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맹약 (1)
온 세상에 죽음이 가득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할퀴고 지나간 대지는 엉망진창으로 파이고 헤집어져 발 디딜 곳 하나 없었고, 검고 붉은 피로 가득 채워진 웅덩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끝도 없이 죽음이 이어졌다.
촉수가 전부 잘린 채 축 늘어진 이형의 괴물, 검게 변색된 뼈다귀로 만들어진 거인, 짐승도 무엇도 아닌 기괴한 형상을 한 마수들, 시공의 폭풍 속에서 악다구니를 써대던 괴물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괴물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처참하게 파괴된 대지와 시체가 모인 곳에는 어김없이 용의 사체가 있었다.
날개가 꺾여 대지에 처박힌 비룡은 여전히 적의 몸통을 움켜쥔 발톱을 놓지 않았고, 몸통의 절반이 녹아내린 해룡은 앞발로 자신보다 배는 거대한 무언가의 시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여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반쯤 뭉개진 턱을 악 다물고 고개를 꼿꼿이 든 지룡은 여전히 적을 앞에 둔 듯 눈을 부릅뜬채였다. 가슴께가 휑하니 뚫린 백룡은 날개를 활짝 펴고 무언가를 막아서듯 굳건한 모습이었다.
비록 역병에라도 걸린 듯 반쯤녹아내리고 검게 물들어버린 비늘은 살아생전의 찬란함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지만, 용들은 결코 비루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볼품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감히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 여겼던 거악(巨惡)과 최후까지 항전한 일족의 무덤이다.]
이제껏 수도 없이 많은 전쟁터를 전전해온 김선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비장하고도 장엄한 죽음을 본적은 없었다.
[바로 이곳에서 혼돈은 실체를 잃고 잘게 찢겨져 수십 개의 조각으로 화하였으니, 혼돈이 지닌 태반의 힘이 이곳에서 소실되었다.]
과거 아무도 혼돈과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오직 용만이 나서서 혼돈에 대항하였다 들은 바가 있었다. 그때는 그저 지나간 과거사 정도로 흘려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용들의 무덤을 마주하고 나니 그 기분이 남달랐다.
김선혁은 홀로 수천의 마물들을 끌어안고 죽어간 용들의 죽음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너희가 세상을 구했구나.”
단 하나의 조각이 나타났을 뿐임에도 대륙의 사분지 일이 완전히 죽음의 대지가 되었다. 서부에 위치한 모든 국가들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던 모든 인간들은 죽어 썩은 대지의 양분이 되고 말았다.
강력한 신기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용사도 마왕 하나를 상대로 고전했고, 환계의 환수들을 부리는 환수사제도 밀려드는 마수들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힘을 합치고도 마수들이 전선을 넘는 것을 막는 게 고작이었다.
과거라고 해서 상황이 달랐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이 자리에서 죽어간 용들이 목숨으로 혼돈을 조각내지 않았다면, 아무리 초월자들이 넘쳐나던 시대라고 해도 결코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 진짜 세상 한 번 거지같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가 일었다.
멸족의 길을 걸으면서까지 멸망을 막아낸 용들이 받은 대가는 망각이었다. 지금에 와서 용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니 그들의 죽음은 실로 쓸쓸하고도 고독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세상은 네가 다시 돌아오는 것조차 막으려 했다는 건가.”
동쪽의 조율자는 자신을 조율자의 운명으로 묶어 세상과 괴리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의지라고 말했으니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엿 같아서라도 너랑 꼭 계약을 해야겠다.”
[한 번 맺은 맹약은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대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는가.]
용혈기사에 오르며 육신에 일어난 변화, 팔뚝에 돋아난 비늘은 늘 그에게 고민거리였고 그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던 그날에도 환희보다는 걱정이 더욱 컸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어쩌면 용과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벗어난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갈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그렇게 대답한 그가 웅크린 채 미동도 없는 백금의 용 앞에 섰다.
[석양 속에 남겨진 마지막 백금의 일족이자, 북풍한설 몰아치는 세상 끝의 지배자. 영락해버린 세대의 용제(Dragon Lord). 백과 금의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 에다(Edda).]
잦아들었던 심장 박동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파앗.
세상을 전부 밝힐 듯 찬란한 금빛 서기가 그와 용을 감싸 안았다.
[그것이 그대와 영원을 나늘 자의 이름이노라.]
그리고 그 안에서 맹약이 완성되었다.
- 마침내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용과의 맹약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 당신은 당대의 용제인 에다의 반려로 그 근원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영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 5차 병과 용혈기사(Dragonian Knight)가 최종 병과로 진화하여 맹약의 용기사(Dragon Knight of Pledge)가 되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공의 폭풍을 헤매느라 지쳐있던 육신에 새로운 기력이 샘솟았고, 몸이 회복되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끝도 없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울려대는 무수한 메시지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반가워. 에다.”
