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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지나치게 무례한 검성의 태도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대주교는 그 공격적인 태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지요.”
짐짓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대꾸하는 대주교의 태도는 한 점 나무랄 곳이 없는 성직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검성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해서 삐딱선을 탔다.
“대답은 그럴싸하군.”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성의 적개심에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구려.”
“근래 들어 아덴버그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나, 이곳은 동부가 아니요. 말씀을 하시려거든 먼저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거요.”
그중에 몇몇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검성에게 불만을 표했다. 아스토리아 교국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왕국의 인물들이었다.
“그보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설명부터 듣는 게 순서 아니겠소?”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중부의 왕국 소속은 아니었다. 동부에서 지원을 나온 왕국의 인물들이 슬쩍 검성의 허물을 덮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저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오긴 했지만,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상 자신들은 곧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새삼 이제 와서 전우애를 내세우기에는 아덴버그 제국의 세가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끄응. 일단 들어는 봅시다.”
불만을 표하고 나섰던 지휘관들이 못 이기는 척 한발 물러났다.
대주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몇 마디 쏘아붙이긴 했지만, 그들도 내심 검성이 보이는 영문 모를 적개심의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로아힘 공께서는 우리 교국이 구조 활동에 손을 놓았다고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아덴버그의 기사들은 대대로 의기가 높았으니, 사지에 남은 형제를 그대로 두고만 보는 우리의 행태가 영 못마땅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때 대주교가 나서서 제멋대로 검성의 행동을 설명해버렸다.
“하지만 그건 오햅니다. 교국의 수없이 많은 기사들과 성전사들이 수시로 전선 너머를 드나들며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형제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대주교의 말이 꽤나 그럴싸했던 탓이다.
“이걸로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군요.”
검성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고, 사람들은 검성의 침묵이 오해가 풀렸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럼 이제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어찌 되셨는지요?”
적당히 분위기를 환기시킨 대주교가 다시 용사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검성은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대주교는 마치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한 게로군요. 하기야 저 넓은 서부에서 그분의 흔적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실로 안타깝고 두렵습니다. 대륙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거듭 저 악의 거두를 꺾지 못했으니, 앞으로 대륙이 어찌 될지 두려울 뿐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그 말이 사실인양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치명상을 입은 채 돌아온 전승 대공의 모습은 승자가 아닌 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니까.
“그래도 두 분께서, 아니, 아덴버그가 아국을 위해 보인 우정과 헌신은 절대로 가벼이 여기지 않겠습….”
“우정이라….”
처음의 질문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던 검성이 대주교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귀하가 말하는 우정이라는 건 친구를 적에게 팔아넘기는 것인가. 참으로 잘난 우정이로다.”
이제까지 보였던 검성의 무례가 꼬장꼬장한 노기사의 오해라고 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발언은 차원이 다른 무게가 있었다.
검성은 마치 교국이 무언가 더러운 수작이라도 부린 듯이 말했고,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
“지나친 말씀이외다! 아덴버그의 공작께선 말씀을 삼가시오!”
“그게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건 간에, 이건 명백히 교국과 중부에 대한 모욕이요!”
대번에 소란이 일어났다. 중부 왕국의 인사들은 자신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흥분해서 떠들어댔고, 동부 출신의 지휘관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굳은 얼굴로 추이를 지켜보았다.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는 모르나, 이번에는 저도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군요.”
대주교가 엄한 목소리로 검성을 나무랐지만, 검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돌아가면 대신전에 고해 이 일을 공론화 시키겠습니다.”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 자겠군.”
으름장을 놓는 대주교를 보며 검성은 오히려 비아냥댔다. 어지간한 대주교마저도 표정이 변할 정도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이익….”
대주교가 분개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크흐으으….
뒤늦게 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숨결을 느낀 것이다.
“전승 대공의 아룡이!”
검성에게 제압당해 거꾸러졌던 드레이크가 소리 없이 다가와 대주교의 뒤에서 입을 쩍 벌렸다.
“대주교님을 모셔라!”
정예 신전 기사들이 순식간에 성광을 두른 검을 뽑아들고는 아룡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검성이 두고 보지 않았다.
사악.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참격이 신전 기사들의 발치를 베고 지나갔다.
“처음에 분명 말했다. 전승 대공의 아룡에게 단 한 번의 칼질도 허용치 않겠다.”
순식간에 일어난 검성의 기세가 신전 기사들을 찍어 눌렀다. 소리 없이 스쳐간 참격에 놀라고, 기세에서 다시 한 번 눌린 신전 기사들이 잠시간 지체하는 사이 드레이크의 입속으로 대주교가 사라졌다.
“그만.”
만약 어디선가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대주교는 그대로 아룡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전승 대공!”
흉악한 아룡을 단 한 마디 말로 제지한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상황도 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드시오?”
