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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
“그분은 어디 가시고, 성검은 또 왜 대공의 손에 있는 겁니까?”
대주교는 시치미를 뗐지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알고 있었군.”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은 눈앞에 있는 늙은 성직자가 박준민의 실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대주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만약 당신이 준민이의 실종과 무관했다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거든.”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무슨 말이긴.”
김선혁의 음성은 듣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건조했다.
“내가 당신에게 손을 쓰는 데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는 말이야.”
마치 형의 집행을 앞둔 사형 집행자의 그것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어차피 아무리 캐 물어봐도 대답은 안 할 테지.”
대주교가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렸다. 하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짧은 한마디와 함께 김선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비칠거리는 몸짓이었지만, 그가 뭘 하려는지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대, 대공! 멈추시오!”
칼자루를 거꾸로 잡고 높게 치켜든 그를 본 성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푸욱.
그리고 성검은 너무도 쉽게 대주교의 몸을 파고들었다.
“커, 커억.”
짧은 단말마를 내뱉은 대주교가 몸을 한차례 떨더니, 이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저, 전승 대공!”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뭔가 복잡한 내막이 있어 보여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설마 그가 정말로 대주교의 목숨을 빼앗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철컥.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신전 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내 그대를 믿었건만!”
성기사가 분노 가득한 음성으로 외치며 칼날 가득 성광을 휘감았다.
“어찌하여 아국의 대주교를 해하였단 말이냐!”
김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만 내몰아쉬었을 뿐이었다.
“대답하라! 대체 왜!”
성기사가 길길이 날뛰어댔다. 자신이 살려낸 전승 대공에게 자국의 대주교가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배신감이 클 만도 했다.
완전히 기력을 소진한 그를 대신해 나선 것은 검성, 마렉이었다.
“대주교는 마왕과 결탁하여, 전승 대공을 함정에 빠트렸다. 그로 인해 대공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냈을 뿐이다.”
시끄럽게 고함치던 성기사가 입을 다물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아국의 대주교가 사악한 마왕과 결탁했다니!”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성기사는 교국의 신성이 모욕당했다 여기고는 처음보다 더욱 사나운 음성으로 마렉에게 소리쳤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그대들은 아국의 대주교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아국을 욕보이고 허무맹랑한 말로 연합의 결속을 해하려 했으니, 이는 그대들이 서쪽 땅에서 마기에 침범당했기 때문이리라! 그 증거는 원래는 금빛이었으나 검게 변해버린 전승 대공의 아룡이다!”
성기사가 정말로 아룡이 마기에 침식된 것처럼 김선혁 역시 마기에 오염되었다고 여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다른 이들이 듣기에 그 말이 꽤나 그럴싸하게 들렸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신전 기사들은 악과 결탁한 저들을 무릎 꿇려라! 여의치 않다면 즉결 처분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 자리에서 판결이라도 내리듯 떠들어대는 성기사에게 마렉이 코웃음을 쳤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든가.”
마렉의 노골적인 조롱에 성기사와 신전 기사들이 검날에 성광을 두르고 거리를 좁혔다. 멀찍이 물러나 있던 성전사들 역시 제국의 두 초인을 포위하고는 언제든 창과 칼을 내지를 준비를 했다.
“만약.”
그때 김선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판테이아 기지에서의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그는 여전히 기력이 없어 보였지만, 그 음성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위엄이 있었다.
“대공이야말로 내가 보이는 마지막 경의를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오.”
오직 믿음만을 신봉하며 살아왔던 성기사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 내어 설득을 시도했다.
“내가 마왕과 결탁했다면 이건 어떻게 설명할 참인가.”
나직한 음성과 함께 그가 성검을 내밀었다.
“만약 그대의 말처럼 내가 마왕과 한통속이라면, 내가 어찌 성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신실한 자에게만 그 힘을 허락하며, 사특한 마음을 먹은 자는 손잡이를 잡는 것만으로도 성화(聖火)에 불타 재가 되어버린다는 성검이다.
만약 정말로 김선혁이 마왕과 손을 잡은 것이라면 성검은 진즉에 거룩한 성화를 피워올리며 사특한 마의 종을 한 줌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멀쩡했고, 성검 역시 잠잠하기만 했다.
“내가 아는 성검 발뭉은 2미터에 달하는 화려한 대검, 그건 성검이 아니다.”
성기사는 그의 말을 부인했다.
“그건 용사의 손에 쥐어졌을 때고, 그대도 알 텐데? 용사가 나타나기 전까지 대신전에 보관되어 있었던 성검 발뭉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지.”
김선혁의 말에 성기사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 대로였다. 용사와 함께 성장하는 성검 발뭉에 대한 이야기는 전장에서도 유명했고, 이전의 성검이 어땠는지 역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철검은 초기의 성검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사는 김선혁의 말을 완강히 부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대주교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한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김선혁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
푹.
그의 손을 떠난 검이 대지에 깊게 파고들었다.
“발뭉. 저들이 너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검이 찬란한 섬광을 줄기줄기 뿜어댔다.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얗고 순결한 광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신성력 그 자체였다.
