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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탈피 (3)
그 말간 시선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 김선혁은 벌써부터 오필리아가 꺼낼 이야기가 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몸이 전 같지 않다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데스덴 혈족의 피에 새겨진 숙명, 전대 군주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단명의 저주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몸에 무슨 이상 징후라도 생긴 겁니까?”
저도 모르게 오필리아의 가녀린 어깨를 꽉 잡고 캐물었다. 전에 없이 우악스러운 손길, 그만큼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하기야 어찌 동요하지 않겠는가.
김선혁은 그간 이런저런 일을 핑계로 타지를 전전해왔다.
마왕이니, 용기병의 숙명이니 어떤 핑계를 댄다고 해도 그가 오필리아에게 소홀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물며 그녀는 바로 얼마 전 아비를 잃은 처지였고, 스스로도 아비를 단명하게 만든 저주를 똑같이 짊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그제야 자신이 그간 밖을 나돌며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김선혁은 심하게 자책했다.
“미안해요. 오필리아.”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이제 겨우 잘못을 깨닫고도 또다시 제국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으니,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드시오.”
오필리아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양 뺨을 잡았다.
“내가 그대에게 부여한 대공의 위치는 그리 쉽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되는 것이오.”
조심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배우자로서의 그대는 참으로 나쁜 사람이요.”
말과는 달리 그 어디에도 원망의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대가 나쁜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지 않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김선혁이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지금 뭐라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 겨우 꺼낸 한마디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얼빠진 말이었다.
“나는 그대가 이 뱃속의 아이에게 나쁜 아버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소.”
다시 이어진 한마디에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짧은 숨결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오필리아. 설마 지금 그 말은….”
“아직은 새 생명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고 약하지만, 장차 이 제국을 이끌 아이이니 곧 그 어떤 아이보다 강하게 자라날 거라 믿소.”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지며 건네는 말에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럼 아빠가 된다는 겁니까?”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 비틀거린 김선혁이 묻자,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해주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황실의 마법사들이 확인한 바요.”
“하.”
그가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쳤다.
“말도 안 돼. 내가 아빠라니….”
그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기괴한 얼굴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가만히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나 흘렀을까.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던 김선혁의 얼굴에 단 하나의 감정만이 남겨졌다.
“내가 정말….”
환희, 전에 없는 기쁨이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오필리아!”
함성처럼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와락 오필리아를 껴안았다.
“아이가 놀라겠소.”
언뜻 무덤덤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전까지의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자애롭고 그래서 더욱 포근한 미소였다.
**
그날 오필리아는 하루 종일 모든 정무에서 손을 떼고, 김선혁과 시간을 보냈다. 그 역시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침실에 누워 그간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선혁은 자신이 밖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전부 늘어놓았고, 오필리아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 오필리아가 덤덤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소소한 일을 말해주었다.
부부는 삼 일 간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시간동안 김선혁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 속 깊이 각인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지금이라도 서부행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김선혁은 몇 번이고 빨리 돌아오겠노라 약속했다.
“그보다는 몸 성히 돌아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오.”
그리고 오필리아는 오로지 그의 무사귀환만을 빌어주었을 뿐이었다.
“몸 성히, 최대한 빨리. 기억했어요.”
김선혁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오필리아의 배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아빠 다녀올 테니, 얌전히 있어.”
말을 하면서도 민망한지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 걸 보면, 기쁘긴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몸조심해요. 오필리아.”
그렇게 한마디 인사를 남긴 그가 드본과 함께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 몇 번이나 황성 위를 맴돌다가 그대로 서편 하늘로 사라졌다.
오필리아는 새까만 점으로 변한 그리핀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
김선혁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이동했다. 아티야를 불러 드본의 날갯짓을 도왔고, 그 스스로는 최대한 자세를 낮춰 조금이라도 빨리 맹스크에 닿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은 비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은 맹스크에 들려 마렉을 태우고도 계속되었다.
“허억. 조금만 천천히.”
검성이라 불리는 초인조차도 앓는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과격한 비행, 하지만 그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놀랍게도 2주 만에 동부를 완전히 빠져나와 대륙의 중남부에 접어들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항구 도시가 이베리아의 그라나도요.”
그라나도를 눈에 담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속도를 늦춘 김선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라나도고 뭐고, 어디든 간에 일단 내리세.”
2주간의 비행으로 완전히 질려버린 마렉은 계승의 의식이 있었던 그날보다 몇 배는 지쳐 보였다.
“안 그래도 내릴 참이오.”
피식 웃은 그가 서서히 드본의 고도를 낮췄다.
그리핀이 완전히 착지하기도 전에 마렉이 훌쩍 뛰어내렸다. 어지간히 드본의 등에서 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 조금만 더 참지, 얼마나 빨리 내리겠다고.”
작게 핀잔을 주는 그에게 마렉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내 다시는 자네와 함께 어디를 갈 일은 없을 걸세.”
