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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83화 (28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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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폭풍처럼 (3)

원래대로라면 그저 꿰뚫린 상대를 얼려버리는 것에 그쳤을 얼음의 창에 바람의 권능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혹한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이 만나자 완전히 새로운 권능이 탄생했다.

새로운 권능의 첫 희생자는 마법병단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름 모를 중부의 기사였다.

쾅, 하는 굉음이 들린다 싶더니 마법사들이 펼친 방어마법이 산산조각이 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내세운 방패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이 났다.

반격은커녕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아….”

힘주어 움켜잡은 방패의 손잡이가 허전해졌다 싶었을 즈음엔 이미 얼음의 창이 가슴께를 관통해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눈을 부릅뜨고 가슴을 꿰뚫고 들어온 반투명한 빙백(氷白)의 창을 본 기사가 입을 벌렸다. 하지만 가슴께에서 시작된 지독한 냉기가 기사의 마지막 단말마마저 얼려버리고, 기사는 부릅뜬 눈을 채 감기도 전에 절명하고 말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얼어붙은 기사를 중심으로 무지막지한 냉기가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대지를 얼려버리는 것에 불과했던 냉기가 이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눈보라가 되었다.

“어, 어?”

반격을 위해 준비했던 마법 주문을 마저 끝마치기도 전에 마법사의 혀가 얼어붙었다. 눈알이 빠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함께 고통에 치뜬 눈이 투명한 얼음조각이 되었다. 바람결에 펄럭이던 로브 자락 역시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고통은 없었다. 제 몸에 일어난 끔찍한 변화를 인지했을 때는 이미 심장도 영혼도 얼어붙고 난 후였다.

콰아아아아.

순식간에 두 사람의 가엾은 희생자를 집어삼키고도 눈보라는 만족하지 않았다. 사납게 포효하며 기어이 또 다른 희생자들을 찾아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탐욕스러운 눈보라 앞에서 저항은 무의미했다. 수많은 이들이 동경해마지않던 기사의 긍지, 찬란한 검광은 그저 제 몸에 닿은 냉기를 태워버릴 뿐, 주인의 몸을 지켜낼 수 없었다.

허공중에 흩날리는 작디작은 얼음의 결정들이 갑주에 들러붙고 드러난 맨살에 엉겨 붙었다.

정련된 쇠로 만든 철갑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피부가 파랗게 변했다. 혈관을 타고 달리던 더운 피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사들은 검날에 그러모은 검광을 채 떨쳐보기도 전에 얼음으로 빚은 조각상이 되고 말았다.

눈보라의 영역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화염의 마법을 준비해두었던 소수의 마법사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뒤이어 달려든 용인의 저돌적인 공격마저 이겨낼 수는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짓에 짓이겨지고 찢겨진 마법사들이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채 가시지 않은 혹한의 냉기가 그마저도 얼려버렸고, 사방에는 붉은 눈꽃이 흩날렸다.

크르르르.

그리고 붉은 눈송이가 흩날리는 혹한의 땅 한가운데, 용인이 있었다.

제 손에 움켜쥔 얼음의 창만큼이나 차가운 시선으로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보는 거인, 이 순간 삼백의 초인과 단 한 명의 괴수 중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명백하게 괴수 쪽이었다.

“으, 으어어어!”

오만하고 광폭한 용인의 시선과 맞닥뜨린 어느 심약한 마법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미리 외워두었던 마법의 주문을 발작적으로 내뱉었다.

“파, 파이어 레인!”

가장 차가운 이성으로도 통제하기 힘든 마법의 힘이다.

화르르르륵.

겁에 질려 정신을 잃다시피 한 심약한 마법사가 발현한 마법은 용인이 아닌 스스로를 불태우고 말았다.

“끄아악!”

끔찍한 비명이 얼어붙은 세상을 일깨우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 넋 놓고 참상을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테네시아 왕실 기사단 전멸, 마법병단 전멸.”

“테네시아 왕국군과 함께 드라흔을 막아섰던 기사 이백십일 명 중 백이십팔 명 전사, 마법사 일백칠 명 중 예순셋 전사.”

왕국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수백의 초인을 한 자리에 모았다. 상대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한 쪽은 수백의 초인 쪽이었다.

반드시 드라흔의 이름을 지워 전세를 뒤바꾸어 보겠다고 나섰던 중부 왕국의 삼백 결사대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살아남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통해 빠르게 전선으로 전파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전선의 병사들 중 이 사실을 모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이베리아 전선에 진출해 있던 중부 왕국의 병력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물러났다.

이제껏 이베리아의 국경을 압박하고 있던 중부 왕국의 병력이 물러나지 못하도록 채찍질해왔던 교국도 이번만큼은 일선 지휘관들의 결정을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전의 교황과 대주교들도 이번 전투의 결과에 대해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던 탓이다.

