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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화려한 복수 (2)
처음의 습격이 끝나고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마물 무리가 나타났다.
김선혁은 지체 없이 응전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무리가 그랬던 것처럼 금세 격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계속해서 비행형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서부 전체에 분포한 비행형 마물들이 이곳에 몰려든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마물들은 끝도 없이 나타나 일행을 습격했다.
하지만 수가 많다고 해서 마물들이 특별히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선혁 역시 드본의 이상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까아악.
과격한 선회 기동으로 지쳐버린 드본은 몹시도 지쳐 보였다. 처음 서부에 들어섰을 때의 힘찬 날갯짓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놈들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드본을 노린 거였어.”
집요하게 달려드는 마물들이 참으로 덧없다 생각했더니, 사실은 드본이 지치기를 노리고 달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마물들의 목적은 거의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서부의 공기는 김선혁과 마렉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만, 드본에게는 충분할 정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거듭된 전투와 급격한 기동의 피로가 누적되니 더 이상 비행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일 지경이 되었다.
아티야를 통해 최대한 버텨보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김선혁은 지친 드본을 어딘가에 착륙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창공에서 날개 달린 마물들과 드잡이질을 할 때부터 따라오고 있던 육상형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때부터가 진짜 고난의 시작이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마왕을 염두에 두고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들을 상대하는 건 몹시도 피로한 일이었다.
“아직도 즐거운가?”
혀를 차며 묻는 마렉에게 김선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생각보다 이르게 드본에서 내리게 되었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드본을 타고 편하게 여행하듯 편하게 서부를 들쑤시고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 또한 각오했던 바, 내 생각은 아직 똑같소.”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에 떠오른 것은 몰려드는 마물들에 대한 짜증과 귀찮음뿐, 그 어디에도 곤란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정은 마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 대 조율자인 줄리앙에게 경험치를 전수해주느라 꽤나 약화된 마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작 이 정도의 잔챙이들에게 곤란함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물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두 사내를 어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과 마렉의 발걸음이 늦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영 끝이 보이지를 않는구먼.”
마렉이 눈대중으로 마물들의 수를 헤아리다가 슬쩍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하겠나? 아니면 내가 할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김선혁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젊은 내가 하는 게 후유증이 남지 않겠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마렉의 말에 낄낄 웃어댄 그가 생목으로 만든 창을 대지에 꽂아 넣었다.
쾅!
창이 절반쯤 땅을 파고들었을 즈음, 폭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바로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이 어느 순간이 되자, 온 사방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그 폭발만으로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지만, 원체 몰려든 마물들의 수가 많다보니 폭발이 끝난 뒤에도 상당히 많은 마물들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김선혁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폭발로 쑥대밭이 된 대지에 금세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갑작스레 생겨난 구덩이들은 살아남은 마물들을 그대로 집어삼켜버렸다.
사방에서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이어지다 그마저도 끊겨버렸다.
“생매장이 자네 주특기였구먼. 그래.”
사방에 돋아난 흙구덩이를 보며 마렉이 진저리를 쳤다. 자신 역시 한 번 저런 식으로 땅에 파묻혀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으니, 지금의 광경이 영 껄끄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게 가장 낭비도 없고 깔끔한 방법이니까.”
성의 없게 대꾸한 그가 허공을 바라보는데, 그 표정이 어쩐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밝아 보였다.
“역시 레벨업에는 몰이사냥이 최고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벽에 막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던 레벨이, 다시금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도 있었던 마왕의 함정에 굳이 뛰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또 벌 떼처럼 몰려들 테니,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가봅시다.”
**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며 잠시 주춤했던 마물들의 습격이 다시 재개되었다. 드본은 아직까지 두 사람을 태우고 창공을 질주할 만큼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김선혁은 어쩔 수 없이 지상에서 마물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했다.
“어차피 오늘 내일 싸워서 끝이 날 것 같지는 않으니, 잠시 눈 좀 붙이겠네.”
김선혁이 한창 창을 내지르며 마물들을 분해하고 있는 와중에 마렉이 툭, 하니 한마디를 내뱉더니 마물들의 사체 하나에 기대 눈을 감았다.
