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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화려한 복수 (3)
솟구치던 섬광이 금세 사라지고,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몸을 떨어댔다. 그리고 그마저도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땅속에서 불쑥 산이 솟아났다.
크르르르.
어두컴컴한 서부의 땅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금빛 산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번쩍 눈을 떴다.
맹스크에 남겨졌던 땅의 아룡이, 용혈기사의 소환에 응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놈이 왜 여기에….”
바로 곁에 있던 마렉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는 물었다. 맹스크에 있어야 할 아룡이 이곳에 나타난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스킬의 힘이라고 해둡시다.”
김선혁이 그런 마렉을 보며 태연하게 대꾸하는데 정작 자신도 처음 사용해본 용혈기사의 능력에 상당히 놀랐는지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룡들 중 단 한 마리에 한해서라지만, 단번에 수천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초월할 권능을 부여하는 용혈기사의 힘은 이제껏 살아오며 굳어진 그의 상식을 박살 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애써 덤덤한 척했지만,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맹스크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만 것만큼은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이 얻은 능력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방향을 알려 주시겠소?”
들끓는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성에 마렉이 먹구름 잔뜩 낀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대체 어쩔 생각인가?”
김선혁은 대답 대신 골드레이크의 위에 훌쩍 올라탔다.
“설마 싸우려는 건가?”
당장에라도 마왕을 향해 돌진할 듯 격앙된 그를 본 마렉이 골드레이크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다 함정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이건 질 낮은 도발에 불과해. 마왕과 싸우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네.”
마렉의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질 낮은 도발이라….”
성난 시선이 이곳저곳에 솟아난 둔덕들을 하나하나 스쳐갔다. 저 볼품없는 흙더미 하나하나가 더러운 협잡질과 같지도 않은 땅따먹기에 희생당한 기사들과 성전사들의 무덤이었다.
“그래. 질 낮은 도발. 자네를 격분시켜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마왕의 계략. 그러니 제발 분노를 가라앉히게.”
그의 시선이 무덤을 향해 있는 동안에도 마렉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비키시오.”
김선혁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마렉에게 말했다.
“이런 도발에 넘어가는 건 멍청한 짓….”
“좀 멍청하면 어떻소.”
마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선혁이 대꾸했다.
“손해 좀 보면 어떻소.”
방금 전보다 한결 가라앉은 음성은 마치 폭풍이 불기 직전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손해를 감수할 이유가 있냐는 말일세.”
마렉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말렸지만, 그는 끈질긴 만류에도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나는 손해 보는 멍청이가 되더라도 지금 당장 저 빌어먹을 마왕 새끼의 목을 비틀어야겠소.”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골드레이크가 위협적으로 발을 쿵 내리찍었다.
“비키시오.”
“자네 정도나 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사리 분별을 못하나.”
제 바로 앞에 괴수의 발이 떨어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렉은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그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물론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쩌겠소. 애초에 생긴 것이 이러고, 이곳에 와서 배운 게 이런 건데.”
공작의 자리에 올라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그의 근본은 중갑기병이었다. 그리고 중갑기병은 필요하다면 몇 배 몇십 배의 적을 향해서라도 주저 없이 돌격할 수 있는 미치광이들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그들과 똑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비키시오. 내가 마왕과 싸우기도 전에 당신에게 힘을 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자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마렉이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끔찍할 정도로 고집불통이구먼.”
“그런 소리 자주 듣소.”
그의 대답에 마렉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옆으로 물러나는 대신 드본의 위에 올라탔다.
“같이 갈 거요?”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왔으니, 그래야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마렉이 구시렁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자네와 함께 또 어딜 가면 내 성을 갈겠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벌써부터 철검을 소환해 꼬나쥔 마렉은 언제든 그를 따라 돌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게. 내가 뒤를 받쳐주겠네.”
“고맙소.”
김선혁은 짧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는 골드레이크에게 명령했다.
“가자. 골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드레이크의 육중한 거체가 검은 대지를 박찼다.
크아아아아.
온 세상을 찢어발길 듯한 광폭한 포효가 서부에 울려 퍼지고, 용혈기사와 검주가 이 검은 대지의 사악한 주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마물의 대군이 몰려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분명 더 쉬운 길이 있을 걸세.”
마렉은 미련이 남았는지 기어이 한마디를 더 내뱉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머니 나무의 창을 꼬나잡고는 마물들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후우.”
김선혁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골드레이크는 가장 선두의 마물들과 이미 격돌한 상태였다.
쾅!
압도적인 체격 차에 강인한 마물들이 그대로 짓이겨지고, 운 좋게 형체를 유지한 마물들의 사체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후우.”