“몸은 어떻소!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참으로 다행이오!”
대주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금세 몰려들어 김선혁에게 몸 상태를 물었다.
“버틸 만하오. 다 사제님들 덕분이오.”
의연한 대답과는 달리 그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하기만 했다. 심지어 말이 끝날 무렵에는 한 움큼 피를 토하기까지 했으니, 환호하던 사람들도 금세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합시다.”
그런 사람들을 손짓으로 물리친 김선혁이 가만히 골드레이크를 불렀다.
“골디.”
먼 서부에서부터 제 주인을 태우고 쉬지 않고 달려온 아룡의 몸 상태는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육신이야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텨낸다지만, 육안으로 구별이 될 정도로 진행된 마기의 침식은 심각할 지경이었다.
“일단 쉬어.”
골드레이크는 대답 대신 불길한 적광이 감도는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적진 한가운데 남겨질 주인이 걱정되어 휴식조차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나를 어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골드레이크에게는 휴식이 절실했다. 얼마 전에 재회한 이후로 지성을 되찾은 골드레이크가 지금처럼 금수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마기의 침식이 너무도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억지로 버티고 있다간 골드레이크 역시 서부에서 보았던 마룡이 되고 만다.
“필요하면 부를 테니, 어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고 나니 그제야 골드레이크가 스르륵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히익!”
골드레이크가 다소 애매한 타이밍에 놓아준 덕에 생매장당할 뻔했던 대주교가 흙 위로 머리만 빼놓은 채 기괴한 비명을 질러댔다.
“대주교님을 모셔라!”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검성의 압박 탓에 뒤늦게 신체의 자유를 되찾은 신전 기사들이 대주교를 향해 달려갔다.
“멈추시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대주교에게 도달할 수 없었다.
“전승 대공?”
김선혁이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잠시,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소?”
그의 간곡한 부탁에 신전 기사들이 곤란한 얼굴로 대주교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 살려줘!”
반쯤 정신이 나간 대주교는 여전히 채신머리없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주 잠… 컥.”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피를 한 움큼 토해내는 그를 본 신전 기사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물러나라. 이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고맙소.”
성기사의 말에 신전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나고, 김선혁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 몸으로 이리 나선 건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믿겠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대주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를 거듭 쏟아낼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못했던 그의 걸음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뭣들 하고 있는 건가! 날 어서 꺼내다오!”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대주교가 뒤늦게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호통을 쳤다. 하지만 신전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다른 성전사들과 병사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뭣들 하는 거요!”
“현 시간부로 서부에서 침범해올 마물들에 대한 경계를 최우선으로 한다!”
대주교가 다시 호통을 치자 성기사가 아예 병력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내 말이 들리지 않….”
한참을 악을 써대던 대주교가 말을 멈췄다. 비척거리며 다가온 김선혁이 그 앞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전승 대공!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어서 날 꺼내주십시오. 대공의 아룡이 날 이리 만들었습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풀어주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대주교를 보며 그가 싸늘하게 물었다.
“대신전에서 당신의 위치는 어느 정도지?”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어서 나부터 꺼내달….”
김선혁은 대주교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바닥에서 흙 한 줌을 쥐어 올렸다.
스르륵.
“이게 무슨 짓….”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흙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대주교가 침을 뱉으며 난리를 피워댔다.
“지금은 흙 한 줌이지만, 다음에는 그 이상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서슬 퍼런 김선혁의 말에 대주교는 금세 조용해졌다.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를 발견한 것이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시퍼런 귀화가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는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게 너무도 괴상하고 무서워 대주교는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아무리 정치적인 계산을 하지 않는 신전 기사들의 우두머리라고 해도, 이렇듯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주교가 보이는 추태가 교국에 결코 이롭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기개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대주교의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성기사가 슬쩍 나섰다.
“전승 대공. 내가 대공의 부탁을 수락한 건, 그런 몸 상태로 나선 대공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지, 결코 아국의 대주교를 욕보이라는 뜻은 아니었소.”
잠시 고민하던 성기사가 이제라도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이미 땅에 처박힌 대주교의 체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전승 대공의 행동에 정당성이 있기를 바라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성기사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코 그게 성기사가 바란 방식은 아니었다.
“준민이, 아니 용사는 어디 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그분은 아군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전장에 남아 마왕과 싸우다 실종됐습니다. 대공께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서부로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더라고.”
그렇게 대꾸한 김선혁이 한발 물러나 있던 마렉에게 손짓을 했다.
훽.
마렉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핀의 등 위에서 한 자루 철검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이게 뭔지 알아?”
철검을 손에 쥔 그가 대주교의 눈앞에서 날을 까딱거렸다. 시퍼런 검날에 하얗게 질린 대주교가 머리를 뒤로 빼다가 갑작스레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 그건?”
“맞아.”
김선혁이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니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성검, 발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