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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약속의 그날 (1)
오필리아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황도를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속내까지 헤아렸는지 이별이 늦어질수록 재회 또한 늦어질 것이라며 제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김선혁은 그저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로 미안함을 표현하였다.
“준민아.”
날이 밟자 김선혁은 곧장 용사에게 연락하여, 오필리아와의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진짜 마계인지 뭔지만 아니었으면 제 선에서 어떻게 해보는 건데.]
용사는 중요한 상황이 올 때마다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는 듯했다. 명색이 마왕의 대적자인데 제 힘으로 전대 마왕을 처리하지도 못했고, 이번에도 또 한 번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니 그 풀죽은 음성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지금이야말로 너와 성검의 역할이 크다.”
교국에 머물고 있던 대다수의 신전 기사들과 사제들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는 현재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용사와 성검의 존재가 중요했다. 운 좋게 교국 밖에 나와 있던 소수의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만으로는 웨이브를 막아내는 것조차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전멸하다시피 한 지금 용사만이 유일하게 강력한 마(魔)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였다.
“버텨라. 준민아.”
김선혁은 의기소침해진 용사를 격려해주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라.”
[버틸게요. 제 레벨이 1까지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볼게요.]
전에 없이 비장한 용사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방어선의 상황이 영상으로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좋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중부로 날아가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단순히 조금 더 강한 초인 하나가 전선에 합류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정도로는 교국에 일어난 재앙은 끝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필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용사에게도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다.
통신을 종료한 김선혁은 당장 북쪽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준비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식량과 레드번에 채울 안장뿐, 그마저도 최대한 서두른 끝에 금세 준비가 되었다.
“다녀올게요.”
빅토리우스를 안고 마중 나온 오필리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철혈의 여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떨리는 눈빛을 숨길 수 없었는지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부디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범한 아내로서 그를 전송하는 것보다는 당당한 군주로 떠나보내는 것을 택했다.
“오필리아….”
그 모습이 더욱 안쓰러워 김선혁은 떠나기 전 그녀를 꼭 안아주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히 잘 있어요. 무리하지 말고요.”
마지막으로 눈조차 뜨지 못한 갓난아이를 보듬어 안아준 그가 레드번의 위에 올라탔다.
“약속할게요.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남아있지 않게 될 거예요.”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레드번 위에서 그가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레드번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나는 그런 것보다 그대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오.”
마침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레드번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필리아가 꼬물거리는 핏덩이를 꼭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바람이 찹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레인하르트 후작이 이끌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리라.
**
[오랜만이구나.]
김선혁이 황도의 하늘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보랏빛 빛무리가 뭉쳐든다 싶더니, 이내 작고 아름다운 아룡의 모습이 되었다.
나비의 그것을 닮은 날개와 신비로운 생김새, 페어리 드래곤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게하임니스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었다.
그저 전보다 한층 더 화려해진 날개와 새롭게 생겨난 양처럼 돌돌 말린 두 개의 뿔을 힐끗 쳐다본 게 다였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안 나타나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잠시 레드번을 멈춰 세운 그가 게하임니스에게 말했다.
“네 역할은 나를 용에게 안내하는 것이겠지.”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요정용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너를 그녀에게 안내할 거란다.]
“그렇겠지. 전부터 넌 늘상 그게 네 유일한 사명이라 말했으니까.”
일절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게하임니스가 우물쭈물거렸지만, 그는 음흉한 페어리 드래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뭐해? 안내하지 않고.”
턱으로 저 먼 북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게하임니스가 잠시 망설이다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김선혁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페어리 드래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와 계약하지 않을래?]
“계약? 계약이라면 벌써 했잖아.”
황도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가 자신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고, 중부에서는 용사와 수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귀환을 목 놓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페어리 드래곤이 엉뚱한 이야기로 시간을 끄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그런 가짜 계약 말고, 진짜 계약 말이야.]
“이제 와서?”
그의 태도가 시큰둥하기만 하자 게하임니스의 음성이 꿀을 바른 듯 달콤해졌다.
[사실상 너와 나의 관계는 그녀와 내가 맺은 계약으로 인한 것일뿐, 실질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 만약 네가 나와 진짜 계약을 맺는다면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단다. 나는 무식하게 힘만 센 다른 아룡들과는 다르거든.]
“그래?”
잠시 턱을 어루만진 그가 게하임니스를 보며 물었다.
“네가 줄 수 있는 게 용보다 많아?”
페어리 드래곤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영 안 땡기는데.”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을 파고드는 사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선혁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까지 간만 보다가 내가 용과 만날 것 같으니까, 진짜 계약을 하자고?”
