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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62화 (26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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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탈피 (1)

당장에라도 맹스크 성에 당도할 것 같았던 골드레이크는 어쩐 일인지 어디선가 멈춰선 채로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나더러 오라는 건가?”

그게 김선혁에게는 골드레이크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잠시 다녀오겠다.”

“안 됩니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방을 나서려는 그를 말리고 나섰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마렉과의 결투로 한 번 크게 질책을 받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기를 쓰고 그의 출타를 만류했다.

“이번에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 적당히 눈감아주게.”

“정히 그러시다면 수행원와 함께 가소서.”

한참이나 실랑이 끝에 수호대가 양보를 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양보였다.

“그 수행원, 내가 맡도록 하지.”

그때 나선 것이 바로 마렉이었다.

“음.”

언제 나타났는지 열린 문 너머로 빼꼼 얼굴을 드러낸 마렉의 말에 수호대의 기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얼마 전 그를 피떡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마렉이다보니 그 제안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절대 안 됩니다.”

잠시 망설이던 수호대의 기사가 김선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전보다 한층 더 단호해진 목소리였다.

아, 더럽게 눈치 없는 양반이네.

제 딴에는 돕겠다고 나선 마렉 탓에 일이 더 어려워지고 말았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저희들 중 하나를 동행하시든지, 아니면 성에 계시든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더욱 완강해진 수호대의 태도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렉을 노려보았다.

“퍽 도움이 되는구려.”

그때까지만 해도 마렉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조율자가 아닌 은둔공작으로서의 마렉은 정말 엄청나게 눈치가 없었다.

“그럼 그 수행원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또 다른 이가 나섰다. 바로 줄리앙이었다.

“음. 맹스크 여백작께서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으신 걸로….”

“다 회복됐습니다.”

단호하게 대꾸한 줄리앙이 벽 한 켠에 걸려 있던 외투를 들고 와 김선혁에게 건네주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보고 있던 이들은 미처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람이 찹니다.”

지금에 와서야 국경이 서부로 한참 전진한 탓에 더 이상 최전방이 아니게 되었다지만, 맹스크 가문은 누대에 걸쳐 아덴버그의 국경을 지켜온 변경백 가문이었다. 그런 대단한 가문의 수장이 다른 이를 수발드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혹시 나도 안 되는 겁니까?”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의 외투 끈을 조여 매주는 줄리앙의 태도에 수호대의 기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은둔공작과는 달리 맹스크의 여백작은 황실의 가장 강력한 우방 중 하나, 쉽사리 거절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수호대의 기사들은 적당한 핑계를 찾아냈다.

“맹스크 여백작이라면 믿을 수 있으나, 아무래도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맹스크 여백작께서 함께 휘말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이야 돌려서 말했다지만 결국은 줄리앙이 지닌 본신의 힘이 미덥지 않다는 의미였다.

“제국 제일의 기사라 알려진 대공께서도 해결하지 못할 위난한 상황이 생긴다면, 감당하지 못하는 건 경들이나 저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음….”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김선혁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어느 누가 나선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들이 하나 착각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김선혁의 채비를 돕던 줄리앙이 벽면에 걸려있던 장식용 검을 꺼내들었다.

“누가 그럽니까? 제가 경들보다 약하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꽉 감아쥔 검에서 검광이 터져 나왔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검력이었다.

“이게 대체….”

알려지기를 견습 기사 급의 경지라 알려진 줄리앙이 일으킨 강력한 검기에 수호대의 기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와 호위대상의 위치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조차 잊은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게 아니라고 해도 수호대의 기사들은 맹스크의 여백작을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맹스크 가문의 사람들은 황성 내에서 자유롭게 검의 패용이 가능하던 이들이다.

그런 황실의 신뢰는 오필리아의 대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으니, 그 부군이자 제국의 대공인 김선혁을 이 먼 서부에까지 보내 선대 백작의 죽음을 애도할 정도였다.

“음.”

놀란 것은 김선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렉의 힘을 어느 정도 계승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녀가 일으킨 검력을 보고 나니 그 경지의 남다름에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만 것이다.

이 정도면 최소 레인하르트 후작 급이다.

검광을 넘어 아예 불길이 되어 이글거리는 줄리앙의 검력은 그만큼 강력했다.

“맹스크 여백작의 뜻은 알았으니, 이제 그만 기운을 거두어주시지요.”

놀라움을 수습한 황가 수호대의 기사가 건넨 말에 줄리앙이 검력을 거두어들였다. 검력을 불러 일으켰을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검력을 보니 그 기운의 수발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드높은 아데스덴의 이름을 지키는 검과 방패 앞에서 무례를 저지른 것을 양해해주시기를.”

줄리앙이 건조한 어투로 사과를 하고는 황가 수호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맹스크의 성을 걸고 약속하건대 대공께서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일이 없으시도록 제가 잘 보필해보겠습니다.”

사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정말로 김선혁의 안위를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줄리앙이 말했다시피 그는 제국 제일의 기사였으며, 검성마저 꺾은 진짜 강자였다. 그런 그가 이 안전한 후방에서 위험한 일에 휘말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건 제가 맹스크를 물려받기 전부터 해오던 일이니, 믿으셔도 될 겁니다.”

줄리앙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눈치 없는 마렉이 구시렁거렸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황가 수호대와 줄리앙을 대동한 김선혁이 맹스크 성의 공터로 향했다.

“대공께서 여기는 또 어인 일로….”

마침 자신의 그리핀을 돌보고 있던 롤랑이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에 어리둥절해 있다가 뒤늦게 김선혁을 발견하고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피로 물들어 돌아왔던 드본을 보고 놀란 마음이 다소 앙금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물론 그날의 피는 드본의 피가 아닌 그의 피였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제는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한 것이리라.

