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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계승 (2)
최초에 섬광이 터져 나왔을 때, 그건 강렬할지언정 단지 세상의 한 귀퉁이에 일어난 작은 이변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게 변해버렸다.
김선혁을 둘러싸고 맴돌던 빛무리는 이내 커다란 빛의 기둥이 되었고, 푸르스름한 밤하늘을 타고 끝도 없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섬광이 오를 곳이 없어졌을 때, 빛은 사방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새하얀 백광에 휩싸였다.
“음….”
창을 뚫고 스며든 강렬한 섬광에 깊이 잠들었던 영지민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벌써 해가 떴나.”
“이크. 늦었겠네.”
처음에는 아침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사방이 밝을 리가 없다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
내리쬐는 태양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금광(金光), 사람들은 얼이 빠져버렸다. 한여름 볕 뜨거운 정오에도 볼 수 없는 그 강렬한 빛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밤중에 갑작스레 깨어난 피로가 걷혀가는 기분이었다. 혼몽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명료해지고, 그들은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아….”
창밖의 세상은 그늘 한 점 없는 완전무결한 광명(光明), 그 자체였다.
거무죽죽 물 든 지붕도, 누렇게 뜬 담벼락도 온통 금빛으로 물들어 평소의 흉물스러움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야심한 밤에 일어난 기괴한 현상에 사람들은 반쯤 넋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한다거나 이를 꺼림칙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뭘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이 금빛 섬광이 상서로운 것이라 느끼고, 금빛 섬광을 쥐기라도 할 듯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이 금빛 섬광은 흉조(凶兆)가 아닌 길조(吉兆)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지 닿았을 뿐인데 이리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질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언제까지고 이 서기(瑞氣)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조금이라도 이 기운을 더 느끼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람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온 세상을 휘감았던 금빛 서기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아….”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더러는 마치 좋은 꿈을 꾸다 강제로 현실로 끌려 나온 듯 성을 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괜한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각기 반응은 달랐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상실감.
사람들은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뭐였을까.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불현듯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라도 사라진 섬광의 끝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찢어질 듯 부릅뜬 눈이 저 높은 하늘에 못 박혔다.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 그곳에 용이 있었다.
**
[반려여. 그대의 뜻대로 되었다.]
꽉 찬 만월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가 말을 걸어왔다.
[그대가 그토록이나 살리고자 했던 이에게 새로운 운명이 부여되었고, 그로 인해 그대가 말살해야 했던 대적자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노라.]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줄리앙을 살리기 위해 피떡이 되어가며 마렉과 결투를 했고, 어렵게 승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죽고 죽여야 하는 살육의 고리 중 한 쪽을 끊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기뻐할 수 없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거대한 생명체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던 탓이다.
“용?”
뿌연 창 너머로 보듯 흐릿한 형체였지만, 그건 분명 용이었다.
거대한 한 쌍의 날개와 유려한 몸체는 단지 실루엣만으로도 그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골드레이크의 강인함, 레드번의 날렵함, 블루곤의 고고함, 레드웜의 유연함, 페어리드래곤의 신비로움, 도무지 하나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아룡들의 장점이 한 데 모여 있었다.
용은 강인하고 날렵했으며, 도도하면서도 유연하고 신비로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감정이 허상처럼 흐릿한 실루엣만을 보고 느껴진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지, 진짜 용이야?”
그렇게나 바라던 용을 만났다. 비록 흐릿한 실루엣에 불과할지언정 처음으로 목소리만이 아닌 용의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꺼낸 말이라는 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얼빠진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김선혁은 그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격 높은 존재를 마주하고 모든 사고가 정지되다시피 했던 탓이다.
[그대의 표정이 실로 나를 기껍게 만드는구나.]
길게 뻗은 목 위에 얹어진 머리는 흐릿했지만, 그는 왠지 용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반려여. 지금의 나는 그대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가? 혹여 기대에 미치지는 않는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용은 그의 빈약한 상상력만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기대하고 실망하고를 논하는 것조차 용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 전혀.”
간신히 꺼낸 한마디에 용이 흡족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다행이로다.]
“혹시 나는 시험을 통과한 건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김선혁이 물었다.