그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내뱉는 숨 한 줌에 머리를 뜨겁게 달궜던 분노와 흥분이 흘러나갔다.
크아아아아!
최초의 격돌 이후 마물들의 사이에 파고든 골드레이크가 파도를 가르듯 마물들을 분쇄하며 내달렸다.
그 어떤 마물도 마치 산과 같이 거대하고 암석처럼 단단한 아룡의 발길을 늦출 수 없었다. 끝이 나지 않는 검은 파도를 헤쳐가면서도 골드레이크는 결코 버거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흉성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마물들은 계속해서 아룡의 무지막지한 돌진에 갈려나갔다.
할 수 있어.
자신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골드레이크에게 짓이겨지는 마물들을 보며 김선혁은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할 수 있어.
지금의 돌격은 결코 분노에 휩싸여 저지른 무모한 한 수가 아니었다.
서부에 처음 들어섰을 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강해졌다.
한때 몸을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사지를 옭아매던 마기는 더 이상 그를 구속할 수 없었고, 조금의 방해조차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 기분 나쁜 마기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레벨이 몇 오르고 말고의 차이가 아니었다. 용혈기사가 되기 이전의 자신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고,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파앗.
그를 둘러싸고 있던 금빛 서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마왕의 기세에 대항하기 위해 발작적으로 일으켰던 기운과는 격이 다른 섬광이었다.
서기와 마주한 마물들은 겁에 질려 몸이 굳었고, 그대로 골드레이크에게 짓밟혀 절명했다. 그리고 운 좋게 골드레이크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 있던 마물들은 더 이상 그에게 달려들 생각조차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오들오들 떨어댔다.
검은 파도가 갈라진다.
이제 마물들은 그와 부딪히기도 전에 알아서 길을 내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드본 위에 올라타 창공을 날고 있었기에 마렉은 김선혁이 미처 보지 못한 보다 먼 곳까지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물경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언데드들과 마물들이 금빛 괴수를 피해 분분히 물러난다. 아직 아룡이 당도하지도 않은 저 머나먼 곳까지 마물들이 미리 길을 터놓고 바닥에 엎드렸다.
휘몰아치는 검은 기운이 마물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보지만, 서기를 마주한 마물들은 금세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생애 다시 보지 못할 놀라운 광경, 마치 제왕의 행차 앞에 온 세상이 엎드려 경배하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폭군인가.
완전히 경로를 벗어나지 못한 마물들이 아룡의 발에 채여 짓이겨지는 모습을 본 마렉이 스스로의 감상을 정정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마기로 인해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잊어버린 수십만의 마물들이 겁에 질려 물러나는 꼴이라니, 감탄조차 내뱉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탄이 커질수록 의문이 생겼다.
마왕의 본거지에서 싸우기도 전에 수십만 마물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저 용기사의 강함은 과연 정상적인가.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자신 역시 특수병과인 검주였고, 수많은 이방인들을 겪어보았다. 개중에는 자신처럼 특수병과로 각성한 강자들 역시 있었고, 그들은 초인이 넘쳐나던 그 시절에도 유별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레벨이 엄청나게 높았다. 대륙 전체를 휩쓴 전쟁이 그들을 강인하게 단련시킨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그들도 김선혁이 보이는 지금의 위용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용기사는 50레벨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을 보인다는 건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조율자의 힘만 있었으면….”
다음 대의 조율자에게 대부분의 힘을 전수한 것이 지금에 와서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만약 지금의 자신에게 조율자의 능력이 전부 남아있었다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이유를 알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보아도 부질없었다. 이미 조율자의 중요 능력들은 다음 대 조율자인 맹스크의 여백작에게 모조리 전승해준 뒤였고, 지금의 그는 평범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저 지금은 질주하는 금빛 괴수를 따라 마기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렉은 끝내 의문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김선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자신이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마물들이 보이는 공포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최소한 마물들이 아닌 마수들만이라도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마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수들도 낮게 으르렁댈 뿐 골드레이크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다른 마물들처럼 주저앉지 않았다고 해서 마수들이 겁을 먹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음?”
흔들리는 골드레이크 위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김선혁은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물들은 자신과 골드레이크에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 죽음의 공포에서조차 자유로운 마물들이 두려워했던 건 그리핀보다 높은 저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무언가였다.
“아….”
비록 실체 없는 흐릿한 형상이었을지언정 그건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존재였다.
“용!”
언젠가 용혈기사로 각성했던 그날, 맹스크의 하늘에 나타났던 거대한 용의 형상이 하늘 높은 곳에서 검은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