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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92화 (29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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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약속의 그날 (2)

의식을 홀리는 용의 존재감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덧 주변의 풍광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녹음(綠陰) 우거진 산과 들을 지나 마주한 세상은 오로지 얼어붙은 대지와 검푸른 바다만이 전부인 세상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마저도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펼쳐진 빛의 길뿐이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밤도 낮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조차 희미해지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건 시간 감각뿐이 아니었다.

추위도 더위도 없었고, 허기도 갈증도 없었다.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그 어떤 번잡함도 없었다. 살 끝에 닿는 바람의 감촉도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레드번의 날개 소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온몸의 오감이 차단된 듯한 기분이었다.

존재를 잠식해오는 끔찍한 고요함,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의 존재마저 잊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혼란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잊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마약과도 같은 평온에 젖어들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용의 기운에 집중하는 것으로 끔찍한 평온에 저항하였다.

[정신 차리렴. 여기서부터는 세상의 경계,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스스로를 잊고 세상의 틈바구니를 헤매는 영원의 망자가 되고 말 테니까.]

일찍도 말해준다.

곁에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요정용의 경고는 언제나 그랬듯 한발 늦은 감이 있었다. 만약 저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섬뜩한 경고처럼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멀었나.

김선혁은 손을 뻗어 레드번의 안장을 더듬었다. 떠나기 전 메어두었던 자루에서 말린 육포를 한 줌 꺼내 씹었다.

우웩. 이거 뭐야.

아무래도 사라진 감각 중에는 미각도 있었던 모양이다. 황성의 요리사가 특별히 준비해준 질 좋은 육포의 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입속에 육포가 있는지조차 모호하기만 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껌을 씹듯 육포라도 씹으려 했더니,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자신이 육포를 씹고 있는 건지 혀를 씹고 있는 것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툇.

김선혁은 잠시 더 질겅대다 육포를 뱉어냈다. 그리고는 다시금 용의 기운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설마 용은 이런 곳에서 천 년이 넘게 갇혀 있었던 건가.

그는 새삼 용이 이런 곳에서 그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는 게 놀라웠다. 이래서야 용과 아룡들 중 누가 형벌을 받은 쪽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세상을 위해 싸운 대가가 이런 끔찍한 꼴이라니, 너도 정말로 기구하구나.

과연 용과 같은 존재를 동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대한 용을 연민하고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더 없는 연민과 동정심은 이내 돌처럼 단단한 각오가 되었다.

내가 꺼내줄 테니까.

그 굳건한 다짐이 그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그는 마침내 용에게 이르는 길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용은 보이지 않았다.

[저 폭풍 너머에 그녀가 있어.]

고요한 세상 속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이 용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려면 반드시 저곳을 지나가야 해.]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사나운 폭풍, 게하임니스가 경고했다.

[저건 세상이 만들어낸 경계 속의 경계, 시공의 폭풍이란다. 만약 네가 바람을 다루는 알량한 능력을 믿고 쉽게 생각한다면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폭풍에 갈기갈기 찢겨질지도 몰라.]

확실히 게하임니스의 말 대로였다.

그 어떤 사나운 바람도 수족처럼 부릴 자신이 있는 김선혁이었지만,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을 굴복시킬 자신은 없었다. 아니, 굴복은커녕 저 안에서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을 수 있을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단히 각오….]

“다녀오도록 하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아아아.

김선혁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킨 폭풍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음의 모습 그대로 사납게 휘몰아칠 뿐이었다.

**

폭풍 속에 발을 내딛는 순간, 고요하던 세상이 돌변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귀를 찢을 듯 파고들고, 벼락이 번쩍일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이 어찌나 사나운지, 김선혁은 조금도 버틸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이 몇 번이나 거꾸로 뒤집히고 좌우가 뒤바뀌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조금만 버텨라.”

김선혁은 애처롭게 빽빽거리는 레드번을 다독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억지로 버틴다고 해서 버텨질 바람이 아니다. 어차피 휩쓸려가고 말 거라면 차라리 흐름을 타는 게 나았다.

그는 방향도 없이 불규칙하게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바람의 결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쾅!

끔찍한 열기를 담은 섬광이 온 사방에서 빗발쳤다. 정신없이 내리치는 수백 가닥의 벼락 중에서 하나가 운 나쁘게도 그의 바로 곁을 스쳐지나갔다.

화악!

직접 몸에 닿지도 않은 벼락의 열기만으로도 폐가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벼락에 직격당했다가는 큰일이었다. 레드웜을 통해 화염에 대한 내성을 얻은 자신은 몰라도 레드번은 절대로 열기를 견뎌낼 수 없었다.

하지만 시공의 폭풍이 지닌 무서운 건 단지 사나운 바람과 강력한 벼락 때문만이 아니었다.

“음?”

정신없이 바람에 휩쓸리며 벼락을 피하는 와중에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김선혁이 불현듯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콱.

간발의 차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스쳐갔다.

끄아아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 하나가 턱을 아구아구대다 바람에 떠밀려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저게 뭐야….”

그렇게 사라진 괴생명체를 바라보던 김선혁은 뒤늦게 바람 소리에 가려져 있던 아우성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아아아아.

캬악.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최소한 마왕 이상의 재앙을 일으킬 존재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놈들이 사방에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겠다고 발광을 해대니, 절로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네가 바람을 다루는 알량한 능력을 믿고 쉽게 생각한다면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폭풍에 갈기갈기 찢겨질지도 몰라.’

“멍청한 게하임니스.”

폭풍 속에 진입하기 전에 들었던 페어리 드래곤의 경고는 틀렸다.

