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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영웅의 발자취에는 꽃향기가 난다 (1)
이베리아의 노련한 대공은 당장 교국의 이중성과 만행을 온 대륙에 알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보다 교국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전승 대공이 마왕과 결탁하여 용사를 위험에 빠트렸다.’
‘그 과정에서 교국의 대주교가 살해당했고, 성검이 탈취당했다.’
짤막한 전문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서부의 몰락을 알리고, 중부의 왕국들이 마왕에 대한 경각심을 품게 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대륙의 영웅의 타락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불신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생 아덴버그 제국의 여제의 반려이자 그 스스로도 모자란 것 없는 작위와 명성을 지닌 그가 뭐가 아쉬워서 서부의 마왕과 결탁을 했겠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승 대공이 제 목숨 걸고 구해낸 서부의 생존자들이 몇인가. 전선에서 전승 대공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자는 또 몇인가. 그런데 그런 영웅이 마왕과 결탁했다니, 믿을 수 없다.”
전승 대공이 보인 영웅적이고 헌신적인 행보가 그들의 말을 뒷받침해주었다.
“전승 대공의 아룡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소. 내 눈앞에서 아룡이 교국의 대주교를 씹어 삼키려 했고, 결국 대주교는 전승 대공에게 살해당했소.”
하지만 목격자가 나서서 영웅의 타락을 증언하자, 전승 대공을 지지하며 잠시 추이를 지켜보자던 이들도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기의 끔찍함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욱 많으니, 마기에 침식되어버린 마인들이 어찌 변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랜 시간동안 마기가 넘치는 서부 땅에서 싸워온 전승 대공이기에 마기에 의한 침식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정의롭기에 그는 결국 타락하고 말았다.”
때를 맞추어 퍼져나간 소문은 꽤나 그럴싸했다.
전승 대공이 누구보다 오랜 시간 동안 서부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오랫동안 마기에 노출되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전승 대공의 타락을 증언하고 나선 이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들이었고, 마왕과의 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 명예와 신앙을 걸고 전승 대공이 대주교를 살해했고, 성검과 함께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며 몇 번이나 맹세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승 대공은 소문처럼 그리 훌륭한 위인도, 정의로운 자도 아니었소. 몸을 아끼지 않는다던 헌신적인 기사가 어찌 안전한 창공에서 아군이 죽는 것만 지켜보겠소.”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나는 전승 대공이 과거 용사를 몇 번이나 폭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일을 비추어보건대 소문과는 달리 용사와 전승 대공의 사이는 전부터 틀어져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 지경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승 대공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전승 대공과 함께 전장에 섰던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병사들이 나타나 전승 대공이 소문처럼 정의로운 자가 아니라 증언했고, 분위기에 휩쓸린 자들이 온갖 되도 않을 소문을 만들어냈다.
“제국의 후광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전승 대공은 살인마에 불과하다. 그에게 학살당한 병사들과 기사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런 전승 대공이 자비롭고 헌신적인 영웅이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자는 학살자이며 전쟁광이다.”
과거 전승 대공의 영웅적인 행보에 열광하며 그를 대륙 최고의 영웅이라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던 분위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온갖 날조와 소문 속에서 전승 대공은 아덴버그 제국의 선전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영웅으로 전락했다.
“전승 대공을 숨겨주거나 두둔하는 자는 교국을 적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크나큰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전승 대공이 있는 곳을 제보하거나, 그 신병을 교국에 인도하는 자가 있다면 교국의 이름을 걸고 막대한 포상을 약속한다.”
마왕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많은 힘을 소진한 교국이었지만, 영향력만큼은 건국 이래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중부 왕국의 유력자들이 모조리 친교국 성향의 인물들로 채워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서 전승 대공의 행방을 찾아 날뛰어대니, 중부 전체가 전승 대공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적대적이고 맹목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전승 대공의 타락에 대해 여전히 불신을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교국의 횡포에 몰락한 유력자들과 전승 대공과 실제로 함께 해본 전장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허무맹랑한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았고, 뭔가 숨겨진 내막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단지 그 내막이 뭔지 알 수 없었기에 몸을 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마왕과 결탁한 것은 전승 대공이 아닌 교국이다. 그들은 용사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마왕과 거래를 했고, 참람되게도 신께서 결정한 성검의 주인을 부정하였다.”
