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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81화 (28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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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폭풍처럼 (1)

지나치게 눈에 띄는 블루곤을 강줄기 어딘가에 처박아둔 김선혁은 아티야를 통해 확장된 기감에 걸린 용병대를 찾아 나섰다.

전선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던 용병대는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경계했지만, 이내 그가 명성 자자한 전승 대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납작 엎드려 지극한 경의를 보였다.

“누가 지휘관인가.”

그의 질문에 바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병들 중 중년의 용병 하나가 나섰다.

“전선의 상황에 대해 들은 게 있나.”

대륙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기사이자 제국의 고위 귀족을 마주한 용병대장은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성실하게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광신도들의 맹공에 전선의 부대들이 꽤나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전선이 뚫리지는 않겠지만, 저쪽에서 같이 죽자고 달려드니 피해가 어마어마한 모양입니다.

그가 그라나도를 나서기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전선에 괴이쩍은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별다른 소식이 없자 다시 돌아서려던 김선혁은 용병대장의 말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중부 왕국군이 장대 높이 사람 하나를 묶어 내걸었는데, 머리에 헝겊을 뒤집어씌운 모습이 마치 교수형 직전의 사형수와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 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자세히 말하라.”

그가 관심을 보이자 용병대장이 더욱더 신이 나서 전선의 소문에 대해 떠들어댔다.

“머리에 헝겊을 뒤집어씌워 놓아 사내의 용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저 멀찍이서 몸뚱이만 보고 젊은 사내라 짐작할 뿐이지요. 다만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꼬락서니가 워낙 엉망진창이라 그조차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

용병대장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김선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살아는 있다고 하던가.”

그리고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그의 음성은 그 가라앉은 낯빛만큼이나 낮게 깔려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 아… 겨우 살아만 있는 모양입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헤매던 용병대장이 뒤늦게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이제야 겨우 중부 왕국군이 보인 기이한 행태가 전승 대공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색이었다.

“그래. 살아있으니 됐다. 살아만 있으면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용병대장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중부 왕국군이 장대 높이 내건 만신창이 몰골의 사내는 김선혁과 무관하지 않았다. 짐작대로라면 그 처참한 몰골의 사내는 한때 교국이 자랑하던 신의 사도, 박준민이 분명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이 바닥을 보여주는구나.”

저열하기만 한 교국의 도발에 김선혁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분노는 잠시였을 뿐이다. 김선혁은 곧 분노를 가라앉히며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교국이 끝까지 박준민을 어딘가에 숨겨놓고 내놓지 않았다면, 그 행방을 찾는 데 무진장 애를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전쟁이 끝이 날 때까지 용사를 찾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교국이 같지도 않은 인질극을 벌인답시고 용사라는 패를 꺼내든 것은 지나치게 섣부른 결정이었다.

지금의 그는 용사가 어디있는지만 알면 그 방비가 얼마나 삼엄하든 간에 구해낼 힘이 있었으니까.

“그 사내가 있는 곳이 어딘가.”

당장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 세빌리야 요새를 구원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전쟁의 시발점이자 양측의 명분이었던 용사의 구출도 중요했다. 만약 용사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교국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얽힐 대로 얽히고설켜버린 전쟁에서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전쟁을 지배하는 것은 탐욕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은 중요했다. 팽팽한 전세가 조금이라도 기우는 순간, 교국의 과오는 중부 왕국들로 하여금 전선을 이탈할 큰 구실이 되어줄 테니까.

아니, 그 이전에 용사는 그의 의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자신의 의형제를 구하는데 거창한 이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말하라. 그 사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쉬운 게 없는 법이다.

“어떤 사내를 말씀하시는 건지….”

“뭐?”

“방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꼴로 내걸린 사내가 한 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부대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내들을 군기처럼 내걸었다고 합니다.”

교국의 교활함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북서부 전선에서도 그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것을 보았다는 소문을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이래서야 넓게 전개한 중부 왕국군들 중 어느 부대가 내건 사내가 진짜 박준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중에 진짜 박준민이 있는지조차 모호할 지경이었다.

