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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폭풍처럼 (5)
꾸물거리며 몸을 불려 나가는 점액질 괴물이 요새의 한쪽 성벽을 집어삼켰다.
“끄아아아!”
“사, 살려줘!”
성벽을 지키고 있던 수도 없이 많은 병사들이 역겨운 빛깔의 파도에 휩쓸려 뼈조차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마법사! 마법사!”
운 좋게 점액질의 파도를 피해낸 한 장교가 고래고래 악을 써대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하늘을 바다처럼 누비고 다니는 거대한 고래, 수백 개의 촉수를 늘어트린 흉물스러운 해파리,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주둥이가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머리통뿐인 괴물, 생전 본 적 없는 흉측한 무늬를 한 거대 거미, 하늘에 생겨난 거대한 구멍을 통해 온갖 기기괴괴(奇奇怪怪)한 생명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입구라도 열린 듯한 광경이었다.
“이건 꿈일 거야.”
그 끔찍한 광경에 완전히 넋을 잃은 장교가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괴물 중 하나가 달려들어 멍하니 앉은 장교를 집어삼켰다.
그런 장면이 요새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보라! 드라흔이 마왕과 결탁한 증거가 바로 저 끔찍한 마수들이로다!”
멀리서 요새에 불어닥친 끔찍한 재앙을 지켜보고 있던 이단심판관이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드라흔은 마왕 그 자체일지니, 형제들은 손속에 조금의 사정도 두어서는 안 되리라!”
광기에 사로잡힌 이단심판관은 이제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거짓된 정의에 도취되어 주변을 선동해대고 있었다.
“참으로 답답하구나. 지금에 와서 그딴 게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강제로 차출되어 이곳까지 오게 된 중부 왕국의 노기사 하나가 그 모습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데 연연해 하는 이단심판관의 모습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후.”
잠시 이단심판관을 노려보던 노기사가 전장을 둘러보았다.
마왕이 도래한 이후로 수도 없이 많은 전투에 나서 온갖 기이한 꼴을 다 봤노라 자부하는 노기사였지만, 장담하건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전장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신화 속 전장 한가운데라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이 놀라운 광경을 감상하고만 있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노기사는 어깨 아래부터 통째로 잘려나간 팔뚝을 지혈하고는 반대편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하오.”
파리한 얼굴로나마 다시금 투지를 불태우는 노기사를 본 상대가 겨누었던 검을 거두어들였다.
“이미 승부는 나지 않았는가.”
“승부라….”
상대의 말에 노기사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방의 기마대는 마치 양 떼를 몰 듯 교국의 정예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드라흔과 아룡들은 거침없이 신전 기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뒤에서 교국군을 떠받쳐주던 성가대와 사제단은 소리 없이 날아든 화살에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확실히 승패가 정해지긴 했구려.”
기사로서도 처참하게 패배했고, 전투에서도 결과가 그리 다르게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계속할 텐가.”
상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노기사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애초에 원해서 온 것도 아닌 마당에 굳이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겠지.”
“현명한 선택이군.”
노기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졸렬한 변명 같지만, 이곳에서 죽기에는 본국의 미래가 너무 걱정되어서 말이오.”
교국이 작정하고 판 함정을 너무도 손쉽게 박살낸 아덴버그 제국의 저력을 보건대, 제국의 힘은 이미 교국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각기 중부와 동부를 대표하는 맹주국들의 우열이 이리도 분명하니, 이번 전쟁에서 중부가 동부를 이기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을 뿐, 노기사는 패전을 확신했다.
다른 초인들 역시 노기사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애초에 원해서 온 것도 아닌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는 대신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는 것이, 언제든 승패가 갈리면 망설이지 않고 발을 빼낼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광이 난무하던 외곽 전장에는 다소 맥 빠진 철검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노기사가 검을 거두어들인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멈춰버렸다.
“아덴버그 제국의 저력이 실로 놀랍구려.”
노기사가 감탄을 내뱉었다.
비록 원치 않아 끌려온 전장이지만, 처음부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초인들 중에 죽은 이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름이 알고 싶소.”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눈앞의 상대였다.
“마렉 슈나일 로아힘. 제국의 공작이지.”
승리감조차 보이지 않는 덤덤한 말투에 노기사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로아힘 공 덕분에 아덴버그의 인물이 오로지 드라흔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공의 검은 내가 겪어본 그 어떤 기사의 검보다 드높은 것이었소.”
“그대 역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말로는 칭찬하면서도 이름조차 묻지 않은 것을 보면 나쁜 상대는 아니었어도 그다지 기억하고 싶은 상대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광이오.”
아마 다른 때였다면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노기사는 그저 허허롭게 웃어보였을 뿐이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
제국의 공작이 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기사 역시 고개를 돌려 전세를 확인해보았다.
승냥이처럼 주변을 맴돌며 이리 뜯고 저리 뜯어대는 북방의 기마대에게 시달린 교국의 일만 성전사단은 완전히 대열이 무너져 있었고, 평소 그들이 그토록이나 자랑하던 엄정한 군기와 강력한 밀집력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톡 치면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연합군의 삼만 군세는 전장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중앙에서 날뛰어대는 푸른 아룡이 교묘하게 그들과 교국의 군대 사이를 가로막은 탓이었다.
