을 공격하라!”
기사단장의 말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 장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러서시오!”
그런데 그들이 검광을 그러모은 검을 채 다 휘두르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소리쳤다.
“그대들이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소. 그대들은 마수를 상대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웨이브에 대비하시오.”
기사단장의 말에 마법사가 버럭소리 쳤다.
“그게 아니라 휘말려 든다는 말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꽃과 얼음, 벼락이 장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 병력, 지금부터 장막을 향해 총력을 다해 공격하라.]
그리고 제국 본토에서 날아든 마법 전문이 연합군의 모든 방어 거점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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