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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88화 (28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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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끝나지 않는 전쟁 (3)

하늘이 온통 새카맸다. 햇빛조차 들지 않았다. 마치 사라지지 않는 밤이 세상에 도래한 듯한 광경이었다.

“신님. 신님. 부디 우리를 보살펴주세요.”

겁에 질린 사람들은 집을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신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 봐도 검은 연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은 짙어만 졌다.

기이한 날씨에 미쳐버린 것일까. 가축들이 주인을 습격하고, 산짐승들이 내려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사람들은 겁에 질린 와중에도 제 이웃을 땅 속 깊이 묻어주었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무덤은 며칠 만에 파헤쳐졌다.

밖에서 파낸 것이 아니었다. 무덤을 그리 만든 것은 무덤의 주인, 죽은 자들이 제 무덤을 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어어어.

그렇게 돌아온 사자들은 이웃들의 피와 살점으로 축제를 열었다. 그런 재앙이 대신전의 중심으로 퍼져나온 검은 연기 전역에서 벌어졌다.

해가 사라지고, 짐승이 미쳐 날뛴다. 죽은 자가 일어나 산 자의 피를 탐하고, 산 자들은 악몽과 광증에 시달린다.

그 모든 것들은 전조에 불과했다.

그러한 전조가 세상에 나타났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언젠가 서부가 멸망했을 때 그 직전의 모습이 딱 이러했다.

마왕과 오래도록 싸워온 사제들이 이 사실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바깥세상에 알리려고 했지만, 대신전의 명령을 받은 고지식한 국경 수비대의 인물들은 그들이 교국 밖으로 나서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전에서 그렇지 않아도 명이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대들과 같이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고, 미거한 종이 이를 막을 수 있도록 안배하셨다.”

군대의 지휘관들은 찾아온 이단의 죄를 물어 감금하고, 심하게는 처형하기까지 했다.

국경의 요새와 관문마다 시체가 내걸렸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 가다간 교국이 서부와 같은 꼴이 될 거야.”

통신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라도 있었으면 상황이 나았으련만, 하필 정서상 마법사가 활동하기 좋지 않은 교국인지라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전쟁 이전에 교국에 머물고 있던 소수의 마법사들도 전쟁이 벌어진 직후 대신전과 그 군대에 징집되어 완전히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국경을 뚫고 필사의 탈주를 벌이든가 한곳에 뭉쳐 재앙에 대항하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후자를 택했다. 철통같이 국경을 틀어막은 교국의 군대를 피하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신도들을 위해 어둠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신앙이 어둠을 밀어내는 가장 밝은 빛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국경의 군대와는 달리 교구를 수호하는 소수의 지휘관들과 군대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신이시여. 부디 저들이 너무 늦지 않게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사이 국경의 군대가 속히 미몽에서 벗어나 진실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다.

“저들만으로는 이 재앙을 막을 수 없어.”

모든 이들이 교국에 남아 싸우는 것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제들과 신도들 중에는 끝까지 탈출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도 있었고, 그들 중 몇이 운 좋게 교국의 국경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교국 내부에 일어난 끔찍한 재앙이 세상에 알려졌다.

“형님께서는 혼돈의 조각을 놓쳤다가는 언제고 서쪽에서 새로운 마왕이 탄생할까 몹시 염려하셨고, 그래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혼돈의 조각을 끝까지 추적하셨지. 하지만 형님께서는 결국 혼돈의 조각을 발견하지 못하셨다. 아무래도 그 사라진 혼돈의 조각이 이번에는 교국을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소식을 들은 용사 박준민은 단박에 교국에 일어난 일과 혼돈의 조각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든 왕국에 전문을 보내 새로운 마왕이 교국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라!”

그렇게 각국이 마왕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용사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초인들과 함께 교국의 국경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전승 대공께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필시 열 일을 마다하고 달려오실 겁니다.”

몇몇 이들이 용사를 만류했다. 더욱더 확실하게 재앙을 막으려면 한 번 마왕을 처치한 바가 있는 전승 대공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얼마 안 있어 형님의 아이가 태어난다지. 이번에도 형님께서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바로 직전에 주고받은 김선혁과의 전문에는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차마 아이의 출산을 앞둔 자신의 의형을 전장으로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나 혼자서 충분하다. 그때도 만약 대신전이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마왕을 끝장낼 수 있었을 거다.”

비록 과격한 구출의 과정에서 한 번 죽어 레벨 다운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제 막 권역을 넓히기 시작한 신출내기 마왕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자!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마왕의 숨통을 끊고 혼돈의 조각을 박살내 내가 그 대적자임을 증명하겠다!”

빠르게 교국으로 향할 인원이 추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만의 군세와 용사가 테네시아의 국경을 통과해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어디 갔나 했더니 교국에 있었나.”

바짝 굳은 얼굴을 한 김선혁의 손에 한 장의 마법 전문이 들려있었다.

[교국에 새로운 마왕 탄생, 마왕은 교황 또는 대주교들 중 하나로 추정.]

테네시아의 북부에서 날아온 전문이었다.

“이거 말고 또 다른 전문은 없는가.”

그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마법사가 한 장의 전문을 더 건네주었다.

[용사와 이만의 군세가 마왕을 타도하기 위해 북진.]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대해지는 마왕의 권능을 모를 리 없는 박준민이다. 그런 박준민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중부의 소식을 소상히 설명하라.”