그들은 감히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아룡을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멍하니 신전 기사들과 드라흔의 전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검을 겨룰 게 아니라면, 가서 조금 돕고 싶군. 혼자서도 충분해 보이지만, 혹시라도 저 친구가 다쳤다간 감당하기가 힘들어지거든.”
“가보시오. 나도 피를 너무 흘렸더니, 이제 좀 쉬어야겠소.”
“그럼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보도록 하지.”
훽하니 몸을 돌린 마렉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던가.”
이쪽은 필사적이었는데, 저쪽은 여력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신전 기사들의 단단한 대열을 유린하는 마렉의 모습 그 어디에도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힘이 남은 자는 나와 함께 대공을 돕는다!”
절도 있는 여기사의 호령에 제국의 초인들이 하나둘 일어나 대열을 꾸렸다. 잠깐의 대결로 꽤나 기력을 소진한 중부의 초인들과는 다르게 꽤나 체력에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 저리 하나같이 젊을까.”
강하지만 늙어버린 중부의 강자들과 그보다는 못하지만 젊고 패기 넘치는 제국의 기사들, 어느 쪽의 미래가 더 밝은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자! 대장을 도우러!”
“김우영은 빠져! 팔뚝이 아주 덜렁거리는구만!”
“닥쳐! 이깟 부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놈들이야말로 빠지려면 지금 빠져!”
“서부의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깟 곳에서 죽을까 봐. 너나 똑바로 해!”
당장 생사가 오고 가는 전장으로 향할 이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태도, 노기사는 뒤늦게 그들이 점잖기만 한 대륙의 기사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기질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방인….”
저들 중 다수가 출신이 불분명해 중용 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대륙은 아덴버그 제국의 눈치를 보게 되리라.”
이방인이라는 또 하나의 미래를 품은 아덴버그 제국의 앞날을 떠올린 노기사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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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사의 예상대로 교국은 패배했다.
일만의 성전사단은 북방의 기마대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고, 믿었던 성가대는 소리 높여 성가를 부르기도 전에 저격수에게 모조리 살해당했다.
신전 기사들도 그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팔백 명에 달했던 신전 기사들 중 살아남은 것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교국이 자랑하던 강력한 기사단의 절반이 날아갔으니, 이보다 처참한 패배는 교국이 중부의 패자로 떠오른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패배가 크다고 한들 한 번의 패전이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교국은 여전히 강력한 신전 기사들과 사제단을 거느린 중부의 맹주였다. 대신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한 신을 섬기는 중부의 많은 왕실들은 교국을 지지하고 있었고, 교국은 그들을 충동질해 전쟁을 이어나갈 저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도 용사가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전투가 끝난 직후, 김선혁은 용사를 내세워 교국의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미 수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패퇴한 교국과 중부 연합군과는 달리 중부의 초인들은 전장을 떠나지 않았고, 그들이 직접 용사의 존재를 보고 그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용사의 증언이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자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강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발언이 가져오는 파급력은 적지 않았다.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 그 자는 용사도 아니고, 성검을 도둑질한 도적에 불과하다.”
교국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장 주인 외에는 다룰 수 없다는 성검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주인임을 주장하는 자가 교국의 악행을 증언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흔이 마왕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교국을 비난했다.
“행여라도 드라흔과 그 일당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혹세무민하는 자가 있다면, 친히 이적 행위의 죄를 묻겠다.”
급기야 교국은 억지로 소문을 틀어막으려 했다. 곳곳에서 이단으로 몰린 이들이 화형의 벌을 받았다. 희생자들을 태우는 연기가 온 중부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
부활의 후유증을 이겨낸 용사 박준민이 중부 연합군과 이베리아가 대치 중인 국경에 나타나 성검의 기적을 선보인 것이다.
하늘 끝까지 치솟은 거룩한 광휘를 목격한 교국의 사제들과 신도들이 대신전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대신전은 그들마저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하지만 용사 박준민은 그런 교국을 비웃듯 보란 듯이 전선을 돌며 기적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병력을 움직여 용사의 행렬을 공격해보았지만, 용사를 호위하던 아덴버그 제국군에 전공만 보태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선의 병사와 민간인들 중 기적을 목도하지 못한 이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테네시아 왕국이 중부의 왕국들 중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대신전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테네시아는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전쟁에 손을 보태지 않겠다. 또한 거짓된 명분으로 아국을 충동질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만든 교국에 그 책임을 묻겠다.”
중부 왕국들의 공고한 결속이 처음으로 깨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용사가 전선을 돌며 교국의 악행을 알리는 동안 김선혁은 아덴버그로 귀환하였다. 잠시 다녀오겠다 말하고선 무려 반년이나 제국 밖을 떠돌던 불성실한 남편의 귀환이었다.
“아예 전쟁을 다 끝내고 오시지 그러셨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싸늘한 표정을 한 철혈의 여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