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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61화 (26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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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계승 (4)

어쩌면 조금만 더 일찍 진실을 알았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김선혁은 대소환의 원흉을 듣고도 표정이 굳었을지언정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군.”

장황한 설명에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군? 그게 단가?”

대체 뭘 기대했던 것일까. 마렉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요. 속았다고, 이용당했다고 화라도 내며 길길이 날뛰오리까.”

물론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불러들인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해서 화를 내기에는 그 스스로의 삶이 퍽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혹시 용이 날 대리자로 세웠다고 해서 내가 뭐 큰 손해를 본 거요?”

“그건 아니네. 다른 존재들은 몰라도 용은 정명하고 정의로운 존재, 자네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걸세.”

“그럼 문제없겠군.”

간명하다 못해 성의 없게까지 보이는 태도에 마렉이 허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저쪽 세상에서 잘 살고 있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불러들여 죽을 둥 말 둥 고생하게 한 원흉이 아닌가.”

“고생이야 저쪽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했겠지. 저쪽 세상의 나는 정말 보잘 것없는 존재였으니까. 물론 여기서 죽을 고비를 꽤 여러 번 넘기긴 했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지금의 나는 이토록이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그토록이나 돌아가고자 했던 건, 그저 저쪽 세상에서의 삶이 이쪽 세상에서의 삶보다 안락하다 여겼던 탓이다.

당시의 그는 각성을 위해 가혹한 훈련을 받아야했던 훈련병이었고, 각성한 뒤로는 하급 이방인으로서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최전방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옛말이 되었다.

공작의 작위를 얻었고,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마르지 않을 부귀영화를 손에 쥐었다. 사람들의 칭송도 질리도록 받았다. 마누라는 대륙에 하나뿐인 제국의 여제였고, 수하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옥불이라도 마다않을 진짜 사내들이었다.

그 모두가 평범하게, 아니 평범 이하였던 저쪽 세상에서의 삶이었다면 골백번 죽었다 깨도 얻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감사를 표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망할 마음도 없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대리자라는 게 정확하게 뭘 하는 존재요?”

그의 질문에 마렉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세상에 관여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 그들의 의지를 이 세상에 발현할 사도,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이 세상에 현신할 수 있는 문이 되는 존재, 그게 바로 대리자일세.”

“혼돈의 파편이 마왕의 손을 빌어 이 세상에 강림했듯이 말이요?”

김선혁은 고개를 끄덕이는 마렉에게 보다 자세한 대리자의 임무를 물어보았다.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반대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퇴치하거나. 또는 나처럼 인간 외의 존재들이 대륙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막거나. 그건 어떤 존재의 대리자이냐에 따라 다르네.”

“음.”

마렉은 용의 반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렴풋이나마 용의 목적이 형벌 받고 유배당한 가엾은 아룡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소? 그게 아니라면 다른 걸 묻고 싶소만.”

당장 필요한 만큼은 알았으니, 더 이상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줄리앙은 이방인이 아닌데 어떻게 당신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건지, 그리고 줄리앙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것부터 말해보시오.”

그는 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녀에게도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네. 아마 200년 전의 대소환, 또는 그 이전의 대소환에 불려온 이들 중 누군가가 맹스크의 선조들 중 하나와 연이 있었을 거네.”

마렉은 몇 대를 거쳐 올라가다보면 선조 중에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왕가나 귀족가를 찾기가 도리어 힘들 거라며, 줄리앙 역시 그런 경우 중 하나라 말했다.

“만약 그녀에게 이방인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는 용의 독을 이겨내지도 못했겠지.”

결국 조율자가 되는 것도 대적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녀에게 이방인의 피가 흘렀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당대의 조율자로서 다음 대소환까지 동쪽 대륙의 균형을 관장하게 될 걸세. 내가 해왔던 것처럼 말이야.”

“다음 대소환은 언제요.”

“어쩌면 당장 몇십 년 뒤가 될 수도 있고 몇백 년 뒤가 될 수도 있다네. 그러니 그에 대해서는 내가 해줄 말이 없구만.”

지금의 김선혁으로서는 다음 대소환까지의 텀이 긴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짧은 게 좋은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음….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표정에 마렉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최소한 지금 당장 그녀가 뭘 해야 하는 건 아니네. 그녀는 여전히 맹스크의 영주고, 그녀가 조율해야 할 구역에 특별한 존재가 개입한다거나 분란이 인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동안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마렉의 눈이 김선혁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그녀를 봐서라도 균형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말라 경고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딱히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소.”

마렉은 그의 대답에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기색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의 신경을 건드려가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그럼 당신은 이제 어쩔 거요. 줄리앙이 당대의 조율자가 되었다면, 당신도 딱히 할 일은 없을 텐데.”

그의 질문에 마렉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조율자로서의 삶이 꽤나 무료하고 적막한 것이라 그다지 쉴 맘은 없네만, 당장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내 스스로의 의지로 뭔가를 하려 했던 건 200년도 더 전의 일이니까.”

홀가분한지 아쉬운지 구분 가지 않는 모호한 표정의 마렉은 마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2달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다. 무려 200년 간이나 스스로의 자유의사가 거세된 채 살아야 했던 마렉이 헤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나이 먹고 참 바보 같군.”