여전히 굳은 얼굴은 한 김선혁이 명령하자, 처음 전문을 건네주었던 마법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끝까지 교국의 우방으로 남아있던 왕국들이 슬슬 발을 빼고 사태를 관망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차피 자국 내에 일어난 내란으로 사실상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겠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용사와 그 군대가 국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 경우라는 건 필시 교국에 마왕이 나타났다는 정황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중부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음….”

설명을 모두 마친 마법사가 자리를 떠나고 홀로 남은 김선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중부로 갈 건가?”

카랑카랑한 음성에 몸을 돌렸더니 언제 나타난 것인지 레인하르트 후작이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또다시 모든 걸 내팽개치고 중부로 날아갈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안 갑니다. 안 가.”

그런 후작에게 김선혁이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 마법사를 닦달하여 중부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던 모습에 비하면 너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무슨 내가 전쟁만 나면 미쳐서 날아가는 전쟁광인 줄 압니까?”

그의 대답이 의외인지 레인하르트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었나? 난 그간 전쟁이란 전쟁은 죄다 찾아다니길래 대공이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언제 내가 원해서 참전한 적 있습니까? 다 어쩌다 보니 휘말린 거지. 그나마 처음에 참전한 전쟁은 황실에서 시킨 거 아니었습니까?”

억울한 얼굴로 한참이나 떠들어대던 그를 보며 후작이 피식 웃었다.

“어쩌다 보니 휘말렸다라. 대공에게 패망한 놈들이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겠군. 자기를 가로막은 자가 우연히 지나가다 그리 한 거라니.”

사실 후작의 말마따나 그냥 어쩌다 보니 휘말렸다라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조금은 과했지만, 그거야 김선혁으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건 안 갑니다. 이제 곧 애가 태어날 테고, 폐하도 몸이 저런데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괜히 마음잡고 사는 사람 떠보지 말고 가서 할 일이나 하십시오. 거 황가 수호대의 수장께서 그리 할 일이 없으십니까.”

“거 일 못 하는 놈들이나 바쁜 척 하는 거지.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느긋해 보이는 법일세.”

제 딴에는 비꼰다고 한 말인데 후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런데 말일세.”

한참을 히히덕거리던 후작이 갑작스레 정색을 했다.

“대공이 중부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왕실 마법사를 닦달하는 걸 알고 있는 게 과연 나뿐일까.”

후작의 말에 김선혁이 알쏭달쏭한 얼굴을 해 보였다.

“황실에 들어오는 모든 긴급 전문들은 폐하께서 가장 먼저 열람하시지. 그 말은 폐하께서도 중부의 소식을 전부 알고 계실 거라는 말일세.”

뒤늦게 자신이 간과했던 사실을 깨달은 그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보게. 지금쯤이면 방랑벽 심한 대공이 또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속으로 앓고 계실 걸세.”

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선혁이 문을 부숴버릴 듯 뛰쳐나갔다.

**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대로였다.

무표정한 듯 보이는 오필리아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그늘이 져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지만, 매일같이 살을 부대끼고 사는 김선혁이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폐하.”

“왔소?”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맞아주는 오필리아를 보며 그가 시녀들에게 눈짓을 했다.

스윽.

눈치 빠른 시녀들이 물러나고, 잠시 망설이던 호위 기사들도 뒤늦게 거리를 벌렸다.

“저 안 가요.”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자 김선혁이 대뜸 말했다.

“약속했잖아요. 절대로 갑자기 떠나지도, 오필리아의 허락 없이 어디를 가지도 않는다고.”

그 말에 오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더니, 핀잔이라도 하듯 말했다.

“누가 뭐라고 했소?”

말은 그리 하면서도 그늘졌던 그녀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중부의 상황이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용사가 교국의 국경에 당도했을 즈음에는 이미 대신전에서 퍼져 나온 검은 연기가 교국 너머까지 영역을 넓힌 후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속도, 하지만 그보다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분명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과거 마왕이 지배했던 땅도 저리 어둠이 짙지는 않았다. 마치 세상의 한 귀퉁이를 칼로 툭 잘라내 낮과 밤으로 나눈 듯 선명한 경계 저 너머는 완전한 암흑천지였다.

우우우웅.

아직 경계를 넘지도 않았건만, 성검이 몸을 떨며 찬란한 빛을 뿌렸다.

[저건 단순한 파편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시 둘 이상의 파편이 저 곳에 존재할 것이다.]

“뭐? 혼돈의 조각이 하나가 아니야?”

[애당초 혼돈이 잘게 쪼개져 나뉘지 않았다면 조각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용사가 다시 한 번 어둠을 노려보았다.

[하나 이상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저 어둠은 이 세상의 어둠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 이미 저곳은 인세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 되었다.]

“그럼 저기가 지옥이라도 된다는 거야?”

[지옥이라…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끔찍하게도 성검은 용사의 비유를 부정하지 않았다.

[악마들이 살아가는 마계라면 지옥과 그리 다르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든 마왕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 안달이 나 있던 과거와는 달리 성검은 제 주인이 어둠에 발을 들이는 것을 만류했다.

[혼자서는 무리다. 용의 반려의 도움이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전에 보았던 환계의 문지기도 함께면 더욱 좋겠지. 아니, 그들뿐 아니라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전부 청하거라.]

용사는 망설였지만, 결국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성검이 전에 없이 신중하게 어둠의 위험성을 강조하니 감히 혼자서 어둠 속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용사 박준민이 그렇게 어둠과 마주했을 때, 아덴버그 제국의 황성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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