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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영웅의 발자취에는 꽃향기가 난다 (3)
그 어떤 조짐도 징후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블루곤의 귀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땅의 아룡이 돌아왔을 때와도 같았다.
그는 당장 바다에 나갈 준비를 했다.
“배가 필요하시다고?”
하필이면 마렉이 드본을 타고 전선으로 향했던 탓에 부득이하게 이베리아 대공에게 선박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배는 왜?”
이베리아 대공은 아직까지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은 그가 갑작스레 바다에 나가겠다니,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잠시 요 앞 바다에 다녀올 일이 있소.”
“그 몸을 하고 어딜 가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군.”
하지만 이베리아 대공은 두루뭉술한 대답에 여전히 의아해하면서도 선선히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전쟁 통에도 항구를 오가는 수많은 배들로 활기를 잃지 않은 그라나도이니만큼 배를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교국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블루곤을 만나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몸을 치료해야 했다.
“해군을 빌려드리겠소.”
때마침 훈련하던 중 보급을 위해 항구에 정박 중이던 해군 선박이 있었던 모양이다.
천만다행이었다.
거리가 멀던 가깝던 간에 항해라는 건 뭍을 오가는 것과 달라서 꽤나 준비 과정이 길고 번거로웠다. 그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김선혁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루 이틀이면 다녀올 거리라니, 해군의 일정에도 지장이 없겠지. 원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배에 오를 수 있도록 조치해두겠소.”
그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고, 곧장 날이 밝자 안내인을 따라 항구로 향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해군의 인사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야전 기병의 블루코트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멋이 있는 군청색 코트, 색을 맞춘 모자, 그리고 완만하게 휜 특유의 해상용 곡도까지, 항구를 오가는 수많은 뱃사람들 중에서 해군의 차림새는 단연 눈에 띄는 것이었다.
“어, 음….”
그런데 그 해군의 수가 그의 예상보다 지나치게 많았다. 쭉 도열한 해군은 얼핏 보기에도 최소한 연대급 병력이었다.
많은 건 병사들뿐이 아니었다.
상선들과는 생김새 자체가 다른 전함들이 무려 십여 척이나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성 높은 전승 대공을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제 1함대를 맡고 있는 프란시스코 로페스입니다. 대공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저희 1함대가 대공을 모시겠습니다.”
근해를 다녀올 배 한 척을 요청했더니, 함대 하나가 통째로 딸려온 꼴이었다.
“너무 큰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대공께서 필요로 하시는데 제 1함대가 아니라 전 함대인들 달려오지 못하겠습니까. 오가는 동안 훈련도 겸할 예정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했는지 로페스 제독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부담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원 승선하라!”
그가 배에 오르자 그때까지만 해도 항구에 남아 그를 구경하고 있던 해군의 병사들이 함선에 올랐다.
“방향은 남남서(南南西), 선두는 산 루이스 호, 1함대 출항!”
목적지를 전달받은 이베리아의 제 1함대가 드디어 그라나도 항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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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일까. 이미 몇 번이나 배를 타고 항해를 한 경험이 있었건만, 김선혁은 좀처럼 배의 진동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함이 격렬하게 기동을 하며 해상전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가자 간신히 진정시켜두었던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하지만 고통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 블루곤이 있는 해역이 가까워질수록 배의 진동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조금 전까지의 진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는 태풍이라도 만난 듯 흔들려댔고, 함대의 훈련마저 중지되었다.
“전 함선 간격을 벌려라! 파도에 쓸려 아군과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로페스 제독은 갑작스레 심해진 파도에 의아해하면서도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배가 많이 흔들립니다. 갑판은 위험하니 다시 내려가시지요.”
비틀거리며 갑판에 올라선 김선혁을 본 로페스 제독이 우려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라도 이베리아의 귀빈이 파도에 휩쓸려 떨어질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김선혁은 손을 휘저어 노제독의 부축을 뿌리쳤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마라.”
뜬금없는 말에 로페스 제독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무엇을 보든 간에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설명하려고도 하지 마라.”
경고 아닌 경고, 노제독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바다를 오가다 보면 온갖 기이한 것들을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지 매번 깨닫게 되지요. 장담컨대 대공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로페스 제독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해야 했다.
쉼 없이 나아가던 배들이 일제히 돛을 접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 신이시여.”
로페스 제독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는 저 수평선 너머에 걸친 기괴한 풍경을 노려보았다.
온 하늘이 푸르고 화창하건만 저 너머에만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듯했다. 짙게 몰려든 먹구름들이 수시로 벼락을 토해냈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온 바다를 헤집어댔다. 높게 일어난 파도는 탐욕스러운 악마의 혓바닥과도 같았고, 잠깐 사이에도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수십 개의 소용돌이는 악마의 아가리와도 같았다.
만약 바다 어딘가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 아닐까 싶은 광경이었다.
바다에서만큼은 세상 두려울 게 없다던 이베리아의 정예 함대조차도 감히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파도와 바람에 로페스 제독도 전진을 포기하고 말 지경이었다.
경험 많은 노제독은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그라나도 해역에 생겨난 난데없는 현상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이 근방 해역에 저런 소용돌이군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출항하기 전에 몇 번이나 관측 마법사를 통해 날씨를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런 태풍에 대해 경고한 이는 없었습니다.”
선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저 기현상에 대해 궁리를 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이곳에 모인 자들 중에 저 끔찍한 현상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이는 오직 김선혁뿐이었다.
“무엇을 보든 당황하지 말라고.”
저 너머의 태풍과 소용돌이는 결코 자연적인 재해도, 바다의 변덕도 아니었다.
