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맹약 (3)
전선 전체에 대대적인 진군 소식이 퍼진 직후, 병사들의 사기가 말도 못 할 정도로 떨어졌다.
이제까지 마물들과 수도 없는 전투를 치른 백전의 병사들이라고 해도 마수들과 마물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까지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장벽 안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사기가 멀쩡한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방어선이 뚫리지 않는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인데, 저 안쪽으로 들어가라니.”
병사들에게 있어 지휘부의 명령은 괴물의 아가리로 뛰어들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병사들이여. 어둠을 두려워 말라. 이천의 기사들과 일천의 마법사들이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지휘부 역시 일찌감치 병사들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어떻게든 그들의 용기를 북돋으려 했지만, 한 번 바닥에 떨어진 사기는 도무지 오를 생각을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악의 경우 병사들이 탈영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장벽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탈영을 우려해야 할 지경이었다.
“제가 병사들을 다독여보겠습니다.”
그때 나선 이가 바로 용사 박준민이 었다.
용사는 전날 강력한 섬광으로 신탁을 증명했던 것처럼 전선을 돌며 기적을 사역해 보였다.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과 마수들이 용사가 일으킨 기적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광경을 직접 지켜본 병사들은 마침내 신이 이 세상을 위해 구원자를 내려보냈다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 빌어먹을 장벽을 끝장내자!”
“구원자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더 이상 두려움에 잠을 못 이루는 일도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다. 병사들은 압도적인 신의 위엄에 완전히 용기를 얻었고, 장벽 너머의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기세를 탄 연합군의 예기가 극에 달했을 때, 마침내 장벽 너머로 향할 원정대가 테네시아의 북부 평원에 집결하였다.
이십삼 개국에서 지원한 기사 이천백서른둘, 마법사 구백여든일곱, 정령사를 비롯한 기타 능력을 지닌 초인 아흔여섯이 장벽 너머로 향할 원정대의 전력에 추가되었고, 이와는 별개로 아덴버그 제국의 각 일백의 기사와 마법사, 사백의 이방인들과 퀘이샤들이 원정대에 합류했다.
거기에 십칠 개 연대, 삼만사천의 보병이 더해졌다. 하나같이 마물들과 마수들을 상대로 오래도록 싸워온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우리는 말 위에서가 아니라면 싸우지 않아.”
안타깝게도 북방의 유목민들은 자신의 말들이 장벽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핑계로 합류를 거부했다.
“그대들이 없는 동안 우리가 방어선을 책임지기로 하지.”
그나마 그들이 전력의 공백을 메워주기로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오오오.
원정대의 출발을 알린 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거룩하고도 신성한 섬광이었다. 하늘에서 시작된 빛의 기둥은 밤을 몰아내는 새벽녘의 햇살처럼 어둠의 장벽을 가르며 원정대가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선전 효과 한 번 끝내주는군.”
원정대에 합류하는 대신 방어선에 남은 마렉은 신성에 취해 잔뜩 흥분한 병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마찬가지로 원정대에 합류하지 않은 아샤 트레일이 마렉을 보며 물었다.
“알 수 없지.”
마렉의 시선이 빛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원정대의 뒷모습을 향했다.
“하지만 누가 이기든 간에 인간의 승리는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강력한 신성과 근원의 어둠, 두싸움의 승자가 누가 되든 간에 인간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다.
"음."
아샤 트레일은 마렉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럽게 질문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검성의 시선을 따라 원정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스으윽.
원정대가 장벽의 경계를 통과하고 얼마 가지 않아 양옆으로 갈라섰던 어둠이 다시금 벽을 세웠다.
어둠에 가려진 원정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원정대가 장벽 너머로 향한 뒤에도 연합군의 일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검은 장벽을 노려보다 웨이브가 일어날 낌새가 보이면 병력을 전개시켜 전력을 다해 마수들을 퇴치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대신해 북방의 기병들이 강대한 마수들을 처리했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방어선의 상황이 전과 같았다고 해서 바깥세상의 상황까지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가장 처음 이상을 발견한 것은 어두운 숲을 오가는 약초꾼들이었다.
“맹세하건대 난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까지 못생긴 괴물을 본 적이 없어.”
“돼지와 인간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모양새가 어찌나 괴상하던지, 하마터면 넋 놓고 바라보다 놈에게 잡아먹힐 뻔했다고.”