이베리아가 교국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전승 대공은 교국으로부터 용사의 탐색에 대한 협조를 요청받았고,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마다치 않고 홀로 용사를 찾기 위해 서쪽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마왕과 악전고투하여 씻을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
다시 한 번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전승 대공의 지지자들이 전면에 나서 교국의 주장에 의혹을 표했다.
하지만 한 번 적대적이 된 여론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중부의 광신도들은 교국의 말 이외에는 그 어떤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전승 대공은 이미 마왕과 결탁한 배신자였다.
격분한 광신도들은 이베리아마저도 마왕과 결탁한 배신자로 치부했다. 그런 광신도들에 비하면 이성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교국의 행동에 우려를 표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소란은 있었지만, 결국 중부는 전승 대공을 배신자로 낙인찍는 듯 보였다. 적어도 이베리아가 또 한 통의 마법 전문을 사방에 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승 대공은 영웅이다. 서부의 몰락을 가장 처음 알렸고,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생존자의 구출에 홀로 크나큰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전승 대공은 마왕을 소멸시키고 악의 씨앗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전승 대공을 매도하는 것은 반인류적인 처사이며, 지극히 배은망덕한 행위이다.”
전승 대공이 마왕을 제거했다는 소식에 또 한 번 여론이 뒤집혔다. 물론 교국을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마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용사와의 싸움 때문이라며, 이베리아의 주장을 파렴치한 전공 가로채기로 몰아붙였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충격적인 주장에 사람들은 뭐가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각자의 이해와 믿음에 맞춰 전승 대공을 비난하거나 두둔하였다.
그러는 사이 교국이 중부의 왕국들을 움직였다. 당장 이베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왕국의 병력들이 대거 남하하여 이베리아를 위협했다.
“이베리아는 대륙의 평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전승 대공을 목숨 바쳐 지켜낼 것이다.”
이베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론이 몇 번이나 뒤집히는 동안 전쟁 준비를 마친 것은 이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베리아의 그라나도에 전승 대공이 있다.”
그 담대한 대응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이베리아가 전승 대공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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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줘서 고맙다.”
다시 만난 영웅은 그의 기억 속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그 창백한 낯빛을 보고 있자니, 존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울분이 솟구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으면서도, 도무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 사이에서도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기사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마치 병마에 치여 다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다 저 빌어먹을 교국이라는 놈들 때문이란다.
존은 새삼 급조해 만들어온 창을 꽉 잡으며 맹렬히 적개심을 불태웠다. 돌아보니 자신뿐 아니라 다른 피난민 출신 사내들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생전 제대로 창을 잡고 싸워본 적도 없는 이들이 지금만큼은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처럼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절망 속에서 자신들을 꺼내주고도 끝내 외면받았던 위대한 구원자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제 손에 쥔 작은 빵조각 하나 뺏기지 않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것밖에 모르던 자신들이었기에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존은 감사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전승 대공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게 너무도 송구스러워 존과 사내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부축받아 돌아선 그의 등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나마 감사를 표했다. 그가 그 말을 들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휘적휘적.
그저 등도 돌리지 않은 채 흔들어대는 성의 없는 손동작을 보며 거듭 고개를 숙여보였을 뿐이었다.
**
이베리아 대공은 전승 대공이 왜 굳이 자신의 위치를 알려 교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전승 대공이 이베리아에 있다는 소식이 퍼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찾아온 존이라는 난민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모를 조잡한 창도 무기랍시고 꼭 쥐고 찾아온 수십 명의 서부 출신 난민들은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기어이 이베리아군에 투신하기를 원했다.
