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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폭풍처럼 (4)
교국의 강압에 못 이겨 테네시아 왕국의 국경에 배치된 각 왕국의 최강자들은 설마 했던 드라흔이 정말로 약속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마기는커녕, 한 점 사특한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정명한 기운이로다.”
이미 경지에 오른 초인들이기에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정명하기만 한 기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교국과 전승 대공 중 어느 쪽이 거짓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안타깝구나. 만약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필시 좋은 인연이 되었을 텐데.”
“일세의 영웅과 이리 불편한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다니, 새삼 왕실과 교국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힌 것인지 교국의 요구에 왕국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마저 내준 왕실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초인들은 오십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당당히 그 열 배가 넘는 적 앞에 나타난 드라흔을 향해 제 나름대로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들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대공은 아국의 말이 우스웠던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 오라는 말을 듣고도 이리 수하들을 끌고 왔을 리가 없지. 그게 아니면 혼자 오기에는 너무 무서웠던 거요?”
“사악한 이단이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 너무 책하지 마시게.”
새처럼 주둥이가 뾰족 튀어나온 철가면을 쓴 사내들이 낄낄대며 조롱을 해댔다.
교국의 숨겨진 힘이라 불리는 이단심판관 무리였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용사를 암습한 범인들이기도 했다.
“헛소리 말고, 여기까지 직접 와줬다는 데 감사하기나 해라. 새대가리들아.”
어지간한 기사라면 모욕감에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을 조롱에도 드라흔은 너무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어조가 제 발로 사지를 찾아온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그 입심 또한 걸물이로다.”
그렇지 않아도 긍지 높은 기사에 대한 존중 따위는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단심판관들의 태도에 속이 부글대던 중부 왕국의 초인들이 저마다 한마디를 내뱉었다.
“대공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지금 대공이 그리 꼿꼿하게 나올 때가 아닐 텐데.”
하지만 이단심판관들 역시 태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칼자루를 쥔 것이 자신들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태도였다.
“그거야 내가 판단할 일이고.”
드라흔은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 위험을 감수하고 함정을 찾아온 이답지 않은 여유였다.
“대공과 같은 자들을 많이 봤지. 이단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제 몸에 송곳이 꽂히고 바늘이 들어가야 참회의 눈물을 흘리더군.”
그 꼿꼿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단심판관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쇳소리처럼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명색이 신을 모시는 자들이라는 놈들이 말본새는 시장통의 삼류 양아치만도 못하니, 주둥이를 나불거릴 때마다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이단심판관들은 예상과는 달리 상대가 도무지 굽힐 줄 모르자, 다소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대공이 왜 이 자리에 온 것인지 상기시켜줘야겠군.”
철컹.
이단심판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쭉 끌려왔다.
**
쇠사슬에 질질 끌려 나온 역겨운 고깃덩어리, 김선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우우우웅.
직접 눈으로 보고도 아니라고 부정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철검이 요란하게 몸을 떨며 그의 소망을 처참히 부숴버렸다.
검붉은 얼룩이 잔뜩 묻은 넝마로 이곳저곳을 가렸지만, 그건 분명히 인간의 육신이었다. 그것도 그가 잘 아는 인간의 것이었다.
성검 발뭉이 공명하는 인간, 용사 박준민이 분명했다.
“기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걸. 꼴이 이래도 살아있기는 하거든. 그런데 대공이 자꾸 그런 태도를 보이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이단심판관이 장난스레 쇠사슬을 이리저리 끌어댈 때마다 용사의 육신이 볼썽사납게 질질 끌려 다녔다.
그 처참한 꼴을 보고 나니 불길이라도 들이마신 듯 뜨겁기만 하던 가슴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네가 믿는 건 뭐지?”
난데없는 그의 질문에 이단심판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들이 떠받드는 그 알량한 신인가.”
그런 이단심판관을 보며 김선혁이 한 발 내딛었다.
“잠….”
“그도 아니면 네 뒤에 늘어선 신전 기사들과 중부의 기사들인가.”
이단심판관이 쇠사슬을 끌어당기며 위협을 했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하라. 감히 너 따위가 내 앞에서 그리 고개를 들고 설 수 있는 이유가 뭔가.”
“이게 보이지 않….”
