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용의 제국 (2)
황도의 인물들이 광명정대한 기운을 지닌 용이 해악을 끼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호대라는 이름이 운다. 이 겁쟁이들아.”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강대한 용 앞에서 몸이 굳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기사들의 자괴감은 상당했다. 수호대의 기사들을 질책하는 레인하르트 후작마저도 당장 자괴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댈 지경이었다.
“오늘 이후로 근무자 외의 기사들은 전원 특별 수련에 들어간다. 휴가도 비번도 열외도 없다.”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의 경험을 뼈에 새겨 다시는 자신들의 검이 꺾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각오를 불태웠다.
“호오. 벽화랑은 조금 다르군.”
“하지만 비슷해.”
오로지 마법사들만이 조금 전에 자신들이 느꼈던 공포 따위는 홀랑 잊어먹은 모습으로 에다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감히….]
물론 에다는 그들의 시선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고, 살며시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마법사들을 떨구어 냈다.
연구를 위해서라면 제 몸에 독을 투여하고, 화염에 뛰어드는 마법사들마저도 시선 한 번으로 쫓아내는 용의 위엄(?)을 본 오필리아가 감탄을 토해냈다.
“저게 바로 대공이 말했던 용이요?”
“쉿. 그녀는 인간 이상으로 현명하고 자존심이 강한 존재예요. 함부로 저것이니 뭐니 하면 화를 낼지도 몰라요.”
김선혁은 에다가 그저 덩치만 큰 괴수가 아니라며 오필리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당부보다는 엉뚱한 것에 주목을 했다.
“그녀?”
방금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던 오필리아의 표정에 어느새 냉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용족의 여왕이에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김선혁은 곧이곧대로 고백하고 말았다.
“용족의 여왕이라….”
다행스럽게도 오필리아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냉기가 도는 표정만큼은 여전했으니, 그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그녀가 그대가 말한 세속의 반려인가.]
갑작스레 머릿속을 파고든 에다의 사념에 익숙해질 때가 되었음에도 그가 불현듯 소스라친 것은 유달리 ‘세속’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 그 어투가 평소와 달랐던 탓이었다.
“어. 너랑은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저도 모르게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으니, 에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당황할 것 없노라. 애당초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지니, 잠시 눈을 감았다 뜰 동안 이미 세속의 것은 덧없어지리라.]
에다는 아주 잠시라면 인간의 군주가 참람하게 누릴 반려의 호칭을 참아줄 인내심이 있노라 말했다.
하지만 에다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필리아가 그와 함께 나눌 시간은 결코 찰나가 아니었다.
김선혁은 오필리아가 단명의 저주를 벗기를 원했고, 그래서 귀하디귀한 정령왕의 유산 천년화를 입수해둔 바가 있었다.
그리고 천년화의 효능은 단순히 단명의 저주를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니,
“이제 여제께서는 요정과 같은 시간을 누리게 되었나이다.”
어머니 나무의 가호로 장수의 축복을 누리게 된 퀘이샤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정령왕의 가호가 전해졌다.
[이 또한 그대가 의도한 것인가.]
지고한 용제로서 잠시나마 반려를 공유하는 수모를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던 에다가 노기를 드러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선혁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마침내 단명의 저주를 벗고 완전히 개화한 아데스덴의 재능에 감격해 하는 오필리아에게 축하의 말을 제대로 건네기도 전에 그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요정이구나. 그대가 나에게 이르는 걸음이 더디다 했더니, 참으로 바쁘기도 하였구나.]
의식에 참가한 나지마를 본 에다가 또 다른 반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억울해. 이건 또 다른 문제라고."
김선혁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스스로의 의지와 감정이 많이 반영된 오필리아의 경우와는 달리 나지마의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맺은 경우였다.
그마저도 께름칙한 면이 있었던지라 거의 교류를 끊고 살았던 그로서는 용제의 분노가 억울하기만했다.
“용이시여. 제가 그분께 영혼을 나누어드린 것은 사실이나, 감히 그분의 영혼을 조각이나마 나누어 받을 정도로 몰염치하지는 않나이다. 그러니 분노를 푸소서.”
단순히 억울할 뿐이었던 그와는 달리 나지마는 에다의 분노에 몸을 벌벌 떨어댔다. 혹시라도 화가 난 용이 간신히 자리를 잡은 일족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대가 지금의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노라.]
다행스럽게도 에다는 더 이상 나지마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고한 용제로서 나약한 요정을 핍박하는 모양새 자체가 썩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끼어들 각오까지 하고 있던 김선혁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반려의 맹약은 서로의 영혼을 나누고 근원을 공유하는 것이니라.
