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맹약 ⑷
[과거 최후의 일전을 위해 모든 해룡들이 뭍으로 올라온 바 있다. 그때 해룡들은 다 자란 일족을 하나 남겨두어 레비아탄이 일족의 어린 해룡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소 뜬금없게까지 들리는 에다의 말은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케케묵은 과거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레비아탄으로부터 어린 해룡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남겨진 것이 바로 심해의 군주였으니, 그자가 바로 그대가 블루곤이라 부르는 해룡이니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김선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나 심해의 군주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였고, 그 결과 교활한 레비아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멀고 먼 바다까지 나간 심해의 군주가 뒤늦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린 해룡을 찾아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레비아탄이 먹다 남긴 어린 해룡의 잔해 중 일부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 블루곤이 지은 죄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심해의 군주는 스스로의 교만과 아집으로 일족의 귀하디귀한 어린 해룡을 잃게 되자, 벌이 두려워 저 깊은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노라. 하지만 정작 이를 질책할 해룡들은 모조리 혼돈과의 전쟁에서 죽고 난 후였으니, 그자는 천 년이 다 지나는 동안에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볕조차 들지 않는 깊고 깊은 바다 속에서 숨어 지내며 일족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며 살게 되었노라.]
스스로를 과신하여 일족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책임을 피해 달아나기까지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블루곤은 용의 긍지를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숨어 지내는 동안 그자가 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해룡의 권능은 온데간데없이 되었고, 이성마저 희미해져 마침내 미물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이는 당대의 용제인 내가 의도한 것이며, 교만의 죄를 지은 죄수가 응당 치러야 하는 형벌이었노라.]
에다의 음성에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블루곤이 저 끔찍한 괴물을 처리해야지.”
하지만 그럴수록 김선혁은 더욱더 블루곤이 레비아탄을 처리하는데 적격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과거 레비아탄으로 인해 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니, 레비아탄을 처리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르게 만드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이유였다.
에다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블루곤이 잃어버린 힘을 돌려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자의 형벌이 감해지는 건 제 스스로 죗값을 치르고 나서야 가능하리라.]
결국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을 돌려받으려면, 지금 상태로 블루곤이 레비아탄을 처리하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 상태로 블루곤이 레비아탄과 싸운다면?”
[심해의 군주가 지닌 지금의 권능은 당시에 살해당한 어린 해룡이 갖고 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십중팔구 결과가 다르지 않으리라.]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만난 온전한 용인 에다에 비하면 블루곤은 용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 블루곤이 에다조차 물속에서는 맞상대를 꺼려하는 레비아탄을 처리할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한숨과 함께 선언했다.
“그럼 내가 블루곤을 도와서 레비아탄과 싸우도록 하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지닌 대부분의 권능은 저 깊은 물속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에다는 그가 블루곤을 돕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몇 번이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며 경고했을 뿐이었다.
“뭘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 어차피 네가 나를 아룡들이랑 짝지어준 것도 이런 상황을 바랐기 때문아니야?”
정말로 에다가 아롱들을 죄인으로 영원히 남겨둘 것이었다면, 아룡들과 만나도록 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결국 블루곤도 얼마 남지 않은 용족의 일원이었으니까.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에다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녀올게.”
온전한 용기사가 되며 얻은 소환의 능력으로 블루곤을 따로 불러낸 김선혁이 바닷속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콰아아아.
기다렸다는 듯이 수면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킨 바다 아래로 거대한 그림자가 잠시 맴돌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김선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나흘이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였다.
“아오! 온몸이 다 쑤시네.”
호기롭게 사라졌던 것과는 달리 나흘 만에 나타난 그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홀딱 젖은 머리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채로 얼굴에 들러붙어 흉하기 그지없었고, 물에 불어 하얗게 부르튼 얼굴과 피부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고 있었다.
“겨우 잡았네. 진짜.”
죽겠다고 엄살을 피워대던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온 바다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어버린 바다뱀의 시체가 있었다.
기어이 블루곤과 함께 레비아탄을 처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가장 염려했던 레비아탄을 추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다를 피해 내내 도망치던 레비아탄은 블루곤의 존재를 느끼기가 무섭게 태도가 돌변했다.
한 번 맛보았던 해룡의 피맛을 잊지 못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굴욕적으로 도망쳐야 했던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분노인지, 레비아탄은 집요할 정도로 블루곤을 괴롭혀댔다.
순식간에 입장이 역전되었다. 호기롭게 레비아탄을 잡겠다고 나섰던 김선혁과 블루곤은 순식간에 맛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냥하는 입장에서 사냥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어떤 아룡보다 거대한 블루곤도 레비아탄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타고난 거력도, 물을 다루는 권능조차 괴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에다가 레비아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면, 블루곤은 진즉에 바다뱀에게 잡아힌 두 번째 해룡으로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루곤은 포기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것이 과거 자신이 지은 죄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살아남기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레비아탄은 죽었고, 자신들은 살아남았다. 지금은 그것만이 중요했다.
‘심해의 군주가 지닌 지금의 권능은 당시에 살해당한 어린 해룡이 갖고 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십중팔구 결과가 다르지 않으리라.’