마치 사방에서 괴성을 질러대는 마물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짜 잘 거요?”
“자네야 그 괴물 같은 창도 있고, 젊기도 하니 며칠 잠 안 자도 상관이 없지만 나는 아닐세. 지금 좀 자두지 않으면 나중에 필요할 때 나가떨어지는 수가 있어.”
눈조차 뜨지 않고 대꾸한 마렉이 이내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거 황당한 노인네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선혁이 이내 몰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다시금 창을 겨누었다.
**
마렉이 다시 일어났을 때, 주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곳저곳에 생겨난 흙으로 이루어진 언덕과 거대한 구덩이들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그 언덕과 구덩이 속에 무엇이 있을지는 빤한 일이었다.
“설마 밤새 싸운 건가?”
한 차례 기지개를 하는 것으로 잠기운을 털어버린 마렉이 김선혁에게 물었다.
“그럼 몰려들었던 마물들이 알아서 물러갔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간 수고했네. 덕분에 아주 개운하게 잘 잤어.”
그렇게 대꾸하는 그의 음성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 거라고 말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저렇게까지 숙면을 취할 줄은 그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자는 사이에 이 녀석도 좀 쉰 모양이군.”
김선혁이 혼자 마물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을 본 드본 역시 슬며시 마렉 곁에 자리를 잡고는 잠을 청했다. 신경 굵은 노인과는 달리 예민한 드본은 그다지 깊게 잠이 들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전날의 피로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는 있었다.
“만약 드본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깨웠을 거요.”
“새만도 못한 대접이군.”
“그거 웃으라고 하는 소리요?”
질 낮은 농담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마렉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드본의 안장에 걸터앉았다.
“가세나.”
그렇지 않아도 저 멀리서 또 한 무리의 마물들이 접근해오고 있었던 터라 김선혁 역시 드본위에 훌쩍 올라탔다.
“어디 가서 농담 같은 거 하지 마시오.”
마렉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드본이 힘차게 울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로 김선혁과 일행은 창공과 지상을 번갈아 오가며 이동했다. 드본이 지치면 지상에 내려서서 잠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식이었다.
“오늘도 부탁하네.”
마렉은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잠을 잤다.
“뒷일일랑 걱정 마시고 아주 푹 자시오.”
그리고 나흘째가 되었을 때 김선혁 역시 마렉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잠을 청했다.
아무리 어머니 나무의 창을 통해 대지의 활력이 끝없이 제공된다 해도 정신적 피로만큼은 수면 외에는 해결할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
“날 보고 뭐라 하더니 자네도 만만치 않더군. 아주 코까지 골고.”
“4일 만에 자는 건데, 오죽하겠소.”
무언가에 베이고 잘려나간 마물들의 사체가 온 사방에 가득한 것을 보니,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렉 역시 밤새 싸운 게 분명했다.
“수고했소. 이만 이동합시다.”
다시금 드본이 날아오르고, 그렇게 두어 번 더 착륙과 이륙을 반복한 김선혁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군.”
이곳이 이베리아 대공이 언급했던 용사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온 사방에 가득한 전투의 흔적과 용사와 마왕이 격돌하며 남겼을 대지의 상흔은 전투가 끝이 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많이도 죽었군.”
바닥에 널브러진 병장기와 갑주의 파편만 보아도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연합군이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흔적을 보니, 사방에서 에워싸였어. 자네 말대로라면 그 상황에서 그 정도나 되는 숫자가 살아 돌아간 게 용할 지경이야.”
“발자국만 보고도 그런 걸 알 수 있소?”
“조율자로 살다보면 자연스레 익히는 잔재주 같은 거지.”
그렇게 말한 마렉이 제 눈가를 톡톡 두들기는데, 언제 생겨난 것인지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그 눈 주변에 어려 있었다.
“마왕과 용사가 싸운 건 이쪽이군.”
눈에서 빛을 흘려대며 흔적을 따라 움직이던 마렉이 멈춰선 곳은 마물들과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이겨져 엉망진창으로 변한 평원에서도 유달리 처참한 어딘가였다.
