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97화 (297/305)

298. 용의 제국 ⑴

어스름이 깔린 황도의 하늘 위로 요란스러운 빛깔의 섬광이 솟구쳤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중앙기사단의 요새에서도 보일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어? 저게 뭐지?”

황도의 하늘을 온통 하얗게 비추는 섬광을 발견한 이방인 존스테인 필그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멍청아! 총집결 신호잖아! 뭘 보고만 있어! 전부 무장 갖추고 연병장에 모여!”

곁에 있던 선임 기사 하나가 버럭 소리를 치고는 훈련 중이던 모든 기사들에게 관전 무장을 지시했다.

쐬에에엑.

그때 두 번째 섬광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번에는 불길한 적색 빛의 섬광이 었다.

“완전 전시 태세!”

황도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나 떠오른다는 긴급한 신호, 선임 기사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을 채근했다.

댕댕댕댕.

한발 늦게 중앙 기사단의 요새를 깨우는 긴급 타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주둔 중이던 모든 병력이 갑주를 챙겨 입고 제 말을 챙긴다고 요란을 떨었다.

“준비된 이들부터 먼저 황도로 출발하라!”

중앙 기사단 총 단장의 명령에 임전태세를 갖춘 기사들이 신속하게 요새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를 마친 각 기사단이 요새를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둔 채 황도를 향해 출발했다.

“저쪽에 황도 수비대의 중갑 기병들입니다!”

황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피어난 먼지 구름 사이에서 용케도 황도 수비대의 깃발을 발견한 선임기사가 소리쳤다.

“중앙군 황도 방면 소속의 기병들도 보입니다!”

먼지 구름은 하나가 아니었다.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방향에서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황도를 향해 내달리는 기병대를 본 총 기사단장이 굳은 얼굴을 해 보였다.

“설마 이번에는 몬스터가 황도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인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과 황도의 방어 병력이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라도 황도에 출몰한 것은 아닌지, 건국 이래로 한 번도 발동한 적 없는 황도의 긴급 신호에 기사들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서둘러라! 황도에 변고가 생긴게 틀림이 없다!”

총 기사단장의 명령에 기사들이 더욱 더 속도를 올렸다.

댕댕댕댕.

말을 돌볼 새도 없이 내달려 황도에 도착한 중앙 기사단을 반겨준 것은 쉼 없이 울려대는 타종 소리였다.

성벽 위에는 시위에 살을 먹인 궁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요소요소에 배치된 수성용 투석기와 발리스타들은 이미 장전을 마친 채 발사를 기다리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남서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황도로 날아오는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남서쪽 방향에서 황도를 향해 날아오는 물체라면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 밖에 없었다.

“그쪽이라면 전승 대공께서 오고 계신 방향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전승 대공께서 황도로 오고 계십니다.”

총 기사단장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전승 대공이라면 대륙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인물로 아덴버그에서는 전쟁영웅이자 여제의 배우자로 명망이 자자한 기사였다. 그런데 그런 귀인의 귀환을 반겨주기는커녕 적이라도 대하듯 이리 임전 태세를 갖추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의문은 황성 앞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더욱 심해졌다.

“맙소사. 황실 마법사단장도 한 수 접어준다는 황도의 고위 마법사들입니다.”

마법사단에 이름만 올려두고는 도통 연구실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던 황실 마법사단의 골칫덩어리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명이나 중앙 광장에 모여 있었다. 드높은 경지에 걸맞은 자존심 탓에 황실조차도 다루는 데 애를 먹는다는 고위 마법사들이었다.

“허어….”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을 포함하면 어지간한 왕국의 수도 정도는 단번에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어마어마안 전력의 집결, 총 기사단장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오늘 막 도착한 영상 기록구입니다."

그런 단장에게 마법사 하나가 다가와 수정구 하나를 내밀었다.

“자세한 설명은 영상을 먼저 보신 후에 해드리겠습니다.”

팟.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법사가 영상 기록구에 저장된 영상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온몸을 둘러싼 비늘은 은과 금을 공들여 세공한 것처럼 아름다웠고, 한 점 군더더기 보이지 않는 육신은 소름 끼칠 정도로 우아하고 강인해 보였다. 각기 색이 다른 한 쌍의 날개 역시 온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했다.

“저게 대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생명체의 존재감에 총 기사단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승 대공께서 이번에 새롭게 얻으신 아룡입니다.”

반쯤 넋을 놓은 단장을 보며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저게 드레이크나 와이번과 같은 아룡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런 압도적인 존재가 한낱 몬스터로 치부되는 드레이크와 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총 기사단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여전히 영상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강한 부정을 표하는 총 기사단장에게 마법사가 설명을 마저 해주었다.

“떠나기 직전 전승 대공께서 남기신 말씀과 저 압도적인 위용을 종합해보건대, 저희 마법사단은 저게 진짜 용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기록조차 없이 이름만 남아 단순한 신화나 전설로 치부되었던 용이 실존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판국인데 심지어 그 용이 황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단다. 총 기사단장을 비롯한 중앙 기사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게 용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용이겠습니까. 아마도 전승 대공께서는 진짜 용을 찾는데 성공하신것 같습니다.”

