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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화려한 복수 (1)
김선혁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베리아 대공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로부터 만반의 대비를 끝마치고 수세를 굳힌 적을 들이칠 때는 열 번 스무 번 생각하고, 진퇴를 결정하라고 했소. 이제라도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전승 대공 또한 심사숙고하여 부디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바요.”
그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물며 과거 전승 대공께서는 한 번 큰 곤욕을 치른 바가 있지 않소? 물론 당시의 상황이 전승 대공께 불리하기만 하여 전투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이번에도 또 그런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
퀘이샤들과 피난민들을 데리고 서부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김선혁은 이미 한 번 마왕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하고도 고작 마왕의 옷자락을 살짝 베어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만약 극도로 소심하고 의심 많은 마왕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날이 그의 제삿날이 되었으리라.
그만큼 마왕은 강했다.
“그러니 부디….”
“내 생각은 아직도 같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스스로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나는 준민이, 아니 용사를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이 없소.”
“대공!”
그의 단호한 대답에 놀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대공께서 잘못된다면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거요! 당장 이베리아는 본토와의 연결고리를 잃을 것이며, 대공을 따라 제국에 뿌리를 내린 퀘이샤들 역시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소. 그뿐인 줄 아시오? 근래 들어 제국에 일어난 변화 중에 대공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만약 대공께서 일을 당한다면 그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거란 말이오!”
혹시라도 제국의 세가 위축될 경우 교국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아닌 말로 용사를 찾아도 교국이 찾아야지, 왜 대공께서 굳이 위험을 무릅써가면서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이건 도박으로 쳐도 무조건 지는 도박이라는 말이오!”
급기야 그의 자존심을 생각해 조심하던 태도마저 버린 이베리아의 대공이었다.
“도박은 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오.”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김선혁의 대답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카드 도박에는 조커(Joker)라는 카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대관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리고 그 조커라는 카드가 종종 판을 뒤엎기도 하는 고약한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그의 표정이 단순한 아집을 부리는 자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뭔가 준비한 한 수가 있는 게요?”
그는 가타부타 설명해주는 대신 그저 덤덤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뿐이다.
**
김선혁은 그라나도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단 3일, 그가 그라나도에 머문 시간이었다.
“아직 여독도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며칠 더 쉬었다 출발하는 것이 어떻소?”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몇 번이나 그에게 조금 더 쉬었다 갈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늦게 움직일수록 마왕이 준비한 함정이 더욱 치밀해질 거요.”
애초에 장거리 비행으로 나가떨어진 마렉이 아니었다면, 그 3일이란 시간조차 그라나도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마렉이 피로를 회복한 이상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부디 무운을 빌겠소.”
망토로 얼굴을 가린 마렉을 잠시 살펴보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무사 귀환을 빌어주었다.
“그럼 다녀와서 봅시다.”
짧은 인사를 남긴 그가 드본의 고삐를 잡아챘다.
“가자.”
그의 말에 드본이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
한때 넘쳐나는 마기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로 변했던 서부는 그간 많이도 변해 있었다. 아직까지 황폐함과 을씨년스러움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숨을 쉬기 거북할 정도의 마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연합군이 수복한 서부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틀을 더 날아 새롭게 형성된 서부 전선을 지날 무렵이 되자, 마왕의 권역 특유의 검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끔찍하군.”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지. 이 정도면 서부의 균형이 박살이 난 거 아니요? 대체 서부의 조율자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오.”
조율자라고는 하나 사실은 동부에만 처박혀 평생을 살아온 마렉이 서부의 상황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한 마디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건, 다시 마주한 서부의 몰골이 그만큼 끔찍했던 탓이었다.
“어쨌건 간에 정신 단단히 잡으시오. 마기가 몸에 침투하면 그다지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칼로 자른 듯 명백한 검고 푸른 하늘의 경계에 멈춰선 김선혁이 마렉에게 경고를 건넸다.
“아무리 내가 약해졌다고 해도 이깟 기운이 넘볼 정도는 아니네. 그러니 잔말 말고 길이나 가세나.”
썩어도 준치라고 조율자의 힘을 줄리앙에게 전부 넘겨준 상황에서도 마렉은 태연했다. 장담했던 것처럼 마기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갑시다.”
드본이 경계를 넘어선 순간 넘실대는 마기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김선혁의 몸에서 찬란한 서기가 터져 나왔다.
결과적으로 사악한 마기는 그들의 근처에도 당도하지 못했다. 휘몰아치는 금빛 기운이 사정없이 마기를 흩어버린 것이다.
“자네 전에도 이 꼴을 하고서 서부를 들쑤시고 다닌 건가?”
황당함이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차는 마렉을 보며 김선혁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금빛 기운이 마기가 범접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 덕분에 드본이 마기에 시달리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지간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를 둘러싼 섬광은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요란했다. 이래서야 잠행하듯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이유가 무색해지고 만다.
“지금쯤이면 마왕인지 뭔지 하는 놈도 자네가 왔다는 걸 눈치챘겠구만.”