“단서가 좀 있소?”
김선혁의 질문에 마렉이 가만히 손을 들어올렸다. 잠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였다.
“음.”
마치 무언가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태도라 그는 선선히 입을 다물고는 마렉이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이상해.”
한참 만에 입을 뗀 마렉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가 말이요?”
“시일이 오래 흘러 정확한 전황은 알 수 없지만, 용사라는 자가 자네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네.”
원정을 결심했을 당시 벌써 70레벨을 돌파한 박준민이었으니,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해졌다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까지 진군하는 동안에도 레벨이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병과도 사기지만, 그놈이 갖고 있는 성검도 만만치 않은 놈이니까.”
다른 건 둘째 치고 죽음조차 무로 돌리는 그 무지막지한 회복력만 보아도 용사는 사기적인 병과였다.
“그런 것 같구만.”
마렉의 맞장구는 왠지 모르게 성의 없게 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며 되는 대로 대꾸하는 듯한 태도였다.
“근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석연치 않은 마렉의 태도에 김선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했다시피 이제 와서 내 능력만 믿고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를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야.”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그냥 이야기하시오.”
그의 재촉에 마렉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렉의 눈빛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 내가 본 것이 맞다면, 전투가 시작된 뒤로 용사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어.”
마렉이 손가락을 뻗어 깊게 파인 흔적 몇 가지를 가리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김선혁은 대답 대신 가만히 마렉의 설명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용사가 마왕을 압도하고 있었네.”
그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마렉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용사가 마왕에게 절대로 질 수가 없었다는 말일세.”
“그게 무슨….”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거나, 뒤에서 찔렀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교국의 탐욕스럽고 비열한 대주교들이었다.
“설마 이 개자식들이….”
창백하게 질린 그를 보며 마렉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능성이 가장 높군.”
마렉의 대답에 분노한 김선혁이 기세를 일으키는 순간, 그에 맞춰 주변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밑에서 망자(亡者)들이 기어올라왔다.
“아.”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망자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비록 엉망진창으로 훼손되어버린 육신과 얼굴 때문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기어이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하나의 얼굴을 기억해내자 그 주변에 있는 망자들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판테이아.
언젠가 함께 싸웠던 교국의 최전방 요새, 그곳을 수비하던 신전 기사들과 성전사들이 바로 망자들의 정체였다.
그리고 그들은 교국의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김선혁의 활약을 지켜본 병사들이며, 드물게 정치적인 계산 없이 전승공을 지지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판테이아에서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만난 고귀한 신전 기사들과 신실한 성전사들은 냄새 나는 시체가 되어 이를 딱딱거리고 있었다.
“아….”
망자들의 통일된 복색과 낯익은 얼굴들을 본 순간 김선혁은 눈앞에 나타난 망자의 대다수가 판테이아 기지의 이들임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마렉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인간 같지 않은 대주교새끼들!”
교국이 마왕과의 협상을 위해 대가로 바친 제물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형제와도 같은 용사와 나름대로 연 깊은 판테이아 기지의 병사들 또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나 혼자 싸우는 게 낫겠군.”
망자들과 김선혁이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모양인지, 마렉이 허공중에 예의 그 철검을 뽑아내며 나섰다.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하지만 분노로 떨지언정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고,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도 내가 하겠소.”
그렇게 말한 김선혁이 다시금 어머니 나무의 창을 대지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흙더미가 일어나 수천의 망자들을 집어삼키고, 금세 거대한 무덤이 생겨났다.
“후우.”
김선혁은 그 모든 광경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렉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왕이 준비한 함정은 체력을 소모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정신마저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야 끝이 날 모양이다.
“마왕이 이 근처에 있소?”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있네.”
“그게 어디요?”
하지만 마왕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자신이 알던 김선혁과 지금의 김선혁은 아예 다른 존재라는 것이었다.
“저쯤 어딘가겠지.”
마렉의 말에 고개를 돌린 그가 먼 어딘가를 노려보다 작게 읊조렸다.
“서몬 드래곤(Summon Dragon).”
말이 끝나는 순간 검은 대지 아래서 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