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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끝나지 않는 전쟁 (2)
더 없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룡의 기운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오필리아의 눈치부터 살폈다. 워낙에 지은 죄가 많다 보니 또 황도를 나서야 한다고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룡이 돌아왔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데리러 가야 하는데….”
“다녀와도 좋소.”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니, 물끄러미 시선을 던져오던 오필리아가 짧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돌아누웠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래도 막을 생각은 없는지 별다른 말이 없는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며 김선혁은 주섬주섬 외투를 걸쳤다.
“금방 다녀올게요.”
인사를 남긴 그가 침실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동이 틀 때까지.”
앞뒤 다 잘라낸 그녀의 말이었지만, 그 뜻을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선혁은 창밖에 떠오른 달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곧장 황성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
쉬지 않고 말을 내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김선혁은 보이지 않는 아룡의 모습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쳐들었다.
잔뜩 구름 낀 하늘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 너머에는 아룡이 있었다. 마왕과의 전투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레드번이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콰아아아.
저 높은 하늘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을 가르며 붉은 아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번!”
다른 아룡들과는 다르게 레드번의 생김새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덩치가 약간 커졌다는 것과 한 쌍이었던 날개가 두 쌍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마에 돋아난 날카로운 뿔뿐이었다.
빼에에에에엑.
심지어 다소 경망스러운 그 포효마저도 그가 기억하는 레드번 그대로였다.
“레드번!”
다시 한 번 더 그 반가운 이름을 부르니, 레드번이 내리꽂히듯 날아와 과격하게 그 앞에 착지했다.
빽. 빽. 빼애애액.
가슴을 펴고 빳빳하게 목을 세운 모습이 마치 뭔가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엄청 멋있어졌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른 아룡들에 비해 조금은 부실해 보이던 기존의 모습에 한 쌍의 날개와 창처럼 긴 뿔이 추가되니 그 모습이 그렇게 강인해 보일 수가 없었다.
빼애액.
그의 말에 레드번이 더욱더 목을 치켜들며 거들먹거렸다.
“어? 근데 너는 왜 말 안 해?”
다시 돌아온 골드레이크와 블루곤은 모두 하나같이 유창한 인간의 언어로 주인을 반겨주었다. 유독 레드번만이 빽빽대며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니, 그게 못내 이상했다.
멀뚱. 멀뚱.
레드번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저 반가움 가득한 눈빛만을 보내 왔을 뿐이었다.
“너 몸은 변했는데, 그 머리는 안 변했구나.”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에 레드번이 세차게 고개를 털더니 뿔이 길게 자라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머리 말고, 다른 머리….”
빽?
한결같은 레드번의 모습에 김선혁도 결국은 웃고 말았다.
“그래. 머리 좀 나쁘면 어때. 어차피 처음부터 좋지도 않았던 머리였는데, 이제 와서 달라질 것도 없지.”
주인이 웃자 레드번이 덩달아 입을 벌리고 꺅꺅거렸다.
그런 레드번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어 보인 김선혁이 등 위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날아보자.”
말귀가 어두운 레드번도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지체 없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으윽.”
무지막지한 상승 속도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고, 시야가 뿌옇게 바랬다.
뒤이어 끔찍한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장기가 제자리를 이탈해 저 아래에 처박히고, 온몸의 피가 모조리 발끝에 쏠린 듯한 기분이었다.
김선혁은 눈이 튀어나와라 부릅뜨고 무지막지한 중력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짓누르던 비정상적인 중압감이 사라졌다.
“뭐가 이렇게 빨라.”
잠깐 사이에 까마득하게 멀어진 지상을 보며 그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건 명백한 실수였다.
빼액.
그의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레드번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
두 쌍의 날개가 한 차례 퍼덕이니 순식간에 세상이 뒤로 밀려나갔다.
“으어어어어.”
그 어마어마한 속도에 깜짝 놀란 그가 기함을 지르는데, 레드번의 더욱더 과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레드번이 고분고분해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때쯤 김선혁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으… 일단 좀 내려가자.”
처음에는 그대로 레드번을 타고 황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잠깐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빽.
다행스럽게도 멋대로 창공을 누비던 레드번도 이번만큼은 주인의 말을 따라주었고, 그는 간신히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빡.
바닥에 내려선 김선혁은 다짜고짜 레드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안장도 없었는데!”
아무리 창공의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지닌 그라고 해도 잡을 곳도 마땅치 않은 레드번의 위에서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드번의 비행 능력은 과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고, 또 그만큼 기수에게 가해지는 부담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마치 처음 레드번과 함께 창공을 질주했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정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끙. 아무래도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네.”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한마디에 레드번이 빽빽거렸다.
팩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리고 발을 굴러대는 모습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참으로 한결같은 레드번이었다.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토라진 레드번을 달래고는 다시 그 등 위로 올라탔다.
“천천히. 천천히.”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멋대로 폭주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천천히이이으악!”
하지만 머리 나쁜 아룡은 방금 전에 혼났던 것을 금세 잊고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야이! 돌대가리야!”
레드번이 사라진 자리에 비명만이 남아 맴돌다 그마저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
김선혁이 레드번과의 재회를 만끽하는 동안에도 중부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전선을 돌며 기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 용사의 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신도들은 대신전의 악행을 강하게 비난했고, 심지어 그 존재마저 부정하였다.
교국과 대신전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대신전은 온갖 해괴한 변명을 해대며 그들의 비난을 반박했지만, 이미 용사가 스스로를 입증한 이상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통할 리 없었다.
“대신전이야말로 마왕과 결탁한 배신자들이다.”
대신전이 김선혁에게 덮어씌웠던 누명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왔고, 그 즈음에는 교국을 따르던 중부 왕국들의 결속력은 온데간데없이 된 후였다.