그런 난민 출신 자원 입대자들이 벌써 수백 명이었다.
“허. 전승 대공, 그대라는 인물은 대체….”
이베리아 대공은 진심으로 전승 대공에게 감탄했다. 그간 대륙을 위해 무수히 많은 공을 세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위험을 알면서도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자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 뒤로도 수도 없이 많은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출신도 나이도 다 제각각, 그런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 전승 대공에게 목숨의 빚을 진 적이 있다는 것과 이제라도 그 빚을 갚고자 한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그들이 크게 전력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난민 출신 병사가 기천 명 모여있다 해도 각 왕국들이 고련해온 두어 개 중대의 보병들이나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합류함으로써 이베리아군의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교국의 선전과 날조 속에서 싹 텄던 전승 대공에 대한 의혹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들이 가진 것 없는 난민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난민들마저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몰려들 정도의 인덕을 지닌 인물이 소문처럼 악한일 리가 없었다.
“그때 전승 대공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지. 상상이 가슈? 그 지옥 속에서 홀로 마왕을 막겠다고 남은 전승 대공의 모습이.”
“중부의 귀족들 중 우리 같은 무지렁이를 전쟁통에 챙길 정도로 자비로운 위인은 없수다. 전선을 틀어막겠다고 영주들마저 우릴 버렸는데, 그분이 딱 나서서 우릴 지켜줬다 그 말이요.”
난민들의 입을 통해 전승 대공의 영웅적인 행보와 희생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승 대공은 교국의 선전과 날조에 훼손되기 직전의 그 찬란한 영웅 그 자체였다.
교국과 이베리아,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앞에 수백 명의 목격자들이 전승 대공의 정의로움을 하루종일 떠들어댔으니까.
“한 시름 덜었군.”
혹시라도 자신들이 악마의 편에서 싸웠다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망설이고 있던 용병대들이 이베리아와의 계약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계약서에 사인을 한 용병대들이 국경의 요새를 향해 그라나도를 나섰다.
하지만 아직도 병력은 부족하기만 했다.
중부의 왕국들 중 다수가 벌써부터 교국을 돕겠다고 나선 이상,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는 쉽게 메울 수 없었다. 그건 막대한 부를 통해 고용한 용병대들로도 채울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였다.
아덴버그 제국 본토의 지원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대규모 선단이 진즉에 출발했지만, 그들이 지원군과 함께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준비라는 건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전승 대공은 너무도 느긋했다.
“혹시 일이 위급해지면 대공 혼자만 몸을 빼낼 생각은 아니요?”
전승 대공이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상황이 워낙에 촉박하니 저도 모르게 날 선 어조로 묻고 말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제국과 동부의 왕국들에 대한 원망도 초조함을 부추겼다.
“한 번 내뱉은 말은 가급적이면 꼭 지키려는 편이오.”
아직까지 부상이 치유되지 않아 병색이 완연한 음성이었지만, 전승 대공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미안하오. 내 마음이 초조하다 보니 실언을 했소. 전승 대공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이베리아대공이 사과했다.
“이해하오. 내가 너무 손 놓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전승 대공은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 때가 되었소.”
알 수 없는 말에 미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국경의 요새에서 긴급한 전문이 날아들었다.
“북방 기병 2만이 국경에서 대치 중이던 중부 왕국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국경 요새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뭐라! 그들이 왜 갑자기!”
전문을 들고 뛰어온 전령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북방 기병 2만! 조력의 의사를 표했습니다!”
깜짝 놀란 이베리아 대공이 전승 대공을 바라보았다. 전승 대공은 마치 그들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너무도 당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북방의 대족장, 다륜과 그 휘하 기병들이 바로 내가 말한 나의 형제들이요.”
먼저 온 전령이 자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전령이 이베리아대공을 찾았다.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던 동부 왕국 연맹의 군대들이 일제히 전선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덴버그 제국의 전문이 그라나도에 날아들었다.
[이베리아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