그런 기사들을 향해 마법사가 손가락을 세워 영상을 가리켜 보였다.

"음.”

기사들은 마법사의 말에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말마따나 전설 속의 용이 아니고서야 영상 속의 생명체를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전승 대공과 함께라고 해도, 저런 엄청난 놈이 폐하께서 머무는 황도를 향해 날아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아. 레인하르트 후작.”

언제 다가왔는지 황가 수호대의 수장 레인하르트 후작이 말했다.

“만에 하나 저 무지막지한 놈이 통제를 벗어나 난동이라도 피운다면, 그때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벌어질 거요.”

총 기사단장도 내심 납득하고 말았다. 후작의 말대로 단순히 전승 대공만 믿고 아무렇지도 않게 황도에 들이기에는 용의 존재감이 지나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어쨌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소.”

레인하르트 후작은 원래는 황도가 아닌 황도 앞 평원에서 대공을 맞이할까도 생각했으나, 수백 년에 걸쳐 보강해온 황도의 방어 설비와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노라 말했다.

"영상을 조금이라도 일찍 봤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공을 막았을지도 모르겠소. 아니, 지금도 마음같아서야 차라리 대공이 발길을 돌렸으면 하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인 여제를 보며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제국의 영웅이자 폐하의 반려인데 계속 그렇게 황도 밖으로 내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소?”

농담치고는 다소 매정한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황도와 황족을 수호해야 하는 수호대의 수장으로서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라 총 기사단장이 슬쩍 격려의 말을 건넸다.

“제국 역사상 최고조에 오른 전력이 한 자리에 모였소. 중부에 파견 나간 이들의 수가 적지는 않다고 해도 이 정도 숫자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라면 설령 용이 아니라 더한 놈이 나타나도 황도의 안녕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요.”

총 기사단장의 말은 후작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지만, 영상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린 스스로를 고무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초인들의 존재를 이렇게라도 상기시키지 않는다면 만일의 상황이 오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만큼 영상 속의 용은 전에 보지 못한 엄청난 존재였다.

하지만 총 기사단장이 그런 자신의 다짐과 각오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옵니다!”

첨탑 위에 자리 잡고 있던 눈 밝은 기사가 남서쪽 하늘에서 접근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소리 쳤다.

“전 마법사들은 언제든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미리 주문을 준비하라.”

“기사단! 검에 손 올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는 소리와 철제 장갑을 낀 기사들이 검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잡는 소리가 광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화악.

거대한 범선의 돛이 펼쳐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순식간에 광장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영상 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배는 찬란하게 빛나는 비늘,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용이 그곳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검 손잡이를 움켜잡은 기사들의 손이 경련하다 이내 힘없이 늘어졌다. 모아두었던 마법력이 흩어진 마법사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막고 못 막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을 목도한 것만으로도 기사들이 마음속에 세운 칼이 꺾여 나가고, 마법사들의 긍지가 산산조각이났다.

그렇게 용은 나타난 것과 동시에 광장을 지배하였다.

[아무래도 그대의 배려는 저들에게 아무런 감사도 받지 못할 듯하구나.]

에다의 말에 김선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황도를 목전에 두고도 일부러 속도를 늦추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황도로 날아가 오필리아와 빅토리우스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에다의 등장에 황도의 인물들이 경기를 할까 우려해 참아냈다.

압도적인 존재감의 에다를 처음으로 마주할 황도의 인물들이 제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배려였다.

에다의 존재감은 단순히 준비를 한다고 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더욱 많은 이들 앞에 에다의 위용을 자랑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란을 피하기 위해 에다를 두고 혼자 황도로 들어서자니, 에다가 한 시도 자신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끙. 일단 내려가자. 여기서 이렇게 있는 게 더 민폐다.”

그의 말에 에다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초인들은 에다가 완전히 내려설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턱.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광장, 김선혁이 발을 딛는 소리만이 기이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폐하.”

미동도 없는 초인들을 통과해 마침내 오필리아 앞에 당도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부대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용을 향해 고정되었던 그녀의 시선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에다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겼던 탓인지, 뒤늦게 그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몸을 떨었다.

“대공!"

굳어있던 얼굴에 금세 표정이 생기더니, 이내 사무칠 듯 깊은 그리움과 반가움이 떠올랐다.

“제가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요.”

“늦었소. 대공은 또 늦었소.”

질책의 말과는 달리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잠시 다녀온다더니 벌써 몇 달이나 지나지 않았소.”

책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스한 온기가 뺨에 와닿았다.

와락.

그리고 다시 뺨에서 어깨로 가슴으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보고 싶었습니다.”

품에 안긴 오필리아를 마주 안으며 그가 힘주어 다짐했다.

“대공은 항상 말뿐인 사내요.”

이번에도 말과는 달리 그를 안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는 오필리아였다.

“기억하십니까?”

해후의 기쁨을 잠시간의 포옹으로 풀어낸 김선혁이 슬며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제가 다시 돌아왔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오필리아의 이마에 키스를 한 그가 뒤를 가리켰다.

“감히 더 이상 제국을 넘보는 자가 없도록 만들겠다는 말 말입니다.”

수많은 초인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도도한 용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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