비록 그 빛이 용사의 손에 쥐여 있었을 때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스스로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진짜 성검….”
용사와 함께 행방불명되었던 교국의 보물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성기사는 결코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성검의 진위여부가 진짜로 판명 났다는 것은 결국 전승 대공이 마왕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왕과 결탁하지 않은 전승 대공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교국의 대주교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한가?”
성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교국이 똥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반대로 한때나마 전승 대공이 마기에 오염된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결백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해를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고, 김선혁은 무모할지언정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의혹마저 걷어내기로 작정했다.
“마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누구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신전 기사들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온몸을 낡은 헝겊으로 칭칭 감은 괴이한 행색을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그에게 듣도록 하시오. 그야말로 이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니까.”
“대체 저 자가 누구이길래….”
성기사는 사내의 정체에 대해 강렬한 의문을 표했고, 그는 기꺼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마람. 그는 거짓을 모르는 퀘이샤 일족의 전사이며, 용사와 영혼을 나눈 반려다.”
사내는 용사에게 반려의 맹세를 했던 퀘이샤 전사, 마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용사가 사라졌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던 목격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제야 그림자처럼 용사의 뒤를 따라다니던 요정 궁수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성검 발뭉을 전해준 이 역시 마람이지.”
성기사는 눈을 감은 채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꺼낸 말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전 성전사들과 신전 기사들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신병을 구속하라.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전사들의 창이 연합군의 지휘관들을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요!”
“갑자기 뭐 하는 건가!”
깜짝 놀란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항의를 해보았지만, 성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분의 정의가 한 점 그늘 없이 모든 진실을 비추는 그날, 그대들은 다시 자유를 얻을 거요.”
아무래도 성기사는 교국의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힐 수도 있는 이 사안이 섣부르게 퍼져나가길 바라지 않는 듯했다.
“전승 대공도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소.”
열 명의 신전 기사들이 김선혁을 에워쌌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 하나를 포박하는 데에도 신전 기사들의 태도는 신중하기만 했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강대한 적들을 수도 없이 무릎 꿇린 전승의 명성은 그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자리에 전승 대공 못지않은 괴물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흔의 신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검성이 어느새 김선혁의 곁에 서 있었다.
“마람.”
살기등등한 기사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김선혁이 마람을 불러들였다.
“나는 이곳에 남아 그를 찾아보겠습니다.”
“준민이라면 어차피 성검이 내 손에 있는 이상 교국도 어찌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너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위험할 거라고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람의 흔들림 없는 음성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퀘이샤들은 말 드럽게 안 듣는 족속들이니까. 나도 그 뜻을 존중하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여러모로.”
마람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군.”
숨길 마음조차 없어 보이는 그들의 대화에 성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들이 이곳을 벗어나도록 절대로 두고 보지 않을 거요.”
성기사의 손짓에 신전 기사들이 한층 더 삼엄한 기세를 흘려대며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삼엄하게 포위망을 두른다고 해도 하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캬아아아아!
날카로운 포효성과 동시에 그리핀이 날아와 김선혁을 잡아챘다.
쐬에에엑.
그와 동시에 신전 기사들이 냅다 던진 검이 그리핀의 날개와 몸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렉은 그 검이 그리핀을 맞추도록 두고 보지 않았다. 마렉이 소환해낸 검의 형상이 드본의 주변을 맴돌며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쳐냈다.
“합!”
그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접근한 성기사가 뛰어오르며 성광을 가득 머금은 검을 휘둘렀다. 그조차도 마렉은 너무도 쉽게 막아냈다.
쾅!
힘껏 뛰어올랐던 성기사가 마렉이 휘두른 검에 두들겨 맞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금세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뛰어오를 준비를 했지만, 이미 그리핀은 검이 닿지 않는 높은 창공을 날고 있었다.
“대공! 이대로 돌아가면 오해만 커질 뿐이요! 직접 대신전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그 오해를 푸시오! 내 약속하건대 그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대는 오히려 교국으로부터 사죄를 받게 될 거요!”
성기사가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김선혁을 설득해보았지만, 애초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미안하지만 난 더 이상 교국을 믿지 않는다. 하물며 썩을 대로 썩어버린 대신전의 윗대가리들이라면 더더욱.”
김선혁의 노골적인 적개심에 성기사가 다시 한 번 그리핀을 격추시키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성전사단이 준비한 화살이 수도 없이 하늘을 수놓았지만, 강력한 신전 기사들의 공격마저 막아낸 마렉의 방어를 뚫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승 대공!”
성기사가 절규하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한 번 날아오른 그리핀은 다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대신전에 전하라!”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귀에 파고드는 마력이 있었다.
“내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그날, 내 발로 스스로 대신전을 찾겠다! 그리고 그날 직접 교국에게 책임을 묻겠다!”
교국 역사상 이제껏 수도 없이 많은 이단과 적들이 교국을 상대로 같은 말을 내뱉었지만, 그 뜻을 이룬 자는 없었다.
하지만 성기사와 신전 기사들은 협박도 못 되는 으름장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