그대가 반려의 호칭을 사사로이 남발한다면, 끝내는 나의 영혼과 권능마저 잘게 찢겨질 것이니 절대로 나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
물론 그 의미는 달랐지만, 그는 용의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축첩은 불가한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천년화를 흡수한 오필리아는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돌았고, 재기가 넘쳤다. 그녀는 그간 단명의 저주로 인해 스스로 억눌러야 했던 아데스덴의 피에 쌓여온 재능을 개발하고 꽃피우는 데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
그녀는 훌륭한 군주가 되었고, 마법사가 되었고 기사가 되었다. 물론 그 어떤 재능도 제국을 세운 군주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한 명의 인간이 이토록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빅터가 누렸어야 할 영광인 것을…."
오필리아는 스스로의 성취에 기뻐하기보다는 아직 단명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가 본디 지니고 있던 단명의 저주는 그대의 후손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그대에게 이어진 용의 피가 후손에게도 전해진 탓이니라.]
아비가 지닌 용혈기사의 넘치는 생명력이 아이에게 이어져 아데스덴의 피에 각인된 저주를 희석시키고 만 것이다.
오필리아는 전에 없이 기쁜 감정을 드러냈다. 제국의 군주로서 늘상 잃지 않았던 체통조차도 내려놓고 순수하게 어미로서 아이가 저주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기삐하였다.
“오필리아.”
김선혁의 나직한 음성에 환하게 웃던 오필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하아.”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돌처럼 굳어버린 아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턱 끝까지 솟아오른 말이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시일을 지체할수는 없었다.
당장 동부에서는 베헤모스의 난동으로 그리핀도르의 전역이 초토화되고 있었고, 대륙 전체에 걸쳐 일어난 고대 몬스터들의 부활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동부를 넘어 중부와 서부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서부에서 마왕의 발호 조짐 발견.]
목숨 걸고 겨우 퇴치했던 마왕이 다시 발호할 기미가 관측되었다. 혼돈의 파편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장벽의 웨이브 발생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중.]
교국에 나타난 혼돈의 파편들을 제거하겠다며 용사와 원정대가 장벽 너머로 들어선 지도 한참, 갑작스레 장벽에서 마수와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장벽 안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부에서 푸른 털의 거대 늑대 출몰.]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대륙북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징조가 일어났다. 거대한 푸른 늑대가 출몰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이내 다륜을 따라 나서지 않았던 북방의 유목민들이 하나로 뭉쳐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노라.]
푸른 늑대의 출몰에 대한 소식을 들은 에다가 다소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신성에 취한 광대가 꼭두각시 춤을 추니, 북쪽 황무지를 지배하던 난폭한 늑대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곳곳에서 어둠과 빛, 그 중간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 돌아와 활보하게 될 것이다.]
혼돈과의 전쟁을 끝으로 경계 밖으로 밀려났던 초월적인 존재들이 하나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으리라.]
혼돈의 파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다.
이제 대륙은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들이 각자의 신성과 이득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제국이 단단히 자리를 잡으려면 더 늦기 전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가시오.”
김선혁의 표정을 본 오필리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가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시오.”
어느새 덤덤한 표정이 된 그녀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제국을 더욱 영광되이 만들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소.”
그래도 그가 발을 떼지 않자 오필리아가 다시 한 번 등을 떠밀었다.
“또한 그대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나와 빅터의, 제국의 적이 앞으로 감히 제국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못하게 될 것임을 믿소.”
그녀는 나아가서 자신과 빅터를 위해 싸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보일게요.”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그가 마침내 결심을 했는지 대꾸했다.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날아올게요. 그러니 부디 무탈하게 있어요.”
“가서 모든 것을 이루고 돌아오시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라던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바라겠소.”
제국의 여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범한 여인보다는 군주로서 남편을 배웅하려 했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시오.”
하지만 끝까지 감정을 참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끝내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늦지 않을게요.”
몇 번이나 어겨버린 약속, 하지만 김선혁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며 몇 번이나 다짐해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김선혁은 해가 뜨기도 전에 에다와 함께 황도를 떠나갔다.
첫 목표는 창공의 기사들이 지키는 그리핀도르를 초토화시킨 고대의 괴수, 베헤모스였다.
[베해모스는 산군(山君)의 지나친 탐식으로 태어난 괴수이니, 대지가 산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호자이니라]
그리고 과거 대지의 재앙이라 불리던 괴수는 골드레이크를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해 반드시 처리해야 할 원죄이기도 했다.
[산군이 지은 탐식의 죄는 베헤모스를 대지로 돌려보낸 뒤에야 사하여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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