“잠시 드본 좀 빌리지.”

그 말에 롤랑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얼굴로 그리핀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공이시여.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롤랑의 시선이 잠시 행렬의 한 켠에 우두커니 선 마렉을 향했다. 혹시라도 또 괴물들 간의 위험천만한 힘겨루기에 드본이 휘말릴까봐 몹시도 걱정 되는 눈치였다.

“지난번에 입은 날개의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당분간 비행은 힘들 것 같습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본이 날갯짓을 하며 롤랑을 훌쩍 뛰어넘어 그의 앞에 섰다. 드본은 롤랑의 말과는 달리 부상은 조금도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드본, 너….”

롤랑이 상처 입은 얼굴로 드본을 바라보다 뒤늦게 드본의 원주인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는 푹,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 말도록.”

김선혁은 그런 롤랑을 적당히 달래주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제국 내에서 이 그리핀이라는 희귀 자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이들은 창공의 기사들뿐이었다. 유사시에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줄 고급 인력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다녀오소서.”

롤랑도 스스로의 처지를 아는지 주제넘게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럼 다녀오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가엾은 그리핀 라이더를 일별한 그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을 돌아보고는 드본 위에 올랐다.

“헛차.”

안장이 하나뿐인지라 그 자세가 마치 체구 작은 줄리앙을 뒤에서 끌어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도 그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음.”

단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만이 다소 거북스러운 눈빛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도록.”

그 눈빛을 본 김선혁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제야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정말 다녀오겠다.”

“가급적이면 빨리 다녀오소서.”

너무 늦으면 부득이하게 황실에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다는 기사의 말에 그가 알았노라 대답을 하고는 드본과 함께 날아올랐다.

“근데 가신들이 말리지 않아?”

“가신들이요? 그럴 리가요.”

단 둘이 되자 김선혁과 줄리앙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가신들은 저와 대공의 친분이 조금이라도 깊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개중에는 꽤 불측한 망상을 품은 자도 있을 겁니다.”

“망상이라면?”

“뻔하지요. 저와 대공이 남다른 관계가 되어 맹스크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발달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요.”

건조한 말투와는 달리 그 말의 내용은 꽤나 민망한 것이었다.

“설마. 나하고 네가?”

민망함에 괜히 웃으며 그리 말하니, 앞에 앉아있던 줄리앙이 고개를 젖혀 빤히 시선을 보내왔다.

“그게 뭐 이상합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그가 잠시 할 말을 찾는 사이 줄리앙이 예의 사무적인 말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안 그래도 나지마의 일로 오필리아와 크게 문제가 생길 뻔했던 김선혁으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농담이었다.

“사실 기사로서는 몰라도 남자로서 영주님은 최악입니다. 허구한 날 위험한 곳을 들쑤시고 다니지, 나갔다 하면 돌아올 줄 모르지. 말하다 보니 정말 별로군요. 혹시 기대하신 겁니까?”

“까분다.”

하지만 정작 농담을 건네는 그녀의 태도에 사심이 전혀 없으니, 그도 결국은 웃고 말았다. 뭔가 이제야 줄리앙과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보다 그 힘, 조율자의 힘이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소 애매한 대답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줄리앙이 설명을 해주었다.

“로아힘 공은 이 힘을 두고, 경험치를 나누어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는데, 아직은 그게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확실한 건 이 힘이 제가 고련하고 고련하다 보면 언젠가 제가 이룰 성취의 한 모습이라는 것뿐입니다.”

“아….”

조율자의 전이라는 게 아무래도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나누어주는 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방인이 아닌지라 스테이터스나 경험치 같은 것에 무지한 줄리앙은 자신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라며 툴툴거렸다.

“중간 과정이 사라져서 조금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힘이 아예 남의 힘은 아니라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하기야 평생을 아샤 트레일 같은 여기사가 되겠다며 정진해온 줄리앙이니, 단번에 힘이 강해진 것은 어찌 보면 그간의 노력이 허무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다소 씁쓸해 보였다.

“내가 미….”

“사과는 됐습니다. 저도 그냥 시기가 당겨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스스로 정진해가며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성취감과 보람을 빼앗긴 그녀는 여전히 꿋꿋했고,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보다 지금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지금?”

일부러 화제를 돌리고자 하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그녀의 말에 김선혁은 순순히 넘어가줄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던 골드레이크 찾으러 가는 길이지.”

그렇게 대답한 그가 잠시 저 먼 북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맹스크 성에서 막연하게 그 존재감을 느꼈을 때와는 달리 골드레이크는 예상보다 엄청 먼 곳에 있었다. 만약 드본이 아니라 말을 타고 이동했다면 족히 며칠은 걸릴 거리였다.

“근데 이놈이 건방지게 주인보고 찾아오라고 떡 하니 버티고는 오지를 않네.”

언뜻 괘씸하다는 듯이 말하는 김선혁이었지만,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어쨌건 빨리 가보자.”

한 번 생각을 떠올리고 나자 마음이 급해진 것인지, 그가 드본의 고삐를 잡고 한층 더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골드레이크가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골디!”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선명한 지기(地氣), 그가 드본을 빠르게 하강시키며 골드레이크의 이름을 불렀다.

“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드본이 대지에 다 내려앉도록 골드레이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기가 맞는데?”

“확실합니까?”

줄리앙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땅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흙투성이가 되어서도 그 찬란함이 가려지지 않은 금빛 비늘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런데 그 아룡의 모습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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