푸줏간의 고기를 내보이듯 용사의 육신을 끌어당겨 달랑달랑 흔들어보이는 이단심판관의 태도에 그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죽지 못해 간신히 숨만 붙은 그가 네놈이 믿는 것이로구나.”
이쯤 되자 이단심판관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비명처럼 외쳤다.
“마, 막아라!”
하지만 이단심판관의 명령을 받은 신전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김선혁 쪽이 빨랐다.
쐬에에엑!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검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날았다.
“사악한 이단의 단도는 충실한 종의 옷자락조차 벨 수 없을 지어다!”
기겁을 한 이단심판관이 성구를 외며 희뿌연 방어막을 둘렀다.
“어딜 감히!”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건재한 방어막을 보고 안도한 이단심판관이 기고만장해서 외쳤다.
“그 따위 비겁한 기습이 통할 성 싶….”
시끄럽게 입을 놀려대던 이단심판관이 뒤늦게 발치를 보았다. 다급한 나머지 내팽개치다시피 한 용사의 몸뚱이가 다소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내팽개쳐진 용사의 몸뚱이에 한 자루 철검이 박혀 있었다.
힘겹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던 용사의 가슴께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단심판관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같지도 않은 인질극을 하려면, 최소한 인질이 어떤 놈인지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해야지.”
김선혁이 이단심판관을 향해 말했다.
“준민이 저 놈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거든.”
그의 말에 이단심판관은 혼란이 더 가중됐는지,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허둥지둥하였다.
“그게 무슨….”
“무슨 말이냐고?”
그 순간 용사의 가슴께를 파고든 철검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죽지도 않는 놈을 데리고 무슨 인질극이냐는 말이다.”
“설마!”
이단심판관이 뒤늦게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용사를 향해 달려갔다. 다급하게 내뻗은 손이 철검에 닿을 듯 다가갔다.
하지만 철검을 감싼 거룩한 광휘는 피 묻은 이단심판관의 손길을 너무도 쉽게 밀어냈다.
“검을 뽑아!”
그 비명과도 같은 고함에 다른 이단심판관들도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성스러운 섬광에 떠밀려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아아….”
빛무리에 감싸여 천천히 떠오르는 용사의 시체를 본 이단심판관이 뒷걸음질을 치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이단심판관의 눈에 넝마처럼 변해버렸던 시체가 서서히 재생되는 모습이 보였다.
검게 피딱지가 내려앉았던 피부가 벗겨지고 그 아래서 뽀얀 새살이 돋아났다. 잘려나갔던 사지의 단면이 흉물스럽게 꾸물거리더니 새로운 팔과 다리가 돋아났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괴한 모습, 시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 되었다.
스윽.
가슴을 깊게 파고든 검이 서서히 밀려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턱.
철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직전, 새하얀 손이 덥석 그 손잡이를 잡아챘다. 그리고 다른 손이 머리를 뒤덮은 검붉은 헝겊을 벗겨냈다.
“푸하!”
폐부에서 터져 나오는 시원한 숨소리와 함께 절명했다 생각했던 용사가 되살아났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준민아.”
심장이 멎어버린 시체가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김선혁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여댔다.
용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더 숨을 몰아쉬어 댔을 뿐이었다.
“내가 왜….”
초점 없던 눈동자에 마침내 생기가 돌아오고,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그만큼이나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용사에게 김선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준민아! 조심!”
언제 다가온 것인지 튕겨져 나갔던 이단심판관들이 일제히 용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고오오오.
사그라들었던 성광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맞아. 서부에서 마왕을 추격하다 돌아오는 길에….”
용사의 몸을 난도질할 듯 짓쳐들었던 검과 철퇴가 섬광에 밀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밀려났다.
“아군의 손에….”
그 사이에 용케 광휘를 뚫고 들어온 손 한 쌍이 발뭉을 낚아챌 듯 달려들었다.
번쩍.
생기 없이 죽어 있던 용사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성검을 반쯤 잡아챘던 이단심판관의 손이 새하얀 성화에 휘말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타들어갔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용사 박준민이 죽음에서 마침내 돌아왔다.
**
“뭣들 하는 거요! 당장 저 자를 막아야 하오!”