페어리 드래곤이 다시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말이 더 빨랐다.
“너 나를 완전 바보로 아는구나.”
아마 예전이었다면 좋다고 덜컥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블루곤에게 대충 들었어.”
망가진 육신을 치료하기 위해 심해에 머문 시간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그는 블루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거만하고 솔직하지 못한 블루곤은 그다지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질문을 무시할 정도로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다.
“니들이 과거 무슨 죄를 지었는지까지는 몰라.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곤은 여전히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을 아꼈다. 그것 또한 그들이 받은 형벌 중 하나인 듯했다.
“이제 좀 니들이 원래 뭐였는지, 또 나로 인해 뭘 얻을 수 있는지는 좀 알 것 같다.”
페어리 드래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렸다.
“원래 좀 긴가민가했거든? 근데 니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이제 확신이 서네.”
그런 페어리 드래곤을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마침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용이지?”
그의 질문에 페어리 드래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지금까지 아룡들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아룡들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용을 닮아 있었으니까.
”준민이도 민영이도 세상에 찾기 힘든 강잔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더라고.”
인간 같지 않은 회복력과 성장속도를 가진 용사의 힘도, 수도 없이 많은 환수들을 불러내는 소환사의 힘도 분명 대륙에 적을 찾기 힘든 힘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에게 크게 특별함을 느낄 수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큰 격차의 레벨 차이를 극복하고 용사를 무릎 꿇린 적이 있었다. 그건 절대로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준민이나 민영이가 약한 게 아니었어.”
아니, 그들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강한 거였어.”
단지 자신이 지나치게 특별할 뿐이었다.
용을 만나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을 물리쳤을 때, 비로소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계약을 맺은 용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거야.”
처음으로 용의 목소리를 듣고도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마침내 알게 된 진실이었다.
“다섯 명의 용기병이 얻었어야 할 힘을 혼자서 독차지했으니, 그렇게 강할 수밖에.”
아룡들은 용과 만나기 전까지 잠시 힘을 보태주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각기 용기병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용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하도 다들 꼬락서니들이 비루해서 까맣게 몰랐지 뭐야.”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골드레이크, 완전한 미물이 되어버릴까 겁에 질려 있던 블루곤, 한낱 몬스터 사냥꾼 따위에게 포획되었던 레드번, 마기에 물들어 마룡이 되어버릴 뻔했던 레드웜까지. 어느 놈 하나 정상적인 놈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저 대단한 용과 같은 존재였을 줄은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거기까지다. 신비의 일족은 아직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그대와 이야기를 나눌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노라.]
게하임니스의 사념을 찍어 누를 듯 거대한 의지가 김선혁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용이었다.
[반려여. 그대가 원하는 진실을 모두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니, 그대는 멈춘 걸음을 내딛어 나에게 이르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그대는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었어. 게하임니스가 이상한 계약을 빌미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말이야.”
얄미울 정도로 당당한 그의 말에 용이 사념이 뚝, 하고 끊겼다. 페어리 드래곤이 몸을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사념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눈치였다.
[더 이상 그대의 걸음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용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안내해.”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채 마무리 짓지도 못했건만, 게하임니스는 감히 더 이상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용에게 뭔가 경고라도 들은 듯했다.
“안 갈 거야?”
그가 다시 한 번 재촉하니, 페어리 드래곤이 마지 못해 대답했다.
[안내할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 늘어져 있던 요정용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신비로운 보랏빛 빛무리가 퍼져 나와 하늘에 길을 만들었다.
[이 길을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 돼. 그녀에게 이르는 길은 단순히 빨리 난다고 해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페어리 드래곤이 레드번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자. 레드번.”
주인의 말에 레드번이 날개를 활짝 펴고는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흠….”
김선혁은 레드번의 안장에 몸을 기댄 채 슬쩍 게하임니스를 살펴보았다.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요정용이 축 늘어져 있으니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하지만 게하임니스의 제안을 쉽게 수락할 생각은 없었다.
계약을 받아들이더라도 최소한 음흉한 페어리 드래곤의 버릇을 고쳐놓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나중에 가서 제 버릇 못 고치고 진실을 누락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용하는 건 사양이었다.
잠시 페어리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빛의 길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 가깝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밀려가는 세상을 보며 김선혁은 용과 만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보랏빛 빛무리로 이어진 이 길이야말로 그의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 이정표였고, 그 끝에는 그가 그토록이나 만나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씩 선명해지는 용의 드높은 존재감에 숨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