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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화려한 복수 (4)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또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용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의문 따위는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주변을 둘러싼 수십 만의 마물들이 저 허상에 불과한 용에게 겁을 집어먹었고, 그로 인해 마왕까지 가는 길이 훤히 열렸다는 것뿐이었다.
“고맙다. 용아.”
가슴 가득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김선혁이 웃어 보였다.
파앗.
질주하는 골드레이크의 발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용은 마치 그 작은 감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날개를 활짝 펴 보였다.
끄아아아아.
단지 날개를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마물들은 마치 작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개중에는 똥오줌을 지리며 발광을 하는 놈들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용의 위엄은 세상에 다시없을 대단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허상이든 아니든 하늘을 가득 뒤덮은 용의 위압감은 천지만물을 압도하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고, 실제로 마물들은 감히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가라.
실제로 용이 말을 걸어온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가서 너의, 그리고 나의 적을 부숴라.
하지만 김선혁은 용이 자신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보다 강력한 우군의 등장에 그가 창을 잡은 손에 꽉, 하고 힘을 주었다.
“골디!”
그 어느 때보다 힘 있는 음성, 골드레이크가 포효하며 발을 굴렀다.
콰드드드득.
겁에 질려 멍청히 주저앉아 있던 마물들이 대지에 일어난 강력한 파동에 그대로 짓이겨졌다. 골드레이크는 그렇게 마물들의 피와 육신을 밟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마치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카펫을 밟고 선 폭군과도 같은 기상이었다.
“박상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질주가 끝이 난 건, 수십만 마물의 주인이자 이 썩어버린 대지의 군주인 마왕과 마주하고 나서였다.
마왕은 더 이상 김선혁이 알던 이방인 박상진이 아니었다.
탐욕스럽게 주변을 집어삼키며 술렁이는 검은 안개, 그 어디에서도 인간 박상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번에 저 검은 안개 자체가 마왕의 본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왕이 아니고서야 저토록 사악하고 음험한 마기를 뿜어내는 존재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혼돈과 증오, 그리고 악의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범벅이 된 부정한 기운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러웠고, 심지어 자신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마물들마저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온 김선혁도 그 끔찍한 모습 앞에선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너 완전히 먹혀버렸구나.”
혼돈에게 집어삼켜져 이제는 실체 없는 덩어리가 되어버린 박상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쉬이잇. 쉬이이이잇.
그저 검은 혀를 날름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과연 마왕 박상진을 저리 만든 건 누구일까. 이방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던 노르딕의 귀족들인가, 그도 아니면 정당한 분노에 집어 삼켜져 끝내 자신을 잊고야 만 박상진 본인일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혼돈에 완전히 먹혀버린 박상진은 지금의 김선혁에게 있어 그저 반드시 쳐부숴야 할 적에 불과했다.
“드라카네이드.”
대화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단숨에 용인화를 이루었다.
크르르르.
금빛 섬광과 함께 유황내 나는 숨결을 토해내는 전룡이 또다시 세상에 현신했다.
전보다 한층 거대해진 체구, 아마 예전의 골드레이크였다면 이 육중한 기수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탈피를 마친 골드레이크는 5미터에 달하는 거인을 태우고도 조금도 버거운 기색이 없었다.
콰득.
골드레이크의 형태가 변화했다. 기암괴석과도 같은 비늘들이 마치 창처럼 날카롭게 끝을 세웠고, 그렇게 날을 세운 비늘들이 모조리 정면을 향했다.
땅의 아룡은 전보다 한층 더 포악하고 공격적인 모습이 되었다.
“허….”
하늘에서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렉은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마렉이 용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김선혁이 갑작스레 허공을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마렉은 압도적인 용의 형상을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전대 조율자에게 전승받은 지식을 통해 용이 어떤 존재라는 건 마렉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전설은 자신이 보아왔던 그 어떤 생명체와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왜 조율자의 의식이 용과 그 반려를 이 세상에서 배제하라고 하는지, 그제야 납득이 되었다.
저런 존재가 세상에 관여하는 건 그 자체로 공평하지 않았다.
용을 막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딱 하나 있었다.
과거 수많은 용들을 타락시키고 끝내 쇠락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끔찍한 거악, 혼돈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 자리에는 혼돈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본체가 아닌 일부 파편을 받아들인 존재라지만, 마왕이 혼돈의 화신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혼돈의 사도와 용의 반려, 이 자리에서 과거 세상을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두 존재의 대리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뭐가 검의 주인이냐. 진정한 초월자들 앞에서 이처럼 하찮은 것을.
마렉은 자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과거 용들이 혼돈에게 패배하여 쇠락했던 것처럼, 그 반려가 똑같은 길을 걷지 않게 자신이 도와야 했다.
