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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화려한 복수 (5)
근방의 마기를 남김없이 흡수한 마룡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우람하지만 밋밋하던 등 뒤로 검은 마기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났고, 뭉툭하던 머리통에는 검은 뿔이 솟아났다. 다른 그 어떤 아룡보다 한층 용에 가까워진 형태, 하지만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악의 그 자체였다.
마룡은 용을 닮았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용은 과거 이 끔찍한 변종을 본 적이 있었다. 혼돈이 퍼트린 악의와 증오에 잠식되어 마침내 스스로를 잊고 광룡이 되어버렸던 동족들의 모습이 딱 저러했다.
[아아아아아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룡의 탄생에 용은 더할 수 없이 분노했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는 그 반려인 김선혁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크흐….”
조금의 여과도 없이 파고드는 압도적인 사념에 용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치 구토라도 하듯 유황내 나는 불꽃이 입가를 타고 쏟아져 나오고, 강인한 근육과 비늘로 둘러싸인 육신이 발작하듯 경련했다.
질식할 것 같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비탄과 분노가 완전히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끔찍한 사념의 파도에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 갑작스레 눈앞의 세상이 바뀌었다.
뇌를 녹여버릴 듯 파고들던 분노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비탄과 상실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이게 무슨….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섬뜩한 적안(赤眼)이 그의 눈 가득 들어왔다.
“아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머리통에는 오직 하나 남은 눈만이 번뜩이고 있었고, 무언가에 물어뜯기고 날카롭게 잘려져 나간 육신은 끊임없이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실로 끔찍한 몰골, 괴수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는 흉포함을 잃지 않았다.
뭉개진 주둥이를 쩍 벌린 괴수가 이를 딱딱거렸다. 발톱인지 뭔지 모를 뾰족한 것을 내민 괴수가 사방을 할퀴어댔다.
애꿎은 나무와 대지만 파여져 나갔다.
쐬에에에엑.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괴수가 비명을 터뜨렸다.
콰직.
벼락이라도 치듯 하늘에서 내리꽂힌 새하얀 물체가 괴수의 척추를 박살냈다. 어지간한 생명체라면 단 번에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괴수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크아!
흉폭한 괴성을 내지른 괴수가 기괴한 각도로 목을 꺾어 자신의 등을 짓밟고 선 무언가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새하얀 무언가가 움직였다.
콰드드드득.
부패한 육신에 머리통을 밀어 넣은 하얀 물체가 괴수의 척추를 뽑아버렸다.
“아.”
흉물스러운 신체의 일부를 콱 물고는 고개를 터는 새하얀 생명체를 본 김선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록 괴수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졌을지언정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비늘을 두른 생명체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비늘의 빛깔이 다를지언정 그건 분명 용이었다.
백룡, 괴수의 등을 짓밟고 서서 포효하는 존재는 만년빙설과도 같은 비늘을 두른 백룡이었다.
그가 잠시 놀라고 있는 사이에도 백룡과 괴수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크악.
척추를 통째로 뽑히고도 괴수는 죽지 않았고, 마침내 백룡의 날갯죽지를 물어뜯는 데 성공했다. 다시 날아오르려던 백룡은 날개가 꺾여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
다시 괴수가 이를 들이밀며 백룡의 몸을 물어뜯었다. 백룡 역시 지지 않고 괴수의 육신을 물어뜯고 난도질했다.
처음에는 백룡이 괴수를 압도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괴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저 백룡에게 깔린 채로 흉물스러운 몸뚱이를 버르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백룡이 괴수를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정기 넘치는 육신과 피를 남김없이 먹어치운 괴수가 다시 힘을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백룡은 이제 괴수에게 목덜미를 물려 사지를 버둥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도와야 해.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백룡을 도우려고 했다.
도와? 누구를 먼저 도와?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하나의 의문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시야가 확장되었다.
“이게 뭐야….”
김선혁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화염이 솟구친다. 그리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가 태풍처럼 몰아친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사방을 할퀴고, 대지가 울부짖는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순수하지만 그래서 더욱 파괴적인 에너지들이 몰아치는 이곳은 원초의 세계였고, 끔찍한 전쟁터였다.
백룡, 적룡, 청룡, 금룡. 흑룡.
형형색색의 비늘을 한 수십 마리의 용들이 그보다 많은 수의 괴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용들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날갯짓 한 번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숨결조차 권능을 불러일으키는 막강한 것이었다.
만년한설이 내려앉은 듯 모든 게 얼어버린 대지, 그 곁에는 화염이 들끓는 용암지대가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출렁이던 대지는 지기(地氣)가 쇠하여 사막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해일처럼 일어난 수기(水氣)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또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일까.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인한 용들의 권능조차 이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괴수들은 강했다.
물론 세상의 근원에 맞닿은 용들의 격 높은 권능에 비하면 괴수들의 힘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고 어떻게든 용들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번 문 용들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용들의 살점과 피로 배를 채운 검은 괴수들이 더욱 더 거대해졌다. 그것이야말로 용들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들은 꾸준히 검은 괴수들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용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마침내 용들의 수가 스물이 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괴수들은 더 이상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승리다. 그런데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조금의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용들 역시 어느 하나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턱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백금의 일족 중에 살아남은 건 그대 하나뿐인가.”
