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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79화 (27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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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광신도 (1)

대륙의 중부와 동부가 맞닿은 모든 국경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동부 왕국 연맹이 판을 키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중부의 왕국들로서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대로 이베리아를 공격하자니 기세가 오른 이베리아군이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국으로 귀환하자니 교국의 파문령이 두려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답은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문이 아무리 두려워도 누대에 걸쳐 쌓아온 근거지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전선에서 병력을 물리는 자들은 무조건 파문이다!]

낌새를 눈치챈 교국이 다시 한 번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미 퇴각을 결정한 중부 왕국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한 시가 급했다.

오랜 전쟁으로 쇠약해진 중부의 왕국들로서는 절대로 동부의 공세를 견뎌낼 수 없었고, 그나마도 주력이 전부 빠져나온 상태라 언제 국경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꾸물거리다간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전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북쪽으로 향했다던 북방의 기병대가 전선 근처를 맴돌며 주둔지를 빠져나온 병력을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귀족들도 전선을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4천의 병력이라면 저들도 함부로 습격할 수 없을 거요.”

개중에 몇몇 귀족들이 조급한 마음에 자신들끼리 뭉쳐 전선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수백 개의 작은 부대로 잘게 쪼개진 유목민들이 어느새 다시 하나로 모인 상태였다.

결국 4천의 병력을 믿고 전선을 나섰던 귀족들은 1만이 넘는 기병들의 습격에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승산이 없었소! 마왕을 상대로 많은 힘을 소진한 우리와는 달리 저들은 전력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지 않소!”

귀족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전쟁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신나게 이베리아를 공격하다가 새삼 이제 와서 전황이 불리해졌다고, 휴전을 제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황께서는 이베리아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신도로서 그분의 뜻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경은 아국의 귀족이요! 아니면 교국의 사제요! 대체 지금 상황에서 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끝까지 신의 뜻을 받들어 이단과의 전쟁을 속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성 광신자들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날마다 갑론을박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전쟁을 벌인 것도 교국이었고, 아직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도 교국이었다.

[전선의 귀족들은 후방을 염려하지 말고, 신의 뜻을 받들어 성전에 열과 성을 다하라. 그대들이 쌓아올린 이단의 수급이 그대들과 그 가족이 낙원으로 드는 디딤돌이 되리라.]

대신전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중부 왕국의 수뇌부들이 전쟁의 속행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설득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귀족들의 노고가 무색해지는 명령이었다.

“운이 좋아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누대에 걸쳐 쌓아온 왕국의 영화는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겠군.”

망연자실한 귀족들이 자조했다. 마왕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모조리 친교국 인사로 교체되어버린 자신들의 나라는 이미 교국의 속국에 불과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교국의 명을 받들고야 말겠다는 왕실의 의지에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다시 공격을 속행한다.”

다소 주춤했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동부 왕국 연맹의 참전 소식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이베리아군은 쉽사리 국경을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귀국을 완전히 포기한 귀족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베리아의 요새들을 공격했다.

몇 개인가의 요새가 다시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중부 왕국 연맹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안전한 후방에서 병사들을 부리던 귀족들이 평소와는 달리 최전선에 나섰고, 이베리아군의 집중 공격에 노출되어 수도 없이 쓰러졌다.

마치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듯한 무모한 행동, 그것이야말로 귀족들이 왕가에 보내는 마지막 경의이자, 유구한 역사를 시궁창에 처박은 군주에게 보내는 항의였다.

정작 그들의 속내는 안중에도 없는 각국의 군주들은 그 죽음을 가리켜 거룩한 순교라고 칭하며 그들이 생전 원하지도 않았던 순교자의 호칭을 내렸다.

그렇게 수많은 귀족들이 순교의 길에 올랐을 때, 교국이 동부 왕국 연맹을 상대로 성전을 선포했다.

이제 그 본래의 거룩함마저 퇴색해버린 성전 선포는 동부 왕국 연맹의 수뇌부에게 조금의 감흥도 줄 수 없었다.

“교국이 전쟁하면 무조건 성전인가. 대신전은 이제 자신들의 뜻이 신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군.”

오히려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하지만 교국에게 있어 성전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신도가 남더라도 결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으며, 교국이 이제껏 내보이지 않았던 금단의 힘마저 사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적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최전선에서 교국의 병력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던 이베리아의 병사들이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렸다.

“죽어! 이 악마 같은 새끼야!”

푸욱.

날카로운 창에 배를 꿰뚫린 적 병사가 더욱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베리아의 병사는 그게 단순히 고통에 찬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적 병사는 창대를 끌어당기며 이베리아 병사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 용을 쓰고 있었다. 그 몸짓이 너무도 섬뜩해 이베리아 병사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턱.