자조하는 마렉을 보며 김선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바보 같을 것까지야 있소. 조금 지나면 할 일이 생각나겠지.”

그렇게 말한 잠시 텀을 두었다가 슬쩍 용건을 꺼냈다.

“정 할 일이 생각나지 않으면 내가 뭐 하나 제안해도 되겠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렉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간 동부에만 처박혀 있느라 세상 구경도 못했을 텐데, 나랑 바깥세상 좀 둘러봅시다.”

김선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다 뭐, 시간 되면 내 일도 좀 도와주고 말이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벅대던 마렉이 뒤늦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헛웃음을 쳤다.

“마왕이라도 때려잡자는 말인가.”

“그보다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지만, 굳이 못 할 것도 없지 않소?”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마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마렉은 여전히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였고, 그런 마렉과 함께라면 마왕을 잡는 것도 그다지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당신이 동쪽 대륙의 균형을 위해 해온 200년 간의 노고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소. 그렇게나 애를 썼는데 정작 진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다니, 나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보상심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했으면 평가를 받고 보상을 받고 싶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마렉은 이제까지 모든 일을 음지에서 처리해왔다.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고, 필요하다면 신분을 세탁하기까지 했다. 대륙의 운명에 관여할 수 없는 조율자이기에 보상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억울한 마음이 없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럴싸한 이름 하나 정도는 역사에 남겨도 좋지 않겠소?”

질 낮고 노골적인 충동질이었지만, 평생을 허깨비로 살아온 노기사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 답을 주시오. 나도 며칠은 더 맹스크에 머물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김선혁은 더 이상 마렉을 설득하지 않았다. 물론 설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공을 들여 마렉을 부추겨볼 작정이었다.

지금은 다소 어리벙벙한 모습을 보인다지만 눈앞의 노기사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절대 자신의 서부행을 허락하지 않을 오필리아에게 이번 서부행이 꼭 필요한 것이고, 또 위험하지 않다는 걸 납득시키려면 그럴싸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검성 마렉 슈나일 로아힘의 명성은 그 뭔가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

마렉은 당장 김선혁의 제안에 답을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안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숙고해보겠네.”

“그러시구랴.”

적당히 서로의 용건을 끝마친 두 사내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으음….”

조용한 가운데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앙이었다.

그의 품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줄리앙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줄리앙.”

김선혁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줄리앙을 살펴보았다. 자신으로 인해 조율자의 운명을 강요받은 그녀가 어쩌면 원망의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탓이다.

“정신이 들어?”

잠이 덜 깼는지 다소 몽롱하던 눈동자에 점차 빛이 돌아왔다.

“아….”

그렇게 완전히 빛을 되찾은 줄리앙의 눈동자는 과거 그녀가 어린 종자에 불과했던 그 시절에 보내오던 맹목적이고 충성스러운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증오와 원망은 보이지 않았다.

“영주님.”

그녀가 맹스크의 여백작이 된 후에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친애하는 종자로 남았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그는 여전히 영주님이었다.

그게 그렇게 고맙고 다행일 수가 없어 김선혁이 무심코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행입니다. 영주님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안도한 건 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줄리앙 역시 그를 보며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다. 줄리앙.”

그런 그녀에게 김선혁이 사과했다.

무모하게 해룡의 사냥에 끌어들였던 것에 대한 사과이자, 자신으로 인해 억지로 조율자의 운명을 떠안게 된 데에 대한 사과였다.

“별말씀을.”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하게까지 들리는 줄리앙의 대답이었지만, 그 한결같은 모습에 그는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그가 맹스크에 발이 묶여야 했던 지긋지긋한 대적자의 문제가 마침내 일단락이 된 것이다.

**

서부가 발칵 뒤집혔다.

밤사이 있었던 소란을 목격한 건 맹스크 성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밤을 밝히던 찬란한 섬광은 온 서부에 널리 퍼져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이를 목격한 이들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이 상서로운 빛의 정체를 두고 법석을 떨어댔다.

하지만 서부의 소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맹스크 성의 소란만큼 크지는 않았다.

“대체 그 거대한 생명체는 뭐란 말입니까.”

“그건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 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단지 상서로운 섬광만을 목격했다면 맹스크 성의 사람들이 목격한 건 그 섬광의 주인이었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상서로운 존재였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직후 영주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분명 길조였을 겁니다.”

맹스크 가의 가신들은 전날 보았던 압도적인 생명체의 정체를 놓고 온갖 추측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들끼리 갑론을박을 해봐야, 그 정체를 아는 인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주님께서 영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벌어진 일이니, 이는 분명 하늘이 맹스크의 신임 영주를 기꺼이 여긴다는 징조입니다.”

“맞습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위인의 탄생에는 그에 걸맞은 징조가 있어왔으니까요.”

엉뚱한 결론이 도출되었지만, 김선혁은 끝까지 나서서 용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

굳이 소란의 중심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판단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그는 온통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지라,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던 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골드레이크가 오고 있어.”

종적을 감추었던 아룡들 중 가장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땅의 아룡의 기운이 바로 지척에 당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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