그들은 단 한 명의 기사가 이백이 넘는 기사들과 일백이 넘는 마법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그들이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아덴버그 제국군이 이베리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아덴버그 본토에서 온 지원군은 국경을 수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스라엘 왕국 본토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아스라엘 왕국의 귀족들이 속속 아덴버그에 투항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한 달 내로 아스라엘 왕국 전역이 아덴버그의 것이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북방의 기병대에 의해 이미 왕실이 무너져 이렇다 할 구심점도 갖추지 못한 아스라엘 왕국은 너무도 쉽게 아덴버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 왜 전세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말이다!”

교황은 불같이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어댔지만 대주교들 중 교황의 질문에 대답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교황 역시 답을 찾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교황 스스로도 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퀘이샤만 아니었으면… 아니, 드라흔이 이 일에 개입하지만 않았으면….”

한참 동안 날뛰어댄 끝에 기력이 소진된 교황이 털썩, 성좌에 주저앉았다.

대륙 동부의 맹주라 할 수 있는 아덴버그 제국의 거물, 전승 대공이 개입한 순간 이미 상황은 교국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온갖 수를 내보았지만 상황은 수습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하기야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성검을 얻기 위해 자국의 영웅을 암습하는 금수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덜컥 덜미를 잡히기까지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륙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드라흔에게 개입할 여지를 주었으니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치부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설령 모든 것을 되돌리고 용사를 풀어준다고 해도 이미 승기를 잡은 아덴버그 제국과 동부의 왕국들이 병력을 물릴 리가 없었다.

“아스라엘 왕국은 포기하고, 테네시아 왕국의 남쪽에 새로이 전선을 꾸린다.”

이제 남은 것은 권좌에 길들여진 노 성직자의 추악한 이기심과 아집뿐이었다.

“이베리아로 전문을 보내라.”

교황의 눈빛은 마치 벼랑 끝까지 몰린 듯 악에 받쳐 있었다.

**

“절대로 안 됩니다.”

아덴버그의 인물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중부의 구원자라고까지 불리던 용사마저 거꾸러트린 교국이 작정하고 판 함정입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개중에 더 강하게 만류하는 건 본대와 함께 뒤늦게 전선에 당도한 아샤 트레일이었다.

“용사가 대공께 중요한 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대공 또한 제국에 중요한 분이십니다. 사사로운 정에 휩싸여 부디 일을 그르치지 마소서.”

김선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당부하시기를 전선의 사태가 급박하여 당장 돌아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더 이상 대공께서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함께 갈 테니….”

“로아힘 공께서 보증을 하셨기에 이미 한 번 폐하께서 위험을 묵인하신 바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전승 대공께서는 속이 문드러지는 중상을 입으셨지요.”

얼굴이 꺼멓게 죽어가는 그를 보다 못한 마렉이 나섰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샤 트레일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리고 그녀의 완강함은 필시 오필리아의 확고한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사사로운 정이 아니다.”

침묵을 고수하던 김선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용사는 내 동생이기 이전에 이번 전쟁의 열쇠이기도 하다. 만약 교국의 손에서 용사를 빼올 수 있다면, 교국을 따르던 중부의 왕국들 중 상당수가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양상이 비등비등하게 흘러가고 있을 때야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았겠지만, 지금처럼 중부의 왕국들에게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부 열성적인 교국의 추종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왕국들은 어쩌면 지금쯤 전쟁에서 발을 뺄 구실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용사의 증언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구실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대공 탓이 아니네. 신을 모시는 성직자들이란 자들이 이리 세속의 권력자들보다 그 본성이 천박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맞소.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교국은 이미 이 일이 있기 전에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소. 동부는 몰라도 최소한 우리 이베리아만큼은 집어삼킬 생각이었던 게 확실하오. 그렇게 생각하면 대공께서 활약해주신 덕에 우리 이베리아가 교국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소.”

마렉이 답지 않게 위로를 하고 나서자, 전선의 장병들을 위무하기 위해 와 있던 이베리아대공이 거들었다.

하지만 김선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내가 시작한 전쟁이니 마무리도 내가 지어야지.”

“대공!”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확고한 음성에 사람들이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폐하께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미 폐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든 뒤를 봐주시기로 하셨으니, 설령 폐하께서 이 자리에 있다 한들 내 결정을 막지는 않으셨을 테지.”

“정녕 그리 생각하신다면 지금에라도 당장 황도와 통신을 연결하여 폐하께 의중을 여쭈소서.”

제 딴에는 비장의 한 수라고 꺼낸 아샤 트레일의 한마디에도 김선혁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 할 생각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은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소?]

이미 전문을 통해 간략한 사정을 보고 받았는지,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오필리아의 음성은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 있었다.

“저는 폐하께서 저를 말리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막무가내에 가까운 대답에 오필리아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큼은 반드시 대동해야 하오.]

교국이 원하는 것은 당사자 혼자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김선혁도 그렇게까지는 교국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오필리아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하오. 대공의 몸은 대공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오필리아는 몇 번이나 거듭 당부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녀답지 않게 다소 억지스러운 말을 꺼냈다.

[약속해주시오. 부디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절절한 한마디에 그가 대답했다.

“약속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오필리아.”

그런데 그 어쩌면 의미 없을 약속의 말에 이상할 정도로 확신이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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