운이 나빴다. 뒷걸음질 치다 시체에 걸려 자빠지고 만 이베리아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다가온 적 병사가 숨결이 닿을 듯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어?”

기이할 정도로 충혈된 적의 눈동자를 본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컥.”

그 순간 적이 가엾은 이베리아 병사의 목을 물어뜯었다. 이베리아 병사는 피를 쏟아내다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하지만 눈이 뻘겋게 충혈된 중부군의 병사는 계속해서 희생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도 절명하고 말았다.

그런 장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부 왕국의 병사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고, 숨이 붙어있는 한 끊임없이 이베리아 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와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모양새가 흡사 전설 속의 광전사와도 같았다.

피해가 속출했다. 대등하던 전세가 어느 순간 기울기 시작하자 이베리아군의 지휘관들도 적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마,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던 모양이다.

지휘관들이 전황을 바꾸어보려 했을 때는 이미 악귀처럼 변해버린 적이 어느덧 새까맣게 성벽에 올라 아군을 올라타고 이를 딱딱거리고 있었다.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에서 항전하겠다!”

결국 이베리아군은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기로 결정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퇴! 후퇴하라!”

물러나는 병력을 마지막까지 지휘하던 한 중대장이 지옥과도 같은 참상에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체….”

삐져나온 내장을 질질 끌면서도 어떻게든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겠다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옆에서 다리가 잘린 병사 하나가 손톱이 으스러져라 바닥을 긁어대며 이쪽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젊은 중대장은 과거 저들과 같은 모습을 한 적들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바로 마왕이 이끌던 사자(死者)의 군대가 딱 저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사자가 아니었다. 살점과 피로 얼룩진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숨결이 저들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쏟아내는 붉은 피는 사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여전히 따뜻했고 굳어있지도 않았다.

콱.

잠시 넋을 놓은 사이에 다가선 적이 발목을 붙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찍이 있던 다리 잘린 병사였다.

“합!”

뒤늦게 정신을 차린 중대장이 칼을 높게 들어 사자의 목을 잘라냈다. 다리가 잘리고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던 병사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어느새 성벽 위에 남아있는 아군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중대장이 몸을 돌려 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시뻘건 눈을 한 적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힘주어 칼을 움켜잡았지만, 중대장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적에게 사지가 뜯기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의 내성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

근 며칠 사이에 적에게 함락당한 이베리아의 요새가 십여 개에 가까웠다. 이제껏 적의 맹공을 잘 버티고 있던 요새들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베리아군의 지휘부는 갑작스레 전선의 균형이 무너진 이유를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무너진 요새에서 빠져나온 생존자가 있었고, 그들을 통해 전선의 상황이 낱낱이 알려졌다.

[적들은 마치 광전사와도 같았고, 살아있는 망자와도 같았다. 다리가 잘려도, 손발이 뭉개져도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고 목이 잘리는 그 순간까지 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한 요새들이었건만 생존자들의 증언은 매한가지였다.

“설마...”

교국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이베리아 대공이 퍼뜩 외쳤다.

“다른 전선의 상황은 어떤가!”

대공의 명령을 받은 지휘부의 인사가 황급히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모, 모두 같습니다!”

하얗게 질린 부관이 전쟁에 참전한 동부 왕국 연맹의 전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비명을 질렀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생경한 성가가 울려 퍼지고 나면, 여지없이 적들이 돌변했다고 합니다!”

끔찍한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재 군중들이 국경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설마….”

“그들 역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제의 인도를 받고 있답니다.”

부관의 말에 이베리아 대공이 휘청거렸다.

“본토에서는 지금의 사태가 신도들을 광전사로 만드는 교국의 비술 탓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교국이 강대한 제국과 동부 왕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교국이 이번 전쟁에 동원한 병력은 대륙에 퍼진 모든 신도들이었다.

“이래서야 마왕과 교황이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서부의 백성들을 마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한 마왕, 신도들을 광전사화 시켜 전장에 밀어 넣은 교황, 이베리아 대공이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 악마였다.

“로아힘 공이 있는 세빌리야 요새를 제외한 모든 요새들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구, 국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중부 왕국의 병력이 물 밀 듯이 국경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교국의 사악한 비술이 만들어낸 광전사들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이베리아의 국경이 끝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전선을 밀어 올려라! 이베리아가 전쟁터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이베리아와 동부 왕국 연맹의 수뇌부들이 교국의 사악한 비술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때, 사라졌던 전승 대공이 마침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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