멍하니 전투의 끝을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은 문득 귀를 파고드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살아남은 용들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한 금룡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에도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에 몸이 절로 반응했다.
“일어나라. 그대가 아직 긍지를 잃지 않았다면.”
그런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어떻게든 저 시선과 마주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둥거려도 간신히 일으킨 몸뚱이가 도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아.
그제야 김선혁은 깨달았다.
금과 은이 섞인 듯한 육신, 꾸역대며 흘러나오는 핏물,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뿔과 한 쌍의 날개가 마저 잘려져 나가지 않는 한.”
고통에 차 숨을 헐떡이는 그 어조가 생소하기는 해도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생경하면서도 낯익은 이 음성은,
“나는 긍지를 잃지 않소.”
자신의 반려였다.
“그렇다면 날개를 펴고 뿔을 세워라. 백금의 일족이여. 아직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노니, 가장 거대한 악이 남았노라.”
금룡의 음성이 희미해지더니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아….”
찬란하게 빛나던 용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제 막 변이를 끝마치고 목을 곧추세우는 마룡 뿐이었다.
이건 설마….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 쌍의 날개와 하나의 뿔을 가진 용의 형상이 마룡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종말과도 같았던 그 전쟁은 그저 환상이 아니었다.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 반려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억 속에서 마룡의 몸뚱이를 이루는 검은 기운과 똑 닮은 것을 보았다.
괴수, 부패하여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검은 괴수들과 마룡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자신이 본 그 끔찍한 전투는 과거 있었던 용들과 혼돈의 싸움이자, 용들 간의 상잔이었다.
욱신.
오염되고 타락한 일족을 제 손으로 소멸시켜야 했던 용들의 운명을 연민한다. 어쩌면 이조차도 아직도 채 끊기지 않은 용의 사념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노는 아니었다. 마왕과 혼돈을 향해 들끓는 이 증오와 분노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가슴께를 움켜잡고 있던 김선혁의 손이 다시금 창을 꽉 움켜잡았다.
“빌어먹을.”
여전히 남은 비탄과 공허의 여운을 애써 털어낸 그가 마룡을 노려보았다.
테이밍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 강대한 용들마저 오염된 일족을 되돌리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무슨 재주가 있어 완전히 마기에 침식되어 마왕과 하나가 된 마룡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는가.
포기는 빨랐고, 각오는 단단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침식하는 저 부정하고 사악한 기운을 처단하는 것, 김선혁은 마음속에 한 자루 칼을 세웠다.
적당히 해서는 끝나지 않는다.
비록 상대가 완전한 혼돈이 아닌 혼돈의 파편에 불과하다지만, 자신 또한 완전하게 용의 힘을 얻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어정쩡하게 뒤를 생각해선 이 싸움,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마렉.”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렉이 용케도 그의 음성을 듣고는 드본을 하강시켰다. 아니, 하강시키려 했다. 만약 김선혁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마렉은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최대한 물러나시오.”
하지만 그는 마렉이 접근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멀찍이 물러나줄 것을 당부했다.
“대체 뭘 어쩌려고.”
지루하고 소모적인 싸움은 분명 용기사가 불리했다. 마왕은 온전히 제 몸을 복구했지만, 용기사의 아룡은 조금씩 침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이 기이한 괴수를 소환했다.
말려야 했다. 도와야 했다. 과거 용들이 겪었던 일을 그가 겪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렉은 검을 뽑아 들고 김선혁의 곁에 서는 대신에 천천히 드본과 함께 물러났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그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따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마렉이 한참을 물러나는 순간, 온 대지가 떨어대기 시작했다.
단순히 충격파에 의한 진동이 아니었다. 이건 지진 그 자체였다.
“헛.”
그 막대한 기운을 감지한 마렉의 시선이 김선혁의 발밑을 훑었다.
“저건!”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많은 금빛 줄기들이 김선혁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그렇게 퍼져나간 금빛 줄기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 울컥거리며 약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온 사방의 땅이 퍼석퍼석하게 변해 버렸다.
마치 저 금빛 줄기들이 온 대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건 마렉의 착각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이 일대의 정기를 모조리 끌어모으고 있었다. 과거 승산 없는 싸움에서 마왕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게 만들었던 비장의 한 수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날의 그는 패배했다.
과거의 그는 지금의 그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했고, 끌어모은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용혈기사에 오른 그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고, 또한 그와 함께 대지의 정기를 감당할 골드레이크가 있었다.
콰직.
오히려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건 어머니 나무의 생목으로 만든 창 쪽이었다.
“아마도 한 번.”
그 이후에는 다시는 이 창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오직 눈앞의 적을 처치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콰아아아아.
그 순간 마룡이 검은 숨결을 토해내며 그를 덮쳐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 떠 있던 용의 형상이 김선혁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