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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계승 (3)
소매로 가려진 왼 팔뚝의 피부가 우둘투둘 딱딱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만져보아도 그 이질적인 촉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는 이내 자신이 옷 속에 갑주를 받쳐 입었던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고민이었다.
결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전한 후방, 그것도 대영주 맹스크의 성에서 평시에도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챙겨 입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김선혁이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미친!”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소매를 덮어버렸다.
“잘못 봤겠지. 그래 분명 잘못 봤을 거야.”
미친놈처럼 혼잣말로 부정해보지만, 소매 위로 느껴지는 우둘투둘함은 여전했다.
다시 용기를 내 소매를 걷었다.
“이게 대체 뭐야….”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 뽀얀 생살이 있어야 할 곳에 전혀 엉뚱한 것이 들러붙어 있었다.
금린(錦鱗).
골드레이크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비늘이 팔뚝에 잔뜩 돋아나 있었다.
“하….”
뚫어져라 비늘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온몸을 더듬었다. 다행스럽게도 비늘이 돋아난 건 왼 팔뚝뿐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만져도 보고 떼어내려고 노력도 해보지만 비늘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무리해서 뽑아내려 하자 생살이 떨어져 가는 고통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참이나 비늘을 두고 고민하던 그가 뒤늦게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렸다.
“스테이터스!”
39레벨에 올라 성장이 정체된 뒤로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던 스테이터스 창이 그의 눈앞에 주르륵 나열되었다.
[김선혁]
․ Level. 40
․ 용혈기사(Dragonian Knight)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롭게 변한 병과 명이었다.
“용혈기사?”
글자 하나만 덧붙었을 뿐인데, 그 느낌이 천지 차이였다. 기존의 병과 용기사가 그저 용과 관련된 병과로 보였다면, 용혈기사는 보다 더 용의 근원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까워진 상태였다. 왼 팔뚝에 돋아난 비늘은 누가 보아도 용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으니까.
“설마 용의 피가 흐르고, 막 그런 건가.”
단지 병과 명만으로는 용혈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감이 오지 않아, 김선혁은 계속해서 스테이터스를 살펴보았다.
․ 근력 121(158) / 지구력 104(172+?) / 민첩성 134(141) / 통솔력 109(112) / 마법 저항력 115(185)
스테이터스 수치가 평균적으로 말도 못하게 상승해 있었다. 거기에 더해 4차 전직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괄호 안의 숫자가 또 있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수치가 용인화 이후의 스테이터스 수치일 거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렇게 마렉한테 두들겨 맞고도 죽지 않은 게 당연한 일이었어….”
오필리아에게 마렉의 스테이터스를 들었을 때도 인간 같지 않다 여겼는데, 자신 역시 못지않았다. 아니, 용인화 이후의 수치는 오히려 마렉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이제는 마렉을 보고 괴물이라고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용의 반려가 지닌 진정한 힘은 오로지 육신의 강함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아룡.
강력한 용의 아종들이야말로 용의 반려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이후 그저 물음표로만 표기되어 있던 아룡들의 상태가 5차 전직 이후 변경되었다.
- 드레이크(골드레이크)(地)(귀환 중)
- 씨 서펜트(블루곤)(水)(탈태 중)
- 와이번(레드번)(毒)(탈태 중)
- 레드웜(블랙웜)(黑炎)(탈태 중)
- 페어리드래곤(게하임니스)(祕)(탈태 중)
레드번을 얻기 이전 무수히 많은 전장을 함께 헤쳐 나왔던 강력한 우군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땅의 아룡이 귀환하고 있었다.
**
스테이터스를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정확하게 용혈기사가 어떤 병과인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이번에도 직접 몸으로 부딪쳐봐야 감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몸으로 부딪칠 때가 아니었다. 이 오밤중에 자신이 맹스크의 내성을 배회해야 했던 이유를 상기해냈다.
줄리앙.
대적자의 운명을 벗고 조율자라는 새로운 숙명을 물려받은 줄리앙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전대 조율자가 되어버린 마렉을 만나 진실을 들어야 할 때였다.
시간이 없었다.
잠들어 있던 맹스크 성이 조금 전에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완전히 깨어났다. 영주의 지시로 내성을 비우고 물러났던 경비 병력과 맹스크의 가신들이 벌써부터 소란을 피우며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괜스레 구설수에 오르기 전에 서둘러 볼일을 끝마치기로 마음먹은 김선혁이 첨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벌컥.
첨탑 위에 오른 김선혁이 힘차게 문을 열었다.
“줄리….”
마렉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방금 막 잠이 들었으니, 가급적이면 깨우지 않는 게 좋을 걸세.”
턱. 나직한 당부와 함께 마렉이 축 늘어진 줄리앙을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줄리앙을 넘겨받은 그가 깨질 새라 조심스레 안아 들고는 앳된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
다행스럽게도 특별한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를 보니, 그냥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상이 있어 보이는 건 마렉 쪽이었다.