블루곤.
성질 고약한 심해의 아룡이 무심한 주인에게 보내는 무언의 시위였다.
주인이 바로 근처까지 왔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블루곤의 행동에 김선혁이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심해에 가라앉은 채 나타날 줄 모르는 그 행동을 보건대, 아무래도 블루곤은 골드레이크처럼 순순히 넘어올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위라도 하듯 더욱 사납게 바다를 헤집어댈 리가 없었다.
수십 년 이상을 바다 위에서 보낸 뱃사람들조차도 겁을 집어먹게 만든 기현상 앞에서도 너무도 태연하기만 한 김선혁을 보며 로페스 제독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제야 저 현상과 눈앞의 인물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대공께서 찾는 것이 저곳에 있는 겁니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제독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이 내 목적지다.”
“맙소사….”
노제독이 머리를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배를 최대한 가까이 붙여라. 그 이후에는 나 혼자서 들어가겠다.”
“절대로 안 됩니다! 저 안에서는 가장 크고 단단한 함선조차도 단 하시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혼자 가시겠다니요!”
로페스 제독이 기겁을 하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혼자 저 안에 들어가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려댔다.
심통이 잔뜩 난 해룡을 달랠 수 있는 이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본선을 제외한 전 함선은 지금부터 저 소용돌이와 거리를 벌린다.”
하지만 로페스 제독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저 소용돌이를 뚫고 그 중심까지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저 근방까지 가는 정도라면 어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페스 제독은 끝내 그를 홀로 내보내지 않았고, 기어이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선택했다.
선단의 대열이 바쁘게 움직였다. 거대한 기함 옆으로 다소 날렵한 형태를 한 함선 한 척이 붙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두를 맡았던 산 루이스 호였다.
“베라크루즈는 이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함선이지만, 저리 날뛰어대는 바다에서 버티기에는 다소 굼뜬 놈입니다. 산 루이스라면 베라크루즈보다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로페스 제독의 명령에 산 루이스 호의 승무원들이 배를 옮겨 탔다. 남은 것은 그야말로 배를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들뿐이었다.
“다시 생각하라.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혹시라도 또 자신과 블루곤 사이에 끼어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까 저어한 김선혁이 제독을 다시 한 번 설득해보았지만,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제게 주어진 임무는 전승 대공께서 무사히 바다를 둘러보고 그라나도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모시는 것이었지, 바다 어딘가에 대공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집스러운 노제독의 대답에 결국 두 손을 든 건 김선혁 쪽이었다.
“대공께서 저 끔찍한 곳에서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부디 그게 저 가장자리 어딘가에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를 내뱉은 로페스 제독이 입을 다물고는 키를 꽉 움켜잡았다. 마치 온 정신을 배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에 그도 더는 제독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블루곤, 적당히 해라.”
어쩌다 보니 다른 아룡들에 비해 소홀하게 대한 블루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술을 부려서야 달래줄 마음도 들지 않게 마련이다.
만에 하나라도 블루곤의 심술로 인해 함대에 피해자가 생긴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무모함과 성질 고약한 아룡의 심술에 휘말려 들어 피해를 보는 건 줄리앙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사나운 파도를 뚫고 산 루이스 호가 조금씩 태풍을 향해 나아갔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파도에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가 있었지만, 로페스 제독은 기어이 함선의 균형을 찾는 데 성공했다.
과연 바다에서 평생을 보내온 선장다운 솜씨였다.
하지만 그런 제독도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태풍의 언저리까지 접근할 수는 없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흔들리는 함선에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김선혁이 고개 숙여 노제독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고는 비틀비틀 함수(군함의 앞머리) 쪽으로 나아갔다.
턱.
그가 간신히 함수에 도달해 물기 젖은 난간을 움켜잡았을 때, 해일처럼 일어난 파도가 산 루이스호를 집어삼킬 듯 접근해왔다.
“혹시라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귀항….”
그 거대한 파도를 똑바로 노려보던 대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산처럼 높게 일어섰던 해일이 산 루이스 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대공, 위험….”
조타용 키를 꽉 움켜잡은 로페스 제독이 경고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파도가 덮쳐왔다.
콰아아아.
함수를 덮쳤던 파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갑판을 흠뻑 적신 짠물뿐이고,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 그 어디에도 김선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아….”
그런데 함수를 바라보는 로페스 제독의 표정이 기이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귀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낭패감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 용맹한 제독은 어쩐 일인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괴, 괴물….”
사납게 일어나 함수를 덮쳐들었던 검푸른 파도, 그 안에서 제독은 괴물을 보았다.
파도 속에 몸을 숨긴 짙은 물빛의 거대한 뱀, 전승 대공은 파도에 휩쓸려 간 것이 아니라 괴물의 아가리에 집어삼켜진 것이었다.
“저, 전승 대공!”
하지만 용맹한 제독은 금세 공포를 이겨냈고, 뒤늦게 전승 대공을 찾아 갑판을 내달렸다.
스르르르.
갑판의 난간에 매달려 바라본 함선 아래로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그림자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제독님! 파도가 잦아듭니다!”
그리고 괴물이 마침내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납게 몰아치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요란스레 벼락을 토해내던 먹구름도 게걸스러운 소용돌이도 더 이상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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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곤, 너 이 새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김선혁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또! 또! 삼켰어!”
축축한 습기와 익숙한 향에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블루곤이 또 한 번 주인을 집어 삼켜버린 것이다.
“이 새끼, 순 상습범이야!”
고래고래 욕을 하며 소리를 치는데,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나직한 음성이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