약초꾼들은 가장 깊은 숲의 그늘에 웅크린 미지의 존재에 대해 떠들어댔고, 나중에 가서는 숲의 외곽에서 벌목을 하던 나무꾼들이 말을 보탰다.
그들은 생전 본 적 없던 기괴한 괴물들이 숲에 가득하다고 증언했고, 그렇지 않아도 교국에 일어난 재앙이 자국에 일어날까 염려하고 있던 왕국의 수뇌부가 발 빠르게 조사단을 급파했다.
“마물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직접 숲에 들어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한 조사단은 숲의 괴물들이 마물들과는 확연이 다른 종임을 확인해주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오크와도 같았습니다.”
조사단의 마법사들은 숲에 나타난 괴이한 존재들이 과거 신화 속에 기록된 오크들과 그 생김새가 똑같노라 말했다.
우려했던 마기의 준동과는 별개의 사안임을 깨달은 각 왕국의 수뇌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왕국에 나타난 이상 징후가 끔찍한 재앙의 전조가 아님에 안도했다.
하지만 안심을 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소문이 들려왔다. 그렇게 들려오는 소문들 중에는 이미 존재를 확인한 오크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한 것도 있었다.
마을을 습격한 괴물은 트롤로 판명되었습니다. 역시 신화에 기록된 몬스터입니다.”
“오거…입니다. 과거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을 잡아먹었다고 알려진 끔찍한 식인 괴물입니다.”
곳곳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들이 나타나 기승을 부렸다. 모두 하나같이 고대의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케케묵은 존재들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다에서는 인어가 목격되었고, 높은 산봉우리에는 인간과 새를 섞어놓은 하피라는 놈들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종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다.
마치 세상이 신화 속의 시대로 회귀라도 한 듯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새로 나타난 존재들이 모두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요정이나 일각수 같은 신비로운 존재들도 있었다. 하지만 요정이나 일각수 같은 생명체에 대한 목격담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많은 건 식인 괴물들에 대한 소문이었다.
곳곳에서 습격이 일어났다. 전쟁통에도 활발히 오가던 상인들이 떼로 나타난 오크라는 놈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마을에 내려온 트롤과 오거에계 잡혀간 농부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쯤 가서야 왕국의 수뇌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변방의 영주들을 다그쳐 괴물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돌아온 존재들은 끝도 없이 나타났고, 군소 영주들의 병력으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은 아덴버그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부와 북부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변경백들이 최선을 다해 치안을 유지하려고 노력중이지만, 습격이 일어나는 범위가 지나치게 광대합니다.”
가장 많은 병력을 장벽으로 파견한 제국이었지만, 새롭게 편성된 중앙군의 전력은 여전히 제국의 넓은 영토를 지켜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일어난 습격에 모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변방 영주들의 지원요청이 중앙에 쇄도하였다.
“저들은 단순한 괴물들이 아닙니다.”
퀘이샤들의 대표가 찾아와 습격을 일으킨 존재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왜 저들이 갑자기 다시 돌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저들은 과거 존재했던 이들이며 실재했던 종 중에 하나입니다.”
이 대륙이 인간의 것이 되기 이전에 당당히 대륙의 주인으로 존재해왔던 종의 출현, 오필리아는 단번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는 마법사들에게 일러 과거의 기록을 펼쳐보도록 했다.
여제의 명령을 받은 마법사들이 몇날 며칠을 세운 끝에 끔찍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만약 정말로 신화 속의 존재들이 전부 실존했던 것들이고, 그들이 지금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현재까지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괴물들이 과거에 수도 없이 존재했었노라며 속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필리아는 마법사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당장 전 대륙에 현 상황을 알리고 미래를 대비하도록 하였다. 제국 역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대기시켜 갑작스러운 재앙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편이 아니었다. 끔찍한 전쟁에 연달아 휘말린 대륙의 왕국들이 미처 전력을 정비하여 미래를 준비할 새도 없이 마법사들이 예견했던 강대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나도와 아국을 오가던 상선들이 거대한 뱀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리핀도르의 북부에서 성보다 거대한 괴물이 출몰하여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피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피해, 마법사들이 하얗게 질려 습격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남해의 지배자라고 알려진 레비아탄과 대지의 재앙이라고 불리던 베헤모스입니다.”