놀리는 것인지 한탄하는 것인지 모를 마렉의 말에 김선혁이 어색한 얼굴로 변명했다.
“서부에 퍼진 모든 마기가 마왕의 눈과 귀요. 굳이 이 빛이 아니더라도 손님의 방문 정도는 알아챘을 거요.”
“이 주변의 기운이 무언가 기분 나쁜 것에 연결되어 있는 건 확실하군.”
과거 감만으로 대적자의 고리를 일시적으로 깨어버렸던 마렉은 조율자의 자격을 상실하고도 여전히 그 특유의 기감을 잃지 않았다.
잠시 서북 방면의 하늘을 응시하던 마렉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타박했다.
“그래도 일단 그 빛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만. 온통 새까만데 혼자 번쩍거리니 영 보기 부담스럽다네.”
마렉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진즉부터 기운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섬광은 강해졌고, 나중에 가선 그는 어두컴컴한 서부의 하늘을 환하게 비출 정도의 빛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치 마기로 뒤덮인 하늘에 솟아오른 태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미치겠네.”
이 기운이 마기를 몰아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과거에는 거북스럽고 불쾌해 저도 모르게 속이 끓어올랐던 마기가 지금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래서야 온 동네방네 자신이 여기 있음을 소문내고 다니는 꼴이라 어떻게든 섬광을 억제해야 했다.
“일단 다시 나가봅시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김선혁이 마기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를 둘러싼 상서로운 용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 돌겠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다시금 마왕의 권역에 발을 들이자 사라졌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정명한 용의 기운이 사특한 기운을 용납지 못하는 모양이군.”
마렉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의식하기도 전에 기운이 먼저 일어나니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소.”
본능처럼 일어나는 기운에 한참을 난감해하던 김선혁은 결국 가급적이면 큰 소란 없이 서부에 들어서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준민이를 찾아 벗어나야겠소.”
요란한 섬광에 둘러싸인 그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전해준 정보를 토대로 방향을 잡는데, 마렉의 음성이 그를 붙잡았다.
“용사라는 자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렉의 시선은 줄곧 서북쪽 어딘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왕이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군.”
김선혁이 무심코 마렉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음.”
창공을 질주하면서도 작디작은 목표물 하나 놓치지 않는 용혈기사의 시력으로도 수상쩍은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 함정이라는 거 말일세. 어쩌면 자네 생각보다 한참은 더 일찍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구먼.”
마렉이 무덤덤하게 말하더니, 그에게 물었다.
“흐음. 어찌할 건가. 피해가자면 못 피할 것도 없겠지만, 일이 꼬이면 바로 뒤를 잡힐 걸세.”
“어차피 함정이 하나도 아닐 텐데, 일일이 다 피해 다녀서야 언제 준민이를 찾겠소.”
“그럼?”
김선혁이 대답 대신 드본의 안장에 메어두었던 어머니 나무의 창을 잡아들었다.
“걸리적거리는 건 일단 박살내면서 갑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본이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설마 이놈을 타고 싸우는 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마렉이 하얗게 질려서 외쳤다.
“그럼 설마 내려서 싸울 줄 알았소?”
짧게 대꾸한 그가 드본의 속도를 올리자, 마렉이 비명처럼 외쳤다.
“내려주게! 난 내려서 싸우겠네!”
하지만 이미 가속하기 시작한 드본은 멈출 줄을 몰랐고, 이내 허공을 질주하는 한 자루 창이 되어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
첫 번째 함정은 그다지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김선혁이 나지마와 함께 서부로 향할 때, 그를 덮쳐들었던 수많은 비행형 마물들이 다시 한 번 그를 습격했다.
과거 그는 마왕의 땅에서 유독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티야의 도움을 받지 못해 한참이나 귀찮은 마물들의 습격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금빛 기운 안에서라면 아티야도 얼마든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수백 수천의 마물들을 쓸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왕이라는 자, 생각보다는 수완이 별로 아닌가? 고작 이 정도의 함정으로 자네의 발을 묶어두려 하다니.”
과격한 비행으로 하얗게 탈색된 얼굴을 한 주제에 마렉은 잘도 떠들어댔다.
“전에 만났을 때의 나 정도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고전을 했을 테니,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소.”
물론 마왕이 고작 이 정도의 함정만 준비해두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겪어본 마왕이라면 혹시라도 그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을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도 남을 정도로 조심성이 있는 존재였다.
방금 전 그가 처리한 비행형 마물들 정도는 사소한 탐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도 진짜는 이제부터일 거요.”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마렉 역시 그 점을 눈치챘는지 묘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자네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군.”
김선혁은 선선히 마렉의 말을 인정했다.
“날 얕잡아 보는 상대를 깨부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 아니겠소?”
하물며 그 상대가 한 번 자신을 죽음 직전에 이르게 만들었던 자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쩐지 김선혁의 목표가 용사의 탐색이 아닌 마왕의 격퇴 쪽으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