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99화 (299/305)

300. 용의 제국 (3)

전승 대공이 다녀간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전역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황도로 날아들던 변경 영주들의 지원 요청이 뚝 끊겼고, 습격당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각 영주들이 병사를 보내 근방을 살살이 뒤져보았지만, 몬스터들은 단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국을 어지럽히던 고대의 몬스터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물론 몬스터들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풀어 흔적을 쫓은 결과 제국 내의 모든 몬스터들이 제국의 국경 밖으로 이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몬스터들은 마치 무언가에 내쫓기기라도 한 것처럼 제국 밖으로 도망졌고, 그 바람에 제국과 국경을 맞댄 왕국들이 더욱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황도에 도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기존의 몬스터들만 해도 해결하기 힘든 골칫거리인데, 거기에 새로 운대형 몬스터들이 나타나 더욱 난동을 부려대니 날마다 제국 밖에서는 군대가 출동하지 않는 날이 없다는 소문이 들려올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녹테인 같은 곳은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제국에서 빠져나간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향한 곳이 녹테인의 영토였던 탓이었다.

“모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왕도 인근의 몬스터들을 섬멸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이 이상 몬스터들의 난동을 두고 보았다간 나라의 근간이 휘청일 판국이었던지라, 녹테인도 더는 초인들을 아껴둘 수만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왕국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개중에 그리핀도르는 녹테인보다 상황이 심각하면 심각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남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베히모스, 북상 중입니다! 이대로라면 왕도 역시 베히모스의 이동경로에 포함되고 맙니다!"

천 년 전에도 재앙이라 일컬어지던 끔찍한 대괴수 베헤모스가 그리핀도르의 남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왕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막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라! 베헤모스가 왕도에 접근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급기야 그리핀도르의 군주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과 초인들을 집결시켜 베헤모스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저희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무렵 그리핀도르의 마법사들은 대괴수에 대한 과거의 기록을 뒤져보았고, 그 안에서 일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집어삼킨 괴수에 대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초인들이 한 자리에 집결한다 해도 이 끔찍한 괴수를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몇몇 귀족들이 왕도를 버리고 베헤모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다시 돌아올 것을 간언했지만, 그리핀도르의 군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대에서 그런 치욕을 남길 수는 없다.”

허영심 강한 군주는 자신의 이름이 그리핀도르의 역사에 오점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고, 끝까지 베헤모스와의 결전을 주장했다.

결국 남은 것은 괴수가 왕도에 도달하기 전 어떻게든 괴수의 이동방향을 틀어 왕국의 영역 밖으로 유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국의 지고한 군주가 저리 고집을 피우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만약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귀국에 나타난 괴수를 처리해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덴버그 제국에서 날아든 한 통의 마법 전문은 어둠 속의 빛과도 같았다.

“저 고대의 악몽과도 같은 괴수를 처리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든 지불하겠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려온 구명줄, 그리핀도르의 군주는 덜컥 줄을 움켜잡았다.

[대가에 논의는 추후 하도록 하되, 또다시 신의를 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그리핀도르는 이미 한 번 녹테인과의 전쟁에서 동맹을 깨고 창공의 기사들로 하여금 전승 대공을 공격하는 만행을 저지른 전적이 있었다.

급한 상황을 모면하고 나면 어떻게든 대가를 후려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대고도 남을 그리핀도르였다.

“저 괴수만 처리한다면 왕실의 곳간이 텅 빈들 아까우랴!”

[만약 괴수가 처리된 후에 태도를 달리한다면 귀국은 괴수의 출현 이상으로 끔찍한 재앙을 맞게 되리라.]

거듭된 경고에 그리핀도르의 군주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제국과 그리핀도르의 사이에는 녹테인이라는 장벽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제국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그리핀도르의 국경을 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제국이 경고한 괴수 이상의 재앙은 강력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리핀도르의 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베헤모스의 저지를 위해 형성한 1차 저지선의 병력이 막 괴수와 전투를 시작하고 난 후였다.

“기사들은 다리를 노리고, 마법사들은 놈의 움직임을 둔화시켜라! 명심하라!”

저지선의 지휘를 맡은 창공의 기사들은 강대한 괴수를 감히 물리치는 것보다는 이동속도를 늦추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검광으로 베어내기에는 괴수의 다리가죽이 지나치게 두터웠다. 마법사들의 강력한 집중 포화도 강대한 괴수의 걸음을 잠시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괴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게 강력한 초인이든 거대한 성벽이든 모조리 짓밟고 박살을 냈다.

“소용없어! 통하지 않는다고!”

“피, 피해! 밟힌다!”

곳곳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다니….”

하늘 높은 곳에서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리핀도르의 군주와 창공의 기사들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괴수가 워낙에 거대했던 탓에 지상의 병력들은 괴수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핀에 올라탄 왕과 기사들은 달랐다.

창공에서 바라보는 괴수의 진면목은 감히 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괴수는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의 맹공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귀찮은 기색뿐이었다. 심지어 제 머리통에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떨어졌을 때조차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왕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은 저 끔찍한 괴수에게 있어 개미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개미들은 아무리 모여도 결국은 개미에 불과했다. 저 끔찍한 괴수를 막아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악! 살려줘!”

