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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눈에는 눈 이에는 이 (4)
“컥!”
멀리 연합군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김선혁이 다시 한 번 피를 쏟아냈다.
“괜찮은가?”
마렉의 질문에 그가 새빨간 피로 흥건한 턱을 훔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시오?”
“그래 보이지는 않는군.”
그래도 교국의 사제단이 탈진을 할 정도로 신성력을 퍼부어댔던 게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던 얼마 전에 비하면야 지금의 그는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교국의 인물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심력을 잔뜩 소모한 데다가 칼바람 부는 창공을 날아 이동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전승 대공!”
서부로 떠났던 그리핀이 돌아왔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이베리아 대공이 피 칠갑을 한 김선혁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요! 그 피는 또 뭐고! 아니, 사정은 나중에 듣는 게 낫겠소. 일단 몸부터 추스릅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제 몸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부축하겠다며 법석을 떨어댔다.
스윽.
하지만 김선혁은 부축을 거부했다.
“지금 뭐하는….”
“쉴 때 쉬더라도 그보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소.”
말을 할 때마다 피가 쏟아지니 이베리아 대공의 안색도 덩달아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지금은 듣지 않겠소! 뭣들 하느냐! 어서 전승 대공을 침소로 모시지 않고!”
다시금 부축을 하겠다고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는 디에고 벨라스의 손길을 뿌리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꼭 지금 들으셔야 하오.”
고집스러운 눈빛을 본 이베리아 대공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제국의 유력자가 그라나도에서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가 쉽사리 고집을 꺾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용건을 듣고 바로 치료를 시작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눈치였다.
“지금 당장 국경을 강화하시오.”
그런 이베리아 대공을 보며 김선혁이 무겁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교국의 병력이 이곳을 향해 남하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교국의 포위망을 벗어나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부상조차 돌보지 않고 최대한 서둘렀다고 하지만, 아무리 드본이 날래다고 해도 마법 전문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대신전이 소식을 전해 받고 대책을 강구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김선혁이 생각하기에 대신전이 마련할 수 있는 대책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사건을 덮는 것이었다.
“모든 게 벨라스케스 공의 말대로였소. 하지만 벨라스케스 공도 미처 몰랐던 것이 있지. 사라진 용사는 마왕과 싸우다 실종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국에 억류되었던 거요.”
교국의 압박 속에서도 이베리아의 존속을 지켜온 노련한 정치가답게 이베리아 대공은 금세 혼란을 털어내고,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꿰어 맞췄다.
“성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은 이베리아 대공이 금세 성난 얼굴로 교국이 있을 북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
“툇! 빌어먹을 늙은이들! 머릿속에는 제 권력을 지킬 생각밖에 없는 그 노물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과격한 언행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온갖 트집을 잡으며 이베리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교국을 피해 차라리 아덴버그의 속국이 될 것을 천명한 이베리아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그간 교국에게 무수히 시달려왔을 이베리아 대공이 보이는 해묵은 증오가 그리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전의 인물들은 용사와 성검의 신성과 권위를 나누고 싶지 않았을 거요.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성검을 제 것인 양 여겨왔을 테니까.”
“그리고 대공께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걸, 그들 역시 눈치챈 게로군.”
단번에 모든 정황을 파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굳은 얼굴로나마 이베리아의 국경이 굳건함을 알려주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베리아의 해군은 강이나 오가던 교국의 조잡한 선단들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군이요. 하나뿐인 육로 역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축성한 요새와 정예 용병들로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으니, 대공께서도 더는 걱정 말고 어서 부상부터 치유하시오.”
마왕과의 전쟁으로 기력이 쇠한 교국이 국경을 넘을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며 재차 휴식을 권유하는 이베리아 대공을 보며, 김선혁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그러시오. 뻔뻔한 교국이라면 지금 같은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부인하는 걸 선택할 거요.”
그가 다시 한 번 그걸로는 부족하다 말하자, 이베리아 대공이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들이 잡아뗄 수 없는 증거라도 갖고 있는 거요?”
김선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베리아 대공이 다시 물었다.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소?”
그는 대답 대신 마렉에게 건네받은 철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음?”
유달리 뽀얀 검날과 왠지 모르게 성스러운 철검을 본 이베리아 대공이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맞소. 그들이 그토록이나 되찾으려 했던 성검 발뭉이요.”
그의 확답에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맙소사.”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갖고 있는 이상,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오.”
성검을 손에 얻기 위해 자국의 자랑인 용사마저 헌신짝처럼 내버린 교국의 수뇌부다. 성검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게 너무도 뻔했다.
“국경의 요새에 전문을 보내 방비를 강화하고, 도시에 체류 중인 모든 용병대의 대장들을 소집해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베리아 대공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장(諸將)들의 소집령을 내렸다.
“한 시가 급하니 서두르도록 하라!”
전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뒤로도 이베리아 대공은 연달아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이베리아 대공이 법석을 떠는 사이 김선혁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휘청.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몸을 비틀거리는 그를 본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일단 대공께서는 몸부터 정양하고 계시오. 내 이따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잔뜩 뒤섞인 가운데, 짙게 녹아든 원망의 감정이 똑바로 그를 향해 쏘아져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교국의 압박을 피해 제국의 속국이 되었더니, 제국의 대공이라는 자가 교국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원망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안 좋은 소식이 있소.”