주름졌지만 생기가 돌던 피부는 퍼석퍼석 메말라버렸고, 나이와 맞지 않게 맑던 눈동자는 탁하게 바래고 말았다. 마렉은 하루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렇게 볼 것 없네. 어차피 진즉에 겪었어야 할 일을 이제야 겪은 것뿐이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코 마렉을 뚫어져라 쳐다본 모양이다. 마렉이 조금은 거북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내 나이가 이백하고도 마흔셋일세. 이 정도면 많이 정정한 게지.”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마렉이 아무리 늙어버렸다고 해도 그 본디 나이를 따라잡으려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쉬고 싶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겠구만.”
한숨을 쉰 노기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짓했다.
“앉게나.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그 말에 김선혁이 줄리앙을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진정한 용의 반려로 거듭난 것을 축하하네.”
“알고 계셨소?”
그의 질문에 마렉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 요란법석을 떨었는데, 모를 거라 생각했나. 첨탑의 창이 비좁기는 하지만, 그 휘황찬란한 섬광과 거대한 형상을 보기에는 충분했지.”
하기야 온 맹스크가 다 밝아질 정도로 찬란한 섬광이었으니, 모르는 게 도리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전승을 통해 용의 격 높음은 알고 있었네만, 솔직하게 말하면 꽤나 놀랐다네. 본체도 아닐 텐데 그 정도 존재감이라니, 실제로 본체가 현신할 때는 어떨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군.”
“나도 놀라기는 했소. 설마 용이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일 줄은 몰랐으니까.”
막연하게 상상만 했지 실제로 용을 본 것은 김선혁도 처음이었으니, 용을 보고 놀란 심정은 그나 마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대단하지. 정말 대단해.”
하지만 그의 놀라움이 감탄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마렉의 놀라움은 경계에 가까웠다.
“너무 대단해서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야.”
갑자기 정색을 한 마렉이 대뜸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 역할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 대륙의 운명에 관여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네.”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안에 용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자네를 조율자로 만들려던 것 역시 그 때문일세.”
그다지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마렉의 말은 자신을 조율자로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일단 그는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마렉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자신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마렉은 질문을 던져왔다.
“음….”
김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부정은 아니었다. 마렉의 질문은 그가 품어온 의문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역시 스스로가 유별날 정도로 성장 폭이 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달은 바 있었다. 다른 상급 병과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용사를 비롯한 특이 병과와 비교해도 그 성장 폭은 비정상적이었다.
마렉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령왕의 유산이라는 사기적인 무구와 정령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그가 30레벨에 가까운 격차를 극복하고 마렉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레벨에 비해 지나칠 정도의 강함, 굳이 비교할 상대를 찾으라면 혼돈을 손에 넣은 마왕 박상진 정도나 되어야 용기사에 비견할 만했다.
실제로 그는 마왕을 상대로 처참하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내심 그 한 번의 패배조차도 현저한 레벨의 격차 때문이라 생각했을 뿐, 정말로 용기사가 마왕보다 약한 병과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레벨만 같으면 마왕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실제로 싸워보기 전에는 스스로의 자신감이 합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이라면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수십 년 이상을 혹독하게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이 세상의 초인들은 결코 약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를 포함한 몇몇 이방인들은 그런 세월이 무색하게 단 몇 년 만에 그들을 모조리 추월했지.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라 생각하나?”
김선혁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마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보는 자네라면 홀로 나라 하나쯤은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자야. 그런데 그게 오직 자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마렉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 이방인들이 아니네. 이곳에서 태어나 나고 자란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란 말일세. 우리는 단지 손님에 불과해. 그것도 단숨에 주인의 집을 홀랑 태워 먹을 정도로 위험한 손님들이지.”
“하지만 이미 우리 또한 이 세상의 일부, 그렇게 구분을 둘 필요가 있겠소?”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한 차례 고민한 적이 있었던 김선혁에게는 불편한 화두, 자연스레 그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아니. 차별을 두자는 게 아닐세. 그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뿐이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마렉은 그다지 달변이 아니었고, 그대로 두었다간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진실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지만, 이렇듯 뜻 모를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건 그로서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과연 이 세상이 자네와 나 같은 이방인을 정말로 필요해서 불렀을 거라고 믿나?”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럼 이 세상이 원치도 않는데 대소환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현상으로 잘살고 있는 저쪽 세상의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운가? 그럼 질문을 바꿔 보도록 하지. 정말로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온 게 이 세상이라고 생각하나?”
마렉의 음성이 점점 차가워진다 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얼어붙을 듯 한기가 맺혔다.
“우리를 불러온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들일세.”
“그게 대체 누구요.”
“홀로 이 세상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졌으나, 세상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 언제고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낸 이들이지.”
“설마….”
딱딱하게 굳어버린 김선혁을 보며 마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역시 그들 중 하나를 알고 있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면 천하의 바보 천치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바보도 천치도 아니었다.
“자네의 반려인 용 역시 우리를 이곳에 불러낸 이들 중 하나라네.”
그런 그의 예상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마렉이 차갑게 말했다.
“우리 이방인들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다리는 세상 밖 존재들이 이 세상에 섞여들기 위해 내세운 대리자. 그리고 내가 보기에 자네의 반려는 이미 거의 목적을 이룬 듯 보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