“마법사들을 피신시켜! 놈이 달려든다!”

전의를 상실한 초인들을 본 왕의 머릿속으로 그리핀도르의 멸망이 떠올랐다.

“제국이고 뭐고 인간이 저걸 막는 건 불가능하다….”

군주의 말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베헤모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만이 존재하는게 아니었다. 제국에서 보내온 지원군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도 유달리 선명하게 귀를 파고드는 한 줄기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움찔.

그 순간 수백 번의 마법 포화와 수만 번의 칼질에도 단 한 번도 내딛던 발을 멈추지 않았던 괴수가 처음으로 멈춰 섰다.

끄우우우우.

괴수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기괴한 소리로 내뱉으며, 짧은 목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쐬에에에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백금의 창이 내리꽂혔다.

꾸에에에에에!

벼락처럼 내리꽂힌 무언가에 직격당한 괴수가 비명을 지르더니 희끗한 물체와 한 데 엉켜 들었다.

“그리핀도르의 왕이요?”

상황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헛."

깜짝 놀란 왕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기형적으로 거대한 와이번에 올라탄 사내가 있었다.

“그대는!”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차림새와 비룡, 왕은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창공의 붉은 악마!”

사내는 놀랍게도 아덴버그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드라흔이었다.

“꽤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살짝 눈살을 찌푸린 드라흔이 왕에게 말했다.

“호칭이야 어찌 됐건, 병력을 물리시오.”

군주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위엄, 왕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귀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서두르시오. 지금부터 그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질 테니까.”

드라흔 역시 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짧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비룡을 몰아 괴수에게 날아갔다.

“아….”

그제야 괴수를 공격한 무언가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한 왕이 넋을 잃었다.

마치 인세의 존재가 아닌 듯 아름다운 백금빛 비늘의 비룡 한 마리가 거대한 괴수를 사납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아래로 괴수가 힘겹게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의 검광과 마법에도 굳건했던 거체는 이미 선혈이 낭자했고, 두터운 다리 하나는 보기 흉하게 꺾인 채였다.

‘만약 괴수가 처리된 후에 태도를 달리한다면 귀국은 괴수의 출현이상으로 끔찍한 재앙을 맞게 되리라.’

강대한 괴수를 상대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는 생명체를 본 왕은 그제야 제국이 경고했던 재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제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날개 달린 재앙이 그리핀도르의 왕도에 찾아오게 될 테니까.

“병력을 물려라!”

병력이 완전히 물러나자, 괴수를 짓밟았던 백금빛 비늘의 생명체는 상처 입은 괴수를 남겨두고 하늘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금빛 섬광과 함께 땅에서 솟아난 기괴한 생명체였다.

“전승 대공의 드레이크입니다!”

몇 번이나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던 전승 대공의 기형 드레이크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괴수에 비해 꿇리지 않는 덩치와 그 위용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

기형 드레이크가 포효하며 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베헤모스 역시 지지 않고 포효하며 드레이크를 향해 돌진했다.

그렇게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수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시종일관 드레이크를 압도한 쪽은 베헤모스였지만 결국 패배한 쪽은 베헤모스였다.

쾅.

굉음과 함께 대지에 누운 괴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생기 잃은 거체를 짓밟은 드레이크가 오래도록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 찬란한 섬광이 피투성이가 된 드레이크를 감싸 안더니, 이내 그 거대한 몸이 땅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베헤모스의 시체도 함께였다.

남은 것은 오직 온통 파이고 헤집어진 대지와 거대한 구덩이를 가득 채운 피뿐이었다.

“계산은 나중에 제국의 황제 폐하와 하시오.”

전승 대공 역시 드레이크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한마디를 남겨놓고는 와이번과 함께 구름 위로 사라졌다. 창공에서 전투를 내려다보던 백금빛 비늘을 한 존재 역시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게 대체….”

마치 꿈이라도 꾼 듯 멍한 얼굴로 왕이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호수처럼 피가 가득 고인 구덩이와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지고 깨어진 대지는 조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전투가 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낙에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탓에 도통 현실감이 돌아오지 않았다.

“폐하! 피해를 수습하고 물러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만약 곁에 있던 창공의 기사들중 하나가 전장의 수습을 권하지 않았다면 왕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멍하니 있었을 것이다.

“부상당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치료하라.”

왕의 명령에 살아남은 초인들과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승 대공 대륙 남부에 나타난 싸이클롭스 격퇴.]

[이베리아 연안의 크라켄, 전승대공과 격전 끝에 사멸.]

[아스라엘 왕국을 초토화시켰던 썬더버드의 시체 발견.]

충격을 채 털어내기도 전에 곳곳에서 전승 대공에 의해 격퇴된 끔찍한 괴수들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핀도르 군주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제국에 대한 반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복종심뿐이었다.

[전승 대공 장벽 방어선 남부 기지에 도착!]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핀도르를 스쳐간 전승 대공이 교국에 도착했다는 전문이 날아들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