그의 모든 정신은 눈앞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에다에게 향해 있었다.
스르륵.
굳게 감겨있던 에다의 눈꺼풀이 들려 올라가고, 금빛과 은빛의 눈동자가 떼구르 굴러 똑바로 그를 향하였다.
좌우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는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아마 시간이 허락했다면 김선혁은 언제까지고 그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를 감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에다와의 만남을 만끽할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캬악! 빌어먹을 폭풍! 마침내 자유다!”
“모조리 불태워주마!”
섬광과 함께 사라진 시공의 폭풍 속에 갇혀있던 죄수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나서기가 무섭게 추악한 악의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세상을 향한 증오를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마왕 박상진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힘을 지닌 괴물들이다. 만약 저들 중에 하나만 세상에 풀려나도 동부는 몰라도 마왕과의 전쟁으로 힘을 소진한 중부는 잠시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한 무더기다. 재앙도 이런 끔찍한 재앙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저들이 무사히 벗어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썩 나쁘지 않구나.]
세상에 풀려난 괴물들이 저마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가운데 에다가 말했다.
콰아아아.
에다가 거체를 일으켰다. 마치 산이 일어나듯 거대한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위를 찍어 눌렀다.
멈칫.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홍분해 떠들어대던 괴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에다였고, 포악한 괴물들은 뱀앞의 개구리마냥 굳어버린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 끝맺지 못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데 있어 저들보다 적당한 상대는 없으리라.]
말과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편 에다가 날아올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굳어있던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하나같이 에다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막아야 해!”
입이라도 맞춘 듯 각기 방향을 달리하여 자리를 벗어나는 괴물들을 본 김선혁이 그때까지만 해도 납작 엎드린 채 에다를 향해 경배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던 레드번의 위에 올랐다.
“콜 드래….”
[저들은 도망칠 수 없노라.]
아룡들을 모조리 소환하는 강력한 주문을 끝맺기도 전에 부드러운 바람이 이제 막 비상하려던 레드번을 내리눌렀다.
[이는 내가 그들에게 이 자리를 벗어날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용의 말이 끝이 나는 순간 사라졌던 강력한 광풍이 사방을 에워쌌다. 방금 전에 사라진 시공의 폭풍에 전혀 모자라지 않은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곳곳에서 벽을 세웠다.
“아….”
그제야 그는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바람의 힘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뒤늦게 떠올려낸 것이다.
[울어라. 바람아.]
그건 주문도 명령도 아니었다.
그저 부드러운 속삭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부드럽지도 사소하지도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곳곳에서 날카로운 바람에 사지가 잘려져 나간 괴물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내 바람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강력한 광풍에서도 살아남은 괴물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시공의 폭풍 속에서 방황하던 수감자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존재들이었으니, 존재만으로도 세상을 오염시키는 혼돈의 사도 그 자체였다.
“저주받을 일족! 우리를 시공의 미아로 만들더니, 끝내 이리 비참하게 끝을 내는구나!”
“그때 숨통을 끊었어야 했는데!”
살아남은 괴물들이 저주를 퍼부어댔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저들이 시공의 폭풍에 휘말리게 된 것과 에다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비사였다.
고오오오.
숨 막힐 정도로 우아하게 날아오른 에다가 저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이상, 저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오직 피할 수 없는 죽음뿐이었다.
콰아.
입을 쩍 벌린 에다가 금빛 찬란한 빛무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광채에 휩싸인 괴물들은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아….”
하나하나가 강력하기 그지없는 괴물들을 너무도 손쉽게 정리해버린 에다를 본 김선혁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건 해도 너무 하잖아.”
이래서야 왜 세상이 용의 귀환을 막으려 했는지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이런 강대한 존재가 자칫 다른 마음이라도 품는다면 그거야말로 마왕의 준동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재앙이 펼쳐질 테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조각난 파편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와 전쟁을 치른 용족이다. 그런 용족의 군주인 에다가 혼돈도 아닌 파편을 상대로 애를 먹어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저깟 혼돈의 종들 따위는 입가심도 되지 않노라.]
괴물들을 몰살시키고 돌아온 에다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말했다.
그 말이 자랑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에다의 몸짓 어디에도 거들먹거리는 기색이 없었던 탓이었다.
정말로 에다는 저 강력한 괴물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럼 입가심 말고 진짜 싸움을 하러 갈까.”
지금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때였다.
물론 그곳에 정말로 에다를 만족시킬 만한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자. 세상으로.”
혼돈과의 싸움으로 괴리되었던 북쪽 끝의 대륙이 세상과 하나로 합쳐지고 천년이 넘도록 멈춰 있던 용의 무덤에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용제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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