이단심판관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중부 왕국의 초인들과 신전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지 모르겠지만, 필시 범상한 자는 아니겠지. 하지만 내 입장이 이러니, 부디 양해해주시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용사를 제압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
“잠깐. 그대들의 상대는 이쪽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용사와 그들 사이를 막은 이들이 있었다. 드라흔을 따라 나타난 오십 명의 인물들이었다.
“마렉 슈나일 로아힘이다. 귀하의 상대로 부족함은 없으리라.”
“아샤 트레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상대해드리겠소.”
“마검사 김우영….”
그냥 어중이떠중이 기사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어느 왕국에 던져 놓아도 수위에 놓일 초인들이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부의 왕국들이 고르고 골라 보낸 초인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좋은 상대로다!”
그렇지 않아도 교국의 행사가 마치 인질극처럼 보여 영 마음이 거북스럽던 중부의 초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를 찾아 검을 뽑아들었다.
“뭣들 하는 거요! 당장 저 자를 제압하고 저 사악한 마검을 빼앗아야….”
“이거 참. 상대가 만만치 않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구려. 하지만 걱정 마시오. 내 명예를 걸고 눈앞의 상대라도 교국의 행사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반드시 막아 보일 테니.”
이단심판관이 고래고래 악을 써댔지만, 진즉부터 심사가 뒤틀려 있던 중부의 초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신전 기사단! 성가대!”
이단심판관들이 뒤늦게 신전 기사들을 호명했다. 다른 왕국의 초인들과는 달리 교국의 초인들은 충실히 그 명을 이행했다.
“그래. 다 한통속이었지.”
그 모습을 본 용사 박준민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망이 번뜩였다.
“으윽.”
당장에라도 검을 떨쳐낼 듯 사납게 손잡이를 움켜잡았던 용사가 갑작스레 비틀거렸다.
“장하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김선혁이 달려와 용사를 부축해주었다.
“혀, 형님….”
서러움이 복 받힌 얼굴을 본 그가 가만히 한마디를 해주었다.
“용케도 네 능력을 교국에 말해주지 않았구나.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텨주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어요. 그랬으면 더 아프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저 끝까지 버텼어요.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려도 끝까지.”
“그래. 다 안다. 다 알아.”
몸이 아픈 것인지 자신이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마음이 아픈 것인지, 용사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이 싸움 나한테 맡기고 쉬어라.”
그런 용사를 보며 김선혁이 부드럽게 한마디를 해주었다.
하지만 훈풍과도 같았던 음성은 오로지 제 의동생을 대할 때뿐이었다.
“서몬 드래곤.”
어느새 서릿발처럼 차가워진 음성이 가장 강력한 우군을 불러냈다. 푸른빛과 함께 블루곤이, 누런 섬광과 함께 골드레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저들은 소수다! 전력으로 몰아붙이면 저들도 당해낼 수….”
여전히 사태파악을 하지 못한 이단심판관이 고래고래 악을 쓰다 입을 다물었다.
두두두두.
힘차게 바닥을 구르는 아룡들의 발소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기마대 접근 중!”
“뭐라! 이 근방에는 분명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단심판관이 히스테릭한 음성으로 수하를 다그치다 황급히 물었다.
“적의 정체는! 그 수는 얼마고, 대체 어디의 어떤 놈들이라더냐!”
“적 기마대 일천, 아무래도 북방의 기마대 같습니다!”
“국경 수비대는!”
“이미 돌파당했습니다!”
일이 틀어졌지만 여전히 유리한 것은 교국이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를 용사는 부활의 후유증인지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고 있었고, 드라흔이 한꺼번에 두 마리나 되는 아룡들을 불러냈다고 한들 각국에서 징발한 이백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곳에는 일만의 성전사와 삼만의 중부 연합군이 있었다. 중부가 동원할 수 있는 정규 병력 중 이 할에 가까운 병력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성가대! 성전의 성가를!”
고통도 공포도 모두 거세되어버린 광전사 사만과 일천에 가까운 초인들이라면, 아무리 북방의 기마대가 사납다고 한들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등지고 선 요새 위로 갑작스레 시꺼먼 액체와도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환수사제 최민영이 불러낸 탐욕의 환수, 토르고스였다.
“아악!”
성가를 목 높여 불러대던 성가대의 사제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나같이 가슴께에 화살이 박힌 채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날아든 요정 궁사들의 저격이 성가대의 사제들과 마법사들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