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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영웅의 발자취에는 꽃향기가 난다 (2)
아덴버그에서 보내온 짤막한 전문의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또 다른 전령이 달려와 국경의 상황을 보고했다.
“사라졌던 동부의 병력들 중 일부가 세빌리야 요새에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소속은 베오그라드 왕국, 정규 보병연대의 중갑보병과 경장보병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세빌리야에!”
이베리아 대공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베오그라드 왕국의 보병들이 밤낮을 잊고 걸음을 서둘렀다고 해도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군대가 이동하려면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이며, 군대의 이동 경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해도 몇 날 며칠을 밤을 지새워도 시간이 모자랐다. 하물며 그들이 배치되어 있던 곳은 그들에게 익숙하지도 않는 서부가 아니던가.
일이 터지기 전부터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베오그라드 왕국의 병력이 벌써 이베리아의 국경에 도착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베리아 대공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아덴버그의 전문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설마….”
[이베리아는 혼자가 아니다.]
비로소 전문의 의미를 깨닫게 된 이베리아 대공은 전율했다.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도 미리 염두에 두셨던 건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전문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베리아 대공의 온몸에는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아덴버그에서 날아든 전문처럼 이베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베오그라드 왕국의 보병들이 이베리아의 국경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사라진 다른 병력들 역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허….”
생색내기가 아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아덴버그의 주장에 동부 왕국 연맹이 중부에 파견한 병력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모두 무사히 국경에 합류하기만 한다면 이베리아가 당면해 있던 병력의 열세는 더 이상 문제도 아니었다.
부족한 초인 병력 문제는 북방의 기병들의 합류로 해결되었다. 들리는 소문의 반의반만 맞아도 북방 기병들은 오랜 전쟁으로 쇠락한 중부 왕국들의 초인전력을 상대하고 남았다. 사기 문제는 전승 대공을 찾아 몰려든 난민들이 열심히 떠들어준 덕에 해결된 지 오래였다.
“이 정도라면….”
이베리아 대공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전면전이라고 해도 지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교국이 과연 정말로 전면전을 일으킬 배짱이 있는지조차도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부 왕국 연맹의 병사들이 지키는 이베리아의 국경을 공격한다는 건, 전승 대공 하나의 신병을 두고 이베리아를 압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칫 섣불리 이베리아를 공격했다가는 동부 전체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꼴이 되어버릴 테니까.
어쩌면 이 또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여제의 노림수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교국은 계속해서 여론전을 펼치겠지. 지금 당장 전쟁을 치르기에는 각국의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으니.”
이베리아 대공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마왕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중부의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사나운 마물들과 싸우며 누적된 피해는 절대로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던 것도 동부 왕국 연맹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의 왕국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건 제 스스로 나라의 존속을 포기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꼭 언제나 상식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필이면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적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첩보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중부 왕국의 군대가 움직인 것이다.
“세빌리야 요새가 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공격당한 곳은 이베리아의 최전방 요새, 세빌리야였다. 그리고 세빌리야 요새는 이베리아와 서부를 잇는 주요거점이기도 했다.
“병력을 차출하여 세빌리야로 보내라! 어떻게든 세빌리야를 지켜야 한다!”
중부 왕국들의 의도는 너무도 훤히 드러나 보였다.
세빌리야 요새를 점령해 동부 왕국의 병력이 이베리아에 합류하는 것을 원천차단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그들이 길을 돌아가도록 만들어 최대한 시기를 늦추라는 교국의 지침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이면 베오그라드 왕국의 병력이 주둔 중인 세빌리야를 공격하여 외교적인 위험성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대륙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인가….”
이베리아 대공이 탄식을 내뱉었다.
간신히 사그라들었던 전쟁의 불씨가 대신전의 탐욕에 의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지 벌써부터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넋 놓고 있기에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전면전조차 낙관하게 만들었던 동부 왕국 연맹의 병력들 중 실질적으로 국경 수비에 가담한 것은 베오그라드 왕국의 보병 연대뿐이었고, 그들만으로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당장은 최우선으로 세빌리야 인근에 진출한 적의 병력을 몰아내야 했다.
물론 대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동부 왕국 연맹의 군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도 본토에서 병력이 오기까지 시간을 벌 지연책 정도는 진즉에 마련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베리아 대공은 그 모든 책략과 계획들을 모두 백지화시켰다.
북방의 기병대라는 강력한 카드를 손에 쥐고도 단순히 버텨내기만 해서야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북방의 기병대에게 전하라!”
새롭게 수립된 전략이 마법적인 처리를 거쳐 국경의 요새에 도달했다.
“호오. 이베리아 대공이라는 사람이 뭘 좀 아는군.”