노골적인 함정이었다. 교국은 수십 명의 가짜 박준민을 내세워 그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하고 있었다.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면 질풍처럼 휘몰아치는 드라흔의 악몽에 대처하기 위해 꽤나 오랫동안 준비를 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대책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였다.

세빌리야 요새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던 그가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걸음을 멈춰 세웠으니까.

하지만 김선혁은 교국의 생각처럼 마냥 무르지 않았다. 전장 밖이라면 모를까, 최소한 전쟁에 참가한 그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놀아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뒤로 싸움개처럼 전쟁터만 전전해왔다. 그동안 참전한 크고 작은 전투의 횟수만 해도 감히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다. 그 풍부한 경험이 그를 보다 냉철하게 만들어주었다.

간혹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준민아.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김선혁은 도대체 얼마나 될지 모를 가짜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위급한 지경에 놓인 세빌리야 요새부터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절한 설명에 감사한다. 그럼 전선에서 보도록 하지.”

“혹시 어디로 향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용병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을 물은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눈치였다.

“세빌리야.”

하지만 김선혁은 굳이 자신의 행선지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수가 없었다.

탈피를 마친 이후로 과할 정도로 거대해진 블루곤은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겨지는 덩치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대장은 북쪽을 향해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수백 미터 크기의 뱀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용병대장을 통해 그 뱀이 전승 대공의 아룡이라는 사실이 퍼져 나갔다.

“전승 대공께서 새로운 아룡을 타고 돌아오셨다!”

“이번에는 금빛이 아니라 푸른 아룡이다!”

사실은 순서만 따지면 골드레이크 바로 다음으로 김선혁과 함께 하기 시작한 블루곤이었지만, 원체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지라 사람들은 블루곤이 새롭게 길들인 아룡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과거 물을 근원으로 두었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해룡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뭍에만 나오면 느리기가 거북이나 다름이 없었던 블루곤은 뱀처럼 몸을 휘저어대며 빠르게 나아갔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골드레이크나 레드번에는 비할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덩치가 크니 한 번 몸을 휘저을 때마다 수백 미터씩 앞으로 나아가는 재주를 선보였다.

단지 그 덩치 탓에 지나치게 눈에 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의 참전에 대해 숨길 생각이 없던 김선혁은 더욱더 보란 듯이 존재감을 뽐내며 세빌리야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위축된 아군의 사기를 고무하고 적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가 빠르게 전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베리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높게 치솟았다.

“전신이 오고 있다!”

이제껏 전승 대공이 참전한 전쟁 중에 패배한 전쟁은 없었다. 이베리아군은 이번 전쟁 역시 전승의 가호를 받아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광전사와도 같은 적군의 모습에 내내 시달려 위축되었던 이베리아군의 군기가 꼿꼿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베리아군의 군기가 회복된 만큼 적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설마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중부 왕국군의 지휘관들은 부디 저 악몽과도 같은 기사가 자신들을 찾아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두려워 마시오! 신의 은총이 형제들과 함께 할 것이오!”

성가대의 사제들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독려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사제들의 말에 권위가 실리는 건 오직 사지가 잘려나가는 고통도 잊게 만드는 성가가 울려 퍼질 때뿐이었다.

중부 왕국군의 지휘관들은 혹시라도 전승 대공을 자극할까 우려하여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예 거점에 처박힌 채 공세를 멈춘 이들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게 다 연합군의 구조적인 한계였다. 거창한 사명감도 뭣도 없이 나선 전쟁, 연합군들 중에 먼저 나서서 전승 대공에게 두들겨 맞고 싶은 이는 없었다. 그저 자신들만 아니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전선의 전체적인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단 한 명의 기사가 전쟁에 참전한 여파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이었다.