“뭐, 그렇게 하시오. 나도 이번 일 이후로 어디 갈 일은 없을 테니.”
태평스러운 대답에 마렉이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돌아갈 때는 나 혼자서라도 배 타고 돌아가겠네.”
“그러시든지.”
영양가 하나 없는 대화로 잠시 투닥거리는 사이에 이베리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든 이들 사이로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신다는 기별은 받았으나, 이리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소.”
이제는 이베리아 대공이 된 디에고 벨라스케스였다.
“그게 일정을 서두르다보니….”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전문을 받은 지가 이제 겨우 2주 남짓인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드시오. 워낙에 갑작스러워 준비가 미흡하지만, 아쉬운 대로라도 여독은 풀 수 있을 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베리아 대공이 뒤늦게 마렉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같이 오신 분께서는 한 번도 못 뵌 분이오만?”
“반갑소 나는….”
마렉이 나서서 소개를 하려는데, 김선혁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소개는 나중에 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이베리아 대공도 더는 마렉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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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아무런 연관이 없었을 당시에도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김선혁을 융숭히 대접했다. 그런 디에고 벨라스케스도 이베리아가 아덴버그의 속지가 된 지금에 와서는 그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웠다.
마치 상관이라도 대하듯 극진한 태도였다.
하기야 그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똑같은 대공의 작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제국의 하나뿐인 군주의 남편이었다. 혹시라도 그 심기를 상하게 했다간 필요한 때 본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교국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제국의 속지가 되기로 결정한 이베리아로서는 절대로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말씀대로 용사와 마왕의 마지막 전투에 대해서 탐문을 해두긴 했소만, 그날 이후로 시일이 다소 흐른지라 아직도 용사가 그 근방에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소.”
그런 탓에 이베리아의 대공은 김선혁이 떠나기 전에 부탁했던 용사의 행방에 대한 조사를 짧은 시간 만에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해둔 상태였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오. 고맙소.”
마지막 전투에 동원된 병력의 규모와 전투가 흘러간 양상에 대해 빼곡하게 적힌 보고서를 갈무리한 김선혁이 적당히 감사 인사를 표했다.
“설마 마왕의 땅에 들어갈 참이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베리아 대공이 작게 한탄을 내뱉었다.
“말리고 싶지만 듣지 않겠군.”
“나라고 원해서 가는 건 아니니까.”
김선혁의 대꾸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한 번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중부 왕국 연합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소. 아니, 정확하게는 교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
수저를 내려놓은 그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교국은 더 이상 마왕과 전쟁을 할 의지가 없는 것 같소.”
“알려진 대로라면 몰락한 서부의 사분지 일이나 수복했으니, 지금 전쟁을 중단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지. 물론 마왕이 그걸 그대로 두고 본다면 말이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작게 내려치며 대답했다.
“바로 그거요!”
난데없는 행동에 그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대니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첩보에 의하면 교국과 마왕이 뭔가 밀약이라도 맺은 것 같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신성력과 마기는 상극이며 서로를 잡아먹고야 마는 천적이다. 그런데 그 상반된 힘을 근원으로 한 두 세력이 밀약을 맺었다는 말을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전선이 고착된 거야 전쟁에 동원된 병력이 워낙 많고, 마왕 쪽의 피해도 크니 그렇다고 할 수 있소. 하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작은 분쟁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소. 이쪽은 몰라도 최소한 사람이라면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난 마물들이라면 최소한 전선 어딘가 하나쯤은 난리가 났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김선혁에게 손짓으로 다시 자리를 권하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의문을 품고 여러 가지를 조사했다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됐소.”
“그게 설마 마왕과 교국의 밀약이란 말이오?”
이베리아 대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떤 조건이 오갔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중부 왕국 연합이 서부의 사분지 일을 제 땅으로 삼는 대신 치른 대가는 결코 적지 않을 거요.”
교국의 압박을 견뎌내며 작디작은 도시들의 연합을 지켜온 노회한 정치인의 눈빛이 김선혁을 똑바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전승 대공 역시 포함되어 있을 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선혁은 맹스크에 날아든 교국의 전문이 떠올랐다.
“그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필시 함정이겠지.”
이쯤 되니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 교국 놈들이 음흉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제 우리 이베리아가 제국의 발아래 엎드려가면서까지 교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이유를 아시겠소?”
황당하다는 투로 교국을 욕해대니,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맞장구를 쳤다.
“무려 전승 대공 드라흔을 잡을 함정이니 보통 함정은 아닐 거요. 얼마나 음험하고 치명적인 덫을 놓아두었을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라오.”
비록 교국의 전문에 답신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쯤이면 그의 서부행이 소문이 났을 것이다. 만약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추측이 맞다면 모르긴 몰라도 마왕은 함정을 파두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오? 함정이라는 걸 알고도 서부로 들어갈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