“뭐가 갈기갈기 찢겨져. 저렇게 멀쩡한 놈들이 한가득이구만.”

끔찍한 벼락에 직격당해 거죽이 보기 흉하게 타버렸을지언정 괴물들은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저놈들도 다 여기 갇혀버린 건가.”

이곳은 침입자를 찢어발기는 처형대가 아니었다. 이곳은 폭풍에 떠밀려 갈 곳을 잃어버린 죄수들의 유배지였다. 또한 세상을 위해 헌신했던 용을 가두는 배덕한 세상의 감옥이기도 했다.

마렉을 통해 세상이 용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지만, 막상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세상이란 놈의 뻔뻔함에 절로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커질수록 용에게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졌다.

보란 듯이 용을 구해내 세상에 풀어두고 배은망덕한 세상이라는 놈에게 커다란 엿을 먹이고 싶어졌다.

“가자. 레드번.”

그의 말에 레드번이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펴고는 폭풍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

시공의 폭풍 속에서 보낸 시간은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오직 김선혁만이 이 끔찍한 감옥을 벗어날 날개와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폭풍 속을 배회하던 모든 괴물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바람에 떠밀리다 어쩌다가 그의 근방에라도 갈라치면 온갖 해괴한 짓거리를 해대며 들러붙었는데, 그걸 떨쳐낸다는 건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부리는 해골바가지도 있었고,

“날 데려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산산조각 내버리겠다!”

촉수를 뻗어 레드번의 꼬리를 감아쥐는 괴물도 있었다.

“내가 널 세상의 왕으로 만들어주마. 그러니 나를 데려가다오.”

심지어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을 구해주면 막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꼬셔대는 놈까지 있었다.

해골 마법사의 마법은 파훼하고, 흉물스러운 괴물의 촉수는 잘라냈다.

“왕? 필요 없어. 내 마누라가 황제다.”

그리고 감언이설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괴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 죽어! 죽어!”

처음에는 가급적이면 상처 없이 그에게 들러붙으려던 괴물들이 나중에 가서는 눈이 벌게져서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그가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구해줄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네놈도 우리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역시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되기를 원했다.

추악한 생김새만큼이나 추악한 심보였다. 이때만큼은 김선혁도 사악한 괴물들을 이 지옥 속에 가둬버린 세상을 칭찬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괴물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폭풍 속을 헤매고 다니기를 한참, 그는 마침내 모든 방해를 뿌리치고 폭풍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 돼에에에에!”

“멈춰! 멈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 테니 날 데려가라고!”

“또다시 이 지옥에 남겨지는 건 싫어어어!”

저 멀리서 악에 받힌 괴수들이 아우성을 쳐댔다.

“지긋지긋한 놈들.”

짧은 시간 동안 괴물들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닿기 위해 아우성을 치다 저들끼리 엉겨 붙은 괴물들의 덩어리가 보였다.

“가기 전에 선물이나 주마.”

육신이 뒤틀리고 순식간에 사나운 전룡이 세상에 현신했다.

“네놈! 용의 일족이었냐아아!”

“용! 용! 저주받을 존재!”

전룡의 태를 뒤집어쓴 그를 본 괴물들이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악의와 증오로 가득한 저주가 그에게 닿기도 전에 전룡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화염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진짜 안녕이다. 괴물 놈들아.”

화염 너머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괴물들을 일별한 그가 폭풍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경계를 넘은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는 그토록이나 만나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용의 실체와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

“아….”

언젠가 창공에서 당당히 자신을 내려다보던 용의 화신을 본 이후로 그는 수도 없이 용과 만나는 그날을 그려왔다. 꿈을 꾸면 용이 나왔고, 그 안에서 용은 화신 이상으로 찬란한 존재였으며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였다.

하지만 용과의 만남은 그가 꿈에 그려왔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금과 은을 녹여 만든 듯한 비늘은 상상했던 것처럼 아름다웠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육신과 날개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제 몸에 반쯤 파묻은 머리통 역시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용의 모습이 살아있는 용이라기보다는 화석처럼 보일 정도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의당 보여야 할 가슴의 기복조차 보이지 않는 용을 보며 김선혁의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설마… 내가 그 고생을 한 게 설마 유령이나 만나자고 한 거였어?”

황당한 가정이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용의 실체는 더 이상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 이게 무슨 거지같은….”

조금씩 강해지는 확신, 기껏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더니 막상 마주한 게 용의 시체라니 차라리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반려여. 너의 가당치 않은 생각에 마침내 오고야 만 약속의 그날, 응당 내가 누렸어야 할 감흥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구나.]

그때 용이 말을 걸어왔다.

“죽은 게 아니야?”

반색을 한 그가 용에게 물었다.

[육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대의 말 또한 틀리지 않으니, 약동하는 심장을 멈춰 세운 것은 나 스스로의 의지였노라.]

“맙소사. 심지어 자살이냐.”

지옥에서 천국으로, 그리고 다시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결국 죽었다는 거잖아.”

[하지만 심장을 멈춰 세운 것이 나 스스로의 의지였듯이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것 또한 나 스스로의 의지이리라.]

상식을 파괴하는 용의 말에 김선혁이 황당한 얼굴을 해 보이는데, 미동도 없던 용의 가슴께가 슬며시 부풀어 올랐다.

두근.

어디선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김선혁의 심장 역시 그에 맞추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반려여!]

공명하는 박동 속에서 용이 물었다.

[나 이 자리에서 묻노니 그대는 진정 그대와 나의 관계가 완전해지기를 바라는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그 순간 그를 둘러싼 세상이 통째로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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