이제는 조율자도 아닌 과거의 망령에 불과할지언정, 최소한 마왕과 용의 반려 둘 중에 누가 세상에 해로운 존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렉은 철검을 움켜쥐고 가만히 두 대리자들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언제든 허점이 보이면 칼을 찔러넣을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켰다.
**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김선혁이었다.
화르르르르.
유황내 나는 숨결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더니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겁화가 되어 마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왕은 너무도 쉽게 그 불길을 받아냈다. 요란하게 법석을 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몸을 쩍 벌려 타오르는 용인의 숨결을 모조리 집어삼킨 것이다.
용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 허망하게 스러졌지만, 김선혁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아직도 많은 무기가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드라흔의 가장 강력한 무기에 대해 말할 때 와이번을 꼽았다. 그 어떤 공격도 닿지 않는 창공에서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지르는 창과 바람이 그의 가장 큰 장기라 말했다.
김선혁 역시 이제껏 그렇게 생각해왔다.
레드번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쉽게 상대하지 못했을 강자들을 꺾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조금도 레드번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레이크, 땅의 아룡과 어머니 나무의 조합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땅에 발이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는 골드레이크가 땅의 기운을 다루는 아룡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골드레이크는 단지 땅의 기운을 다루는 존재가 아니었고, 땅의 기운을 주식으로 삼는 아룡이었다.
콰르르륵.
시간이 흐를수록 골드레이크가 성장했다.
작은 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던 육신이 한층 더 자랐고, 온몸을 감싼 비늘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머니 나무의 창이 전해준 땅의 기운 중 일부가 골드레이크의 몸에 녹아든 덕이었다.
지금이라면.
용인의 숨결에 다소 일그러졌던 검은 안개가 다시 뭉쳐들 즈음, 김선혁이 창을 꼬나잡고 돌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
용은 전투에 끼어들지 않았다. 단지 하늘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 박상진은 용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마왕은 그 거대한 존재감이 무색할 정도로 김선혁과 골드레이크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콰앙!
골드레이크의 돌격 앞에 마왕을 이룬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용인의 숨결이 흩어진 마기를 불태웠다.
마왕의 덩치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하지만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김선혁이 어머니 나무로부터 끝없는 활기를 전해 받듯이 마왕 역시 서부 전체로부터 마기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전투가 쉽게 끝이 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상황이었다.
김선혁은 계속해서 마왕의 본체를 흩어버렸고, 마왕은 계속해서 제 몸을 재구성했다. 그러는 동안 골드레이크의 비늘 색이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마기를 넘어 혼돈마저 품은 마왕의 품에 계속해서 뛰어든 여파가 서서히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먼 옛날 혼돈이 용들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마왕 역시 골드레이크를 오염시켰다.
하지만 마왕은 완전한 혼돈을 얻지 못했고, 골드레이크는 제 비늘 색이 조금 변하는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초월자들의 싸움치고는 지나치게 단조로운 전투,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고 가는 에너지들은 근방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대지는 수백 개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흉물스럽게 파헤쳐졌고,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들은 이 끔찍한 싸움에 휘말려 완전히 지리멸렬하게 변해버린 상태였다.
초월자들의 싸움에 애꿎은 마물들만 피를 본 셈이었다.
쾅!
골드레이크가 검은 안개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난동을 부려댔다. 강력한 이빨이 마기를 찢어발기고 그 몸통을 흩어버렸다.
그리고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처럼 마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을 복구시켰다.
골드레이크의 비늘이 조금은 더 어두운 빛깔이 되었다.
끝나지 않는 전투,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 이 지리한 싸움은 과거 용들과 혼돈이 수도 없이 치러온 격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가장 먼저 혼돈과 싸워 용들이 영락해버린 탓에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비사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었던 전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용이었다.
아직 완전한 계약을 이루지 못한 탓에 전면에 나서 반려를 도울 수 없었던 용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런 그녀의 분노가 정점에 달한 것은 마왕이 준비했던 수를 꺼내들었을 무렵이었다.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이어지던 반복적인 전투 도중에 마왕이 갑작스레 마수를 소환했다. 그런데 그 마수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아룡!”
한창 골드레이크를 타고 싸우는 데 몰두해 있던 김선혁이 이를 갈며 외쳤다.
언젠가 페어리 드래곤이 말해주었던 아룡들 중 유일하게 그가 테이밍하지 못했던 아룡, 지나치게 마왕의 본거지에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끝내 마기의 침식을 막지 못했던 용의 아종이 마왕의 수하가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마룡.
과거 동족에게 살해당하고야 말았던 마룡(魔龍)이 다시금 세상에 현신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골드레이크의 모습을 닮았으나, 검은 비늘과 붉은 안광으로 인해 불길하고 음험해 보이는 마룡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에 흩어져있던 마기가 마룡에게 빨려 들어갔다. 마왕의 본체를 이루고 있던 검은 안개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