[내가 그대 앞에 있다. 또 다른 대답이 필요한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만큼 용과의 만남으로 감정이 격동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흐릿해?”
그건 질문이면서 강렬한 열망이기도 했다.
애 닳을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 보다 선명한 용의 실체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함께 할 것 같았던 용은 지금의 만남은 조금 이른 인사에 불과하다 대답했다.
[나를 찾아와라. 그대의 숨결이 진정으로 내 심장에 닿았을 때, 그때야 비로소 나와 그대의 관계는 완전해지리라.]
“어디로?”
똑같이 다음을 기약하는 말이었지만,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손도 닿지 않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용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필요한 건 단 한 걸음뿐이었다.
[북쪽. 그곳에 내가 있다.]
그 말을 끝으로 용의 형체가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대가 나에게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용의 음성조차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흐릿하던 형상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아….”
지독한 상실감에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치 팔이나 다리, 어디 한 군데가 통째로 잘려져 나가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는 용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당신은 마침내 완전한 자격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머릿속으로 예의 메시지가 파고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을 것이다.
- 당신은 이름뿐이던 용의 반려에서 진정한 용의 반려로 거듭났습니다.
용의 존재감이 마치 꿈속의 그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면, 메시지는 현실이었다.
고저 없는 건조한 메시지에 안개 속을 헤매듯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 4차 병과 용기사(Dragon Knight)에서 한 차례 더 전직합니다.
- 전직 하겠습니까?
언제나 그러했듯 그의 대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당연히 전직.”
- 4차 전직과 5차 전직은 그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이제까지의 전직이 기존의 병과가 보다 강력하고 다재다능하게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면, 5차 전직은 전혀 다른 새로운 병과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 한 번 전직을 결정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
- 그래도 전직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미리 5차 병과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메시지가 대뜸 전직 의사를 물어왔다.
“전직하겠어.”
다시 한 번 그를 중심으로 섬광이 터져 나오고, 맹스크의 하늘 위로 또 한 번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하지만 방금 전 용이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섬광은 갑작스레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고, 이내 온데간데없게 되었다.
“아아아.”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전직을 거듭할 때마다 몸을 가득 채우는 고양감에 매번 놀랐던 김선혁이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단연코 5차 전직의 충만감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막대한 생명력이 혈관을 타고 돌다 심장에 쌓여갔다. 그리고 심장에서 시작된 생명력의 흐름이 온몸을 돌고 돌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결투의 피로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어?”
처음에는 좋았다. 지친 육신에 새로운 활기가 스며드는 건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금방 끝이 날거라 생각했던 전직의 임팩트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솟아난 생명력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으어어어.”
입이 벌어지고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사지가 덜덜 떨리고, 통제를 벗어난 몸이 보기 흉하게 뒤틀렸다.
콰드드득. 우지직.
뼈가 뒤틀리고, 살가죽이 찢겨져나가는 고통, 그보다 끔찍한 것은 당장에라도 과부하로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의 고통이었다.
‘4차 전직과 5차 전직은 그 성질이…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한 번 전직을 결정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전직하시겠습니까?’
뒤늦게 괜히 메시지가 재차 전직의사를 확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결정은 내렸고, 지금으로서는 부디 이 끔찍한 생명력의 홍수가 심장이 터져나가기 전에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 정말로 터지진 않겠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김선혁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까지 전직하다 심장이 터져 죽었다는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까지 없었다고 앞으로도 없으란 법은 없었다.
그게 하필이면 이번이었다.
쩌어억.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막대한 생명력의 파도에 헐떡이던 심장이 찢겨 나갔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 감촉을 인지했고, 그에 더해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심장이 멈추면 어떻게 되지?
의문과 동시에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던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쾅.
**
김선혁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정신을 잃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으으….”
비몽사몽 정신없는 와중에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심장!”
정신 나간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허겁지겁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두근두근.
선명하게 느껴졌던 파육의 감촉이 무색하게 심장은 무사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심장 박동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마치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자신의 몸이 맞았다. 단지 그 감각이 너무도 생경했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전직에 성공(?)한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도대체 제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음….”
몸의 이곳저곳을 어루만져대던 그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듬더듬.
단지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이질적인 감각, 몇 번이나 손을 움직이던 그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