에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저 강대하고 지혜로운 용은 처음부터 이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에다는 처음부터 레비아탄을 스스로 처치할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놓아준 것일지도 몰랐다. 딱 블루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바다뱀을 풀어주어 스스로가 과거의 죄를 매듭짓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탐식의 괴수가 끝끝내 제 욕심을 참지 못해 종말을 맞이하고야 말았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당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스스로를 과신하여 귀하디귀한 일족의 미래를 져버린 자여.]
어쨌건 간에 이제는 전부 다 지나간 이야기였다.
[그대가 지은 죄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바다뱀의 피로는 씻을 수 없는 지대한 것이나,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대만이 유일한 해룡의 미래이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로다.]
지금 중요한 건 마침내 블루곤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크르르.
블루곤은 감히 수면 밖으로 당당히 머리를 내밀어 에다를 바라보지 못하고, 수면 아래서 가쁜 숨만 몰아쉬어 댔다.
[나 당대의 용제로서 선언하노니, 오늘로서 그대가 범한 교만의 죄를 사하노라.]
에다의 선언에 블루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잃어버린 뿔과 날개는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사라졌던 권능역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내 찬란한 섬광이 터져나와 상처 입은 해룡의 육신을 감싸 안았다.
[이로서 그대는 다시 예전처럼 심해의 군주로서 가장 깊은 물밑을 지배하는 왕좌에 앉게 되리라.]
레비아탄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바다가 순식간에 원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오물처럼 바다를 떠다니던 추악한 괴수의 몸뚱이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허나 그대는 명심하라. 뿔과 날개를 되찾았다고 해서 그대가 내던진 용의 긍지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그대가 누리는 영광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노라.]
에다의 말을 끝으로 블루곤은 과거로의 완벽한 회귀를 위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다.
“이제 가자.”
한참동안이나 블루곤이 사라진 수면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에다의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하스부르크 영지에서 그토록이나 요란을 떨었으니, 황도에도 자신의 귀환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곧장 다른 곳으로 또 날아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을 오필리아를 생각해서라도 한시 바삐 황도로 돌아가야 했다.
“근데 에다야.”
용제가 슬쩍 곁눈질로 자신의 반려를 돌아보았다.
“설마 다른 놈들도 이런 식은 아니겠지?”
에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전승 대공께서 마침내 끔찍한 괴수를 처치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하스부르크 영지에 전승 대공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남부를 초토화시켰던 괴수가 퇴치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오오! 역시 전승 대공이시다!”
흉흉한 소문만이 전해지던 가운데 들려온 기쁜 소식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전승 대공이 이룩한 또 하나의 위업을 칭송하였다.
“이제 대공께서 돌아오셨으니, 제국이 다시 평안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겠군.”
“저 끔찍한 바다뱀까지 처치하신 전승 대공이요. 하찮은 돼지머리 괴물과 식인 거인 따위가 상대가 되겠소?”
사람들은 마치 모든 고민거리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밝은 얼굴로 위대한 기사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그렇게 승전이라도 한 듯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오필리아만이 굳은 얼굴로 마법사들을 다그쳐 남편의 행선지를 알아내라 명령했을 뿐이었다.
“하스부르크 영지에서 곧장 북동쪽을 향해 떠나셨다고 합니다.”
김선혁의 비행경로를 파악하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질주하는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용에 대한 목격담이 줄지어 황도로 전해져 왔던 탓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황도로 오실 모양입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목적지를 확인한 마법사들의 말을들은 오필리아가 조금은 풀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베헤모스까지 처리하고 오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평소처럼 이번에도 온갖 곳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다가 올 거라 생각했더니, 그래도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바로 황도로 날아을 모양이었다.
“폐하.”
방랑벽 심한 남편에 대한 염려를 한시름 덜어낸 오필리아에게 마법사들이 근래 일어난 제국의 변화에 대해 보고를 했다.
“일부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북부와 동부만큼은 아니어도 온갖 몬스터들이 출몰하여 골머리를 썩어야 했던 남부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보고였다.
“그게 아무래도 대공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자세히 설명하라.”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춘 시기와 지역이 정확하게 대공의 이동과 맞아 떨어집니다.”
마법사가 지도를 펼쳐 들고는 김선혁의 이동 경로를 표시했다. 그런데 그 경로가 정확하게 몬스터들이 사라진 지역과 일치하였다.
“평소에는 그리 은밀하게 움직이던 그가 보란 듯이 움직였을 때,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노라.”
정확하게 어떤 요술을 부렸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무슨 수를 부린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부에서 기승을 부려대던 오크와 트롤에 대한 소문이 뚝하고 끊겼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짐작대로였다.
김선혁과 에다가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내며 저공비행을 하는 건 일종의 영역 표시였다.
인간만큼이나 영역에 대한 집착이 강한 고대의 몬스터들이었지만, 용을 보고서도 그 자리를 지킬 만큼 담대한 존재는 없었다. 몬스터들은 용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혼비백산하고 말았고, 그렇게 겁에 질린 몬스터들에게 용의 사념이 전파되었다.
[떠나라. 감히 허락도 없이 나의 권역에 머무는 자 용서치 않으리라.]
용을 기억하는 고대의 몬스터들은 감히 에다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영역을 포기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선혁과 에다가 아데 스덴에 도달했을 때, 제국의 최남단에서 황도에 이르는 길까지 몬스터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멀리 보이는 황도를 본 김선혁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외유 끝에 마침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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