“저, 전승 대공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세빌리야 요새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던 로즈호그 왕국군은 허겁지겁 군대를 물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이 퇴각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교국에서 서슬 퍼런 전문이 날아들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이단과 결탁했다 판단하여 그 죄를 묻겠다는 으름장이었다.

“전승 대공은 씻을 수 없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분명 아룡의 존재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 위세는 전만 못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김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전승 대공의 목을 베어 중부의 위상을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사제단이 돕겠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부의 귀족들을 사제들이 부추겼다.

“전승 대공은 별다른 지원도 없이 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 아닙니까? 사악하고 흉폭한 마수들마저 이겨낸 로즈호그 왕국의 정예라면 분명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사제들의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은 지휘관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교국의 바로 북부에 위치한 탓에 다른 왕국들보다 교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로즈호그 왕국의 지휘관들은 죽기 살기로 전승 대공과 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아아아아아.”

지평선 끄트머리쯤에 피어난 먼지구름의 접근을 본 사제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성가를 불렀다. 겁에 질려있던 병사들의 눈빛이 시뻘겋게 충혈되며, 병장기를 쥔 손에 핏줄이 우둘투둘 올라왔다.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돌격할 태세였다.

그 뒤로 기사들이 늘어섰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을 미리 외워두고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가의 영향력은 초인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일반 병사들처럼 이지를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들 역시 끓어오르는 전의에 감염되어 두려움을 잊었다.

“전군!”

로즈호그 왕국군의 사령관은 샘솟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칼을 높게 세워들었다.

“공….”

하지만 자신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다가온 거대한 뱀의 모습을 본 순간, 성가가 만들어낸 기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찬란하게 빛나던 기사들의 검날이 빛을 잃고,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마법사들의 주문이 멈춰버렸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괴수의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그런 상황은 일반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사지가 잘려나가는 고통에서도 오로지 적의 목을 잘라내겠다는 투지를 잃지 않았던 광신도들이 거대한 뱀 앞에서 개구리마냥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성가대의 사제들이 쉬지 않고 불러대던 성가 역시 어느새 멈춰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굳어버린 로즈호그 왕국군 사이로 거대한 해룡이 뛰어들었다.

**

“로즈호그 왕국군 전멸!”

전승 대공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호그 왕국군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전선을 이탈 중이라는 소식이 대륙을 강타했다.

“로즈호그 왕실 기사단, 단장 전사! 부단장 전사! 상급 기사 전멸! 평기사 소수만이 살아남아 부대를 수습하여 퇴각 중!”

“왕실 마법사단 7명 전원 전사!”

“제4 보병연대 완전히 와해! 중장기병 2개 중대 전투력 완전 상실!”

“총 병력 1800여 명 중 생존자 600여 명에 불과!”

혹독한 서부 땅에서도 살아남은 로즈호그 왕국의 정예들이 단 한 명의 기사와 괴수를 이겨내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세빌리야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연합군 병력 현재 퇴각 중입니다!”

로즈호그 왕국군이 와해되고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빌리야 요새를 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6천 군세가 전선을 이탈했다.

“세빌리야 요새의 병력 현재 요새를 버리고 남하 중! 아군의 배후가 위험합니다!”

그리고 풀려난 세빌리야 요새 병력이 이베리아군에 합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립되었던 동부 왕국의 병력들이 일제히 풀려나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드본과 함께 최전방에 남았던 검성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베리아 남부에서 올라온 아덴버그 제국의 지원군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요정 궁사들이 파견 사제들을 저격하고 있습니다! 사제단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덴버그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승 대공이 참전한지 불과 2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교국이 연일 날아드는 비보로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을 동안, 김선혁은 미루어두었던 용사의 구출 작업을 개시했다.

그는 중부 왕국군이 내세운 가짜를 차례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미끼를 내걸고 있던 부대를 괴멸시키는 것은 덤이었다.

머리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을 선호하는 김선혁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어떤 권모술수도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그 앞에선 교국이 준비한 모든 함정은 너무도 하찮기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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