연락을 받은 다륜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베리아 대공을 칭찬하고는 곧장 휘하의 기병들을 불러 모았다.
“무슨 소식이길래 눈 오는 날 똥강아지마냥 그리 싱글벙글하슈.”
대족장에게 건네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격의가 없었지만, 이곳에 모인 북방의 기병들 중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다륜만이 대족장에 대한 예의 따위는 어디에 팔아먹었냐고 짧게 구시렁거렸을 뿐이었다.
“바깥 세상에 나온 뒤로 부쩍 말이 많아지셨소. 언제부터 초원의 사내가 이리 혀가 길었다고.”
그마저도 타박을 받은 다륜은 건방진 수하들의 교육을 포기하고 이내 용건을 말했다.
“드디어 허약해 빠진 남부 놈들에게 북방의 기상을 보여줄 때가 왔다.”
건들거리던 사내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방금까지 보였던 시장통의 건달 같은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요격 요청이라도 받은 거요?”
다륜이 고개를 젓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빈집털이다.”
**
다륜과 그 휘하의 기병들은 한 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누군가에게 뺏길까 걱정이라도 하듯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국경 요새를 나섰고, 곧장 북쪽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갔다.
“정말 최적의 역할을 맡겼군.”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김선혁은 이베리아 대공의 현명한 결정에 작게 감탄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북방의 사내들은 거점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방어전보다는 마음껏 적진을 휘저으며 날뛰어대는 쪽이 적성에 맞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이베리아 대공이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는 훌륭하게 맡은 바 임무를 소화해내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짓밟힐 적의 처지가 가엾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간 감청을 우려해 최소한의 연락만을 전문으로 주고받아왔던 제국과의 통신이 베오그라드 왕국의 합류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통신 채널이 개설되었던 탓이다.
“변명할 말이 없다.”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지난번에 서부에 방문했을 때도 목숨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고 실종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생겨버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사지가 멀쩡한 대신 속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부상을 숨길 수만 있다면 숨겨보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교국의 흑색선전에 맞서 이베리아가 퍼트린 소문 중엔 자신이 마왕을 소멸시키며 얻은 엄중한 부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고, 오필리아가 그 소문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였다.
[도대체 내 속을 얼마나 썩여야 직성이 풀리시겠소.]
오필리아는 그가 어디를 어떻게 다쳤고, 어떤 상태인지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이번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내 그대가 제국 밖으로 향하는 걸 절대로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요.]
급기야 그녀는 용사의 실종으로 거두어들였던 외출금지(?) 명령을 다시 꺼내 들기까지 했다.
통신 마법사 얼굴 보기가 영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의 말마따나 서부에만 갔다 하면 중상을 입고 실종되기 일쑤인 자신의 잘못이 큰 것을.
“미안해요.”
지금은 그저 나 죽었네 하고 잘못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많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차후 그대의 몸이 모두 낫고 하도록 하겠소.]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그의 몸이 좋지 않다는 점을 헤아린 그녀가 적당한 선에서 추궁을 멈추었다는 것이었다.
[허나 절대로 이것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요.]
물론 그 말이 그녀의 화가 다 풀렸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간에 당장의 상황을 모면한 건 사실이었다.
“몸은 어때요?”
그녀가 한발 물러나자 김선혁이 한참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 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밤낮으로 보살피니 별일이 있을 리가 있겠소? 나는 걱정하지 마시오.]
자신이 없어도 제국의 초대 황제를 보필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듣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정말 어디 아프다거나 그런 데는 없죠?”
[나도… 아이도… 모두 건강하오.]
그녀의 대답을 몇 번이나 듣고 나서야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베리아로 향하는 인원 중에 의학에 능통한 이를 보냈으니, 그로 하여금 그대의 부상을 돌보도록 하시오.]
오필리아의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지만, 김선혁은 조심스레 그녀의 배려를 거절했다.
[고집 부리지 마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필요 없어요.”
거듭 거절을 하자 오필리아의 음성이 살며시 날카로워졌다. 아무래도 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내 부상은 마법사나 사제들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가 이렇듯 강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는 건 단순히 고집 때문이 아니었다.
속성의 힘에 의해 망가져 버린 육신을 고칠 수 있는 건, 역시 속성의 힘뿐이었다.
그리고 마침 부상을 치유하는 데 특별한 힘을 지닌 존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용기사가 지닌 강력한 치유력의 근원이자, 심해를 지배하는 강력한 씨 서펜트가 그라나도의 해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블루곤!”
블루곤, 사라졌던 아룡들 중 두 번째로 탈피를 마친 푸른 비늘의 아룡이 마침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