김선혁 역시 미안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또 뭐요!”
날카로운 반응에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서쪽의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연합군의 병력이 이곳을 향해 올 가능성도 염두에 두도록 하시오.”
“그들은 움직일 수 없소. 아무리 밀약이 있었다고 하나 마왕을 어찌 믿고 힘들여 얻은 서쪽 땅의 방비를 소홀히 하겠….”
단정 짓듯 확신에 차 있던 이베리아 대공의 음성에 조금씩 힘이 빠지더니, 끝조차 맺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대공, 설마….”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베리아 대공을 보며 김선혁이 힘주어 말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마물들과 마수들이 떼를 지어 전선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주변의 소란이 뚝, 하고 끊어졌다.
정신없이 오가던 이베리아 대공의 가신들도, 심상치 않은 사건의 전모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호위병들도 완전히 굳어버린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은….”
이베리아 대공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대답했다.
“마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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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에 오염되어버린 대지에서 정기를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몇 개인가 커다란 지맥이 걸려들었다. 그 결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 모여들었다.
만약 골드레이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김선혁은 애써 끌어모은 지기를 마왕에게 써보기도 전에 몸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골드레이크의 도움을 받고도 정기를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만큼 사방에서 모여든 지기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왕을 이길 수 있었다.
어쩌면 형체 없는 안개의 모습을 유지했다면 마왕은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왕은 마룡의 강대한 육신을 탐냈고, 기어이 제 이점을 버리고 하나가 되었다.
그 탐욕과 우둔함이 승패를 갈랐다.
사방에서 모여든 지기가 거대한 철퇴가 되어 마룡의 육신을 완전히 짓이겨버렸고, 그 잔해마저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
마왕은 그렇게 소멸됐다. 하지만 마왕의 원천이었던 혼돈의 파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땅이 뒤집히고 용암이 넘쳐나는 지옥 속에서 피어오른 한 가닥 연기가 슬며시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한 김선혁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신을 한 채로 연기를 추적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악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혼돈의 파편을 추격하기에는 몸 상태가 너무도 좋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끌어다 쓴 대가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육신의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었고, 마기에 의해 침식당한 골드레이크 역시 그대로 두었다간 마룡화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결국 김선혁은 마왕을 소멸시킨 것으로 만족하고 서부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귀환하는 과정에서 용사의 반려 마람을 만났고, 일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용사는 마왕에게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한 것은 마왕이었다.
마왕은 용사를 피해 도주했고, 용사는 무리해서 마왕을 추격하는 대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군에게 성검을 탈취당한 것이다. 그리고 성검을 잃은 용사는 평범한 상급 병과의 이방인에 불과했다.
결국 용사는 교국의 숨겨진 검, 이단 심판관들에게 억류당하고 말았다.
마람이 성검을 탈취해 달아난 것도 그때였다.
모든 내막을 알게 된 김선혁은 더없이 분노했으나, 그 무렵 그의 몸 상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자신을 찾아 근방을 수색하던 마렉을 만나 성검을 건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을 끝으로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 뒤로 골드레이크가 폭주했고, 연합군과 만나기까지 김선혁은 쭉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던 그는 결국 깨어났다. 그리고 교국을 향해 복수를 천명했다.
“그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요.”
“허.”
김선혁의 말에 이베리아 대공이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베리아에 닥친 위험에 대한 책임을 묻기에는 그의 여정이 지나치게 영웅적이었던 탓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왕을 소멸시킨 것 하나만 해도 더 이상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서부의 몰락을 가장 처음 알린 것도 대공이고, 서부를 정리한 것도 대공이군.”
한참 만에 입을 연 이베리아 대공의 음성은 더 이상 신경질적이지도 격앙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감탄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아직 서부가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니오.”
마왕은 소멸했지만, 위험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사라진 혼돈의 파편이 언제 새로운 그릇을 찾아 혼돈의 사도를 내세울지 알 수 없었다.
“그거야 남아있는 자들이 할 일이지. 이만하면 대공은 할 만큼 하지 않았소?”
“서부야 그렇다 치지만 이베리아의 문제가 남아 있소. 지금은 내 꼴이 이러나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국의 군대가 이베리아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겠소.”
이베리아 대공이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덮어놓고 몸 상태를 두고 거절하자니 이베리아의 병력만으로 교국을 막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 말대로 해주시오.”
그런 이베리아 대공을 보며 김선혁이 말했다.
“간략하게 이번 사건의 전모를 적어 사방에 알리시오.”
“그렇지 않아도 교국이 멋대로 사건을 조작하여 명분을 선점할까 하여, 이미 그렇게 조치한 바요.”
발 빠르게 움직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수완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방에 전문을 날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하시오.”
이번에는 이베리아 대공도 그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소? 교국을 도발해서 얻는 게 없을 텐데.”
일부러 전승 대공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봐야 교국만 자극할 뿐이라며 반대를 표하는 이베리아 대공에게 그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의 형제들이 나를 찾아올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