과거 수도 없이 많은 왕국들을 멸망시킨 끔찍한 존재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멀리 그리핀도르에 나타난 베헤모스는 둘째 치고 레비아탄의 문제가 시급했다.
바다를 오가는 배들을 습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레비아탄이 제국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인 뤄겐부르크를 습격하여 정박 중이던 수백 척의 배를 박살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일천의 마법사들과 일천의 기사들이 나서고도 베헤모스를 잡지 못했고, 오백 척의 선단이 나서고도 레비아탄에게 전멸하였다고 합니다.”
“레비아탄이 절대로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만약 뭍으로 올라온다면 뤄겐부르크에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 제국 전역에 벌어지게 될 겁니다.”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제국의 남부는 초토화될 것입니다.”
심약한 마법사들 중 몇은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굴어댔다.
“뤼겐부르크 영지가 또 습격당했습니다!”
처음의 습격이 있고 불과 하루가 지나지 않아 뤼겐부르크영지가 또다시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의 피해는 전처럼 정박해있던 선박들이 침몰하는데 그치지 않았으니, 물에 올라온 레비아탄이 영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는 유유히 바다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로 하루마다 바다에 인접한 제국의 남부 영지들이 습격으로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포악한 행보였다.
“폐하!”
“이번에는 또 어디가 습격당했는가!”
끔찍한 괴물의 출현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오필리아가 굳은 얼굴로 전령을 다그쳤다.
“그게 아니라….”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전령의 표정이 밝았다.
“레비아탄이 하스부르크 영지를 습격했다가 치명상을 입고 격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령의 말에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철혈의 여제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게 무슨… 그렇게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분명….”
“그만.”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떠들어대자 오필리아가 손을 들어 그 입을 막았다.
“며칠 전에 출발한 중앙 기사단과 마법사단이 벌써 남부에 도달했을 리가 없으니, 혹여 하스부르크영지에 내가 모르는 대단한 전력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녀의 말에 전령이 무엄하게도 고개를 도리질해댔다.
“그게 아니라….”
곁에 있던 엄격한 기사들이 전령의 꾸짖으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승 대공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벌떡.
황성이 무너져도 황좌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말하라.”
여제의 지엄한 명에 전령이 신이 나서 보고를 이어갔다.
“레비아탄의 습격으로 하스부르크 영지의 항구가 초토화되었을 때, 갑작스레 하늘에서 금과 은을 섞은 듯 아름다운 무언가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고 합니다. 직후 레비아탄은 큰 상처를 입었고 곧장 바다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럼 그 금과 은의 벼락이… ”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니 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체는 분명 처음 보는 존재였으나, 그 생김새가 전승 대공의 레드번과 흡사한 면이 있었다는 하스부르크 남작의 말이 있었습니다.”
오필리아가 눈을 감으며 털썩 황좌에 주저앉았다.
“돌아왔구나. 마침내 그가 돌아왔구나.”
떨리는 음성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 오필리아가 뒤늦게 전령에게 물었다.
“전승 대공은 무탈한 모습이라더냐.”
“그것이… 대공께서는 전투 직후 부상을 입은 레비아탄을 쫓아 바다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전령의 말에 오필리아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더냐.”
“하스부르크 남작은 대공의 얼굴조차 뵙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쩐지 냉기가 내려앉은 여제의 표정에 전령이 주춤주춤 상황을 보고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역마살이라도 낀 것인가. 한 번 외유에 나섰다 하면 기어이 제 볼일을 다 봐야 돌아오는구나.”
***
“엄청 빠른 놈이네.”
[레비아탄은 과거에도 다 자라지 못한 어린 해룡을 잡아먹은 바 있는 흉악한 괴수, 그 교활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니라.]
망망대해를 노려보던 김선혁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자 에다가 대꾸했다.
[레비아탄이 바닷속으로 몸을 감춘 이상, 나로서는 추격을 이어갈 수 없노라.]
아무래도 창공을 질주하는 날개 달린 용에게 레비아탄은 그다지 상대하기 쉬운 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치명상을 입힌 것도 레비아탄이 항구 위로 반쯤 몸통을 내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김선혁도 더는 무리하게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비아탄을 그대로 놔줄 생각도 없었다.
“블루곤이 온전한 힘을 되찾는다면 저 레비아탄인지 뭔지 하는 놈을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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