급기야 중부는 용사를 지지하는 남부의 왕국들과 교국을 지지하는 북부의 왕국들로 갈라지고 말았다.
교국의 입장에서야 당장에라도 용사와 용사를 따르는 왕국들을 불살라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굳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길 리 없는 여론전을 펼치는 건, 아스라엘을 완전히 점령하여 교두보로 삼은 아덴버그 제국의 정병들이 여전히 중부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중부 왕국들의 국경에 전개된 동부 왕국 연맹의 병력들 역시 언제든 틈을 노려 진군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으니, 교국으로서는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용사의 세력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나날이 기울어가는 교국의 위세, 설상가상으로 교국을 지지하던 왕국들이 내란에 휩싸였다. 교국을 위해 자국의 인재를 소모하는 왕실에 쌓여왔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교국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줄 우방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고, 사람들은 머지않아 대신전이 백기를 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대신전의 인사들을 솎아내는 것으로 얼마든지 과거의 교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누가 뭐라고 해도 중부 전체에 퍼진 신앙의 중심에 교국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교국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그렇다고 백기를 내걸지도 않았다.
이제껏 해오던 궁색한 여론전도 멈춘 채, 기이한 침묵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교국의 모습이 그러했을 뿐이었다.
국경을 완전히 폐쇄한 교국 내부의 사정은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라 안팎에 퍼진 소문에 신도들이 동요하고 있어, 저희 종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부디 교황 성하께서 이 모든 미혹을 떨칠 수 있게 해주소서.”
대신전의 수뇌부는 썩을 대로 썩었지만, 그 아래의 사제들까지 전부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청렴하고 신실한 사제들은 뒤늦게 외부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대신전에 몰려들었다.
“저는 교황 성하와 대주교들께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대신전의 침묵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침묵하고 계신 탓에 더욱더 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제들은 무례하지 않게 간곡한 태도로 교황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대신전은 그들을 신전 내로 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 할 답변을 주지도 않았다. 대신전은 철저하게 사제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발 늦게 지방의 주교들이 도착했다.
“카스트라의 베넬리스요. 나는 반드시 교황 성하를 뵈어야겠소.”
대주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주교들 역시 하나의 교구를 책임지는 고위 성직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로 교황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대신전 앞 중앙 광장을 개방하겠소. 교황 성하께서 직접 여러 형제들께서 원하시는 답을 드리겠다 말씀하셨으니, 의혹이 있는 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하여 성하의 말씀을 들으시오.”
“오오! 드디어!”
“오늘이야말로 항간에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지겠군요.”
“부디 미거한 종이 지금이나마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진실을 알고자 대신전에 모여든 수백의 사제들과 주교들이 안내를 따라 광장으로 향했다.
“교황 성하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막상 광장 안에 들어섰는데 교황이 나타나지 않자, 지방에서 올라온 주교들 중 하나가 안내자에게 물었다.
“음?”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하던 안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제들이 의아해했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교황이 나타나 자신들의 의문을 풀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순진하고 선량한 성직자들의 믿음은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가장 끔찍한 대답으로 돌아왔다.
핑.
갑작스레 날아든 한 줄기 파공성에 어리둥절해 하던 사제들 중 하나가 이질적인 감촉에 가슴 어림을 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심장 어림을 파고들어 있었다.
“아아아….”
조금씩 번져가는 붉은 얼룩, 곁에 있던 사제들이 하얗게 질려 회복의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사제의 가슴에 난 상처를 미처 다 치유하기도 전에 퍼져 나오던 성광이 꺼져버렸다.
“악!”
방금까지만 해도 회복술을 펼치고 있던 사제들의 몸에도 가엾은 희생자의 몸에 박힌 것과 똑같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화살 비가 떨어져 내렸다.
“악!”
곳곳에서 비명이 이어지고 무고한 사제들이 죽음을 당했다.
“아. 이게 대체….”
평생을 신도들을 돌보며 살아왔던 순박한 사제들은 신성력을 이용해 날아드는 화살 비를 막을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울고 기도하고 그렇게 죽어갔다.
대신전에 모여든 수백의 사제들중 살아남은 이들은 수십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한발 늦게 모습을 드러낸 성전사들의 창과 검에 찔려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대체 저들이 무슨 죄가 있었기에….”
살아남은 주교 하나가 피눈물을 흘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붉게 눈이 충혈된 성전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 묻은 창과 칼을 꼬나쥔 채 주교를 둘러쌌을 뿐이다.
“신이시여. 저들을 굽어살펴주소서….”
주교는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대신 가만히 무릎 꿇고 기도했다.
무고하게 죽어간 수백의 사제들에 대한 애도와 그들을 학살한 살인마들에 대한 연민이 담긴 경건한 기도, 하지만 그 성스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성전사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주교마저 열 개의 창에 온몸이 꿰뚫려 목숨을 잃고 나서야 학살은 끝이 났다.
그리고 살아생전 신의 뜻을 받들며 신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제들은 죽어서 쓰레기처럼 한데 모여 정화라는 명목으로 소각되었다.
시체 태우는 연기가 하늘 끝까지 피어올랐다. 역겨운 악취가 사방 수십 킬로미터까지 퍼져 나갔다. 그 연기와 악취가 어찌나 짙고 고약하던지, 대신전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도 까맣고 냄새나는 재가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그중에 호기심 많은 몇몇 신도들이 대신전을 찾아 악취 나는 연기의 원인을 확인하겠다며 마을을 나섰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나도 마을을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뭘 태우고 있길래….”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검은 연기를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검은 연기는 사그라들기는커녕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짙어졌다.
처음 불길이 피어오르고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에는 대신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사방 수십 킬로미터의 하늘을 가릴 지경이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저 연기가 몹시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의 머리 바로 위까지 검은 연기가 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