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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계승 (1)
전문을 두고 생각에 잠겨있던 김선혁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후. 혹시 폐하께서 이 전문에 대해 알고 계시오?”
그의 질문에 아샤 트레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전문은 황성을 통하지 않고 맹스크로 바로 날아왔습니다.”
“그 말은….”
“폐하께서는 이 전문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아샤 트레일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부상으로 인해 폐하께서는 대공께서 황도를 나서는 것을 더 이상 용납지 아니하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이미 황가 수호대에 그러한 지침이 전달되었고, 대공께서는 아마 부상이 나으시는 대로 황도로 가셔야 할 겁니다.”
일견 무덤덤한 듯한 대답을 하는 여기사의 얼굴에 순간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녀가 일부러 전문의 존재에 대해 황실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약 폐하께서 이 전문의 존재를 아셨다면, 대공께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오필리아는 한 번 외유를 나갈 때마다 돌아올 줄 모르는 남편의 행동을 영 탐탁지 않아 했다. 거기에 이번 결투로 인해 그가 끔찍한 부상을 입자, 인내력이 바닥이 난 상태였다.
상황이 그러할진대 그녀에게 평소와도 같은 현명함과 사려 깊음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아마도 아샤 트레일이 전문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건, 이러한 그의 사정을 헤아렸기 때문이리라.
“고맙소.”
고지식한 기사가 발휘한 융통성에 김선혁은 깊은 감사를 표했다.
아마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황실에 대한 충성과 그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샤 트레일은 생색은커녕 감사 인사조차 부담스러운지 급히 말을 돌렸다. 그 역시 더 이상의 감사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지나간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가야겠지.”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만약 끝까지 몰랐으면 모를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위기에 빠진 용사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어리숙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던 용사다. 모르긴 몰라도 반대의 상황이라고 해도 용사 역시 자신과 똑같은 결정을 내릴 거라 믿었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릴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샤 트레일은 그의 대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회신하시겠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김선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서부로 향하는 건 용사와의 의리 때문이지 교국의 요청 때문이 아니오.”
중부를 떠나던 그날 보았던 판테이아 기지 사람들의 환송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량함과 국가로서의 교국은 전혀 별개였다.
그가 생각하는 교국은 조금만 빌미를 줘도 자신을 이용하겠다고 온갖 잔머리를 굴릴 교활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호락호락하게 교국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교국은 나보다 자신들이 먼저 용사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야 할 거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대답에도 아샤 트레일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황가 수호대의 눈은 제가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소.”
더 이상 아샤 트레일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이미 보고를 누락한 것만으로도 이 고지식한 기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전에 방법을 찾아보겠소.”
**
아샤 트레일에게는 큰 소리를 쳤지만, 하루아침에 대책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마렉과의 결투에서 입은 치명적인 부상 탓에 오필리아는 지금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오죽하면 이후 황도 밖으로의 외유를 금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는가.
“돌아버리겠군.”
미리 말을 해두자니 붙잡을 게 뻔하고, 그렇다고 미친 척하고 몰래 다녀오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일정 부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아샤 트레일의 처지 역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준민이 이 망할 놈.”
괜히 실종된 박준민의 욕을 해보지만,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어차피 서부로 향하더라도 줄리앙의 일이 일단락되는 만월 이후에나 맹스크를 나설 수 있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오필리아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마렉과의 결투가 아니라 해도, 이미 김선혁은 서부에서 큰일을 치른 적이 있었다. 마왕에게 패배하여 반년 가까이 실종되었던 그가 또다시 위험천만한 서부행을 하게 둘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뭔가 오필리아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생각해내야 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홀쭉해졌던 달이 조금씩 살이 붙는다 싶더니 어느새 만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연합군의 소식이 맹스크에 전해졌다.
용사가 실종된 것과는 별개로 연합군은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마왕이 사라진 이후 기승을 부리던 마물들의 수가 대폭 줄어든 덕이었다.
하지만 혼돈의 전령을 자처하는 이들이 각지에서 나타나 연합군의 발목을 붙잡은 탓에 거듭된 승전보에 비하면 연합군이 근래 전진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전선이 고착화되어가기 시작했다.
혼돈의 전령들을 앞세운 마물과 마수들의 방어선에 가로막힌 연합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점령지를 정화하고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이 정도 선에서 작전을 마무리할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연합군은 더 이상 무리한 서진(西晉)을 고집하는 대신, 버려진 요새와 성들을 보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약 117개 연대로 구성된 21만의 병력과 3천의 초인들이 동원되었던 대규모 작전이 사실상 종료된 것이다.
마렉과 약속한 만월을 하루 앞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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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굳히기에 들어간 연합군이 벌써부터 점령지의 분배를 두고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마왕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데 참으로 한심한 작태였다.
하지만 어쩌랴. 처음부터 중부의 왕국들이 서부로 나아간 것은 거창한 정의 때문이 아니었으니, 생존과 이후의 이득을 위한 결정이었다.
당장 급한 불을 껐으니 떡고물에 눈이 돌아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적당히만 해 먹어라. 적당히만.”
땅따먹기를 하든, 잔치를 벌이든 간에 이익에 눈이 멀어 연합군이 분열되는 일만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서부의 상황이 계속해서 변하는 동안 부상에 몸져누웠던 김선혁도 어느새 회복이 되었다.
“사실상 실혈(失血)로 인한 후유증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지경입니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게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환자가 짧은 시간 만에 완치에 가까울 정도로 회복되자 사제들은 몹시도 놀라는 눈치였다.
“사제들께서 워낙 고생해주신 덕분이지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아무리 그가 지닌 수 속성 지배력의 특성이 회복력의 강화라고 해도 사제들이 졸도할 정도로 신성력을 퍼붓지 않았다면 이렇듯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쪽의 어머니 나무에게 전대 정령왕의 유산을 받고 사라진 물의 정령들은 소식이 없었다.
뭐, 정령왕이 되기로 했나 보지.
김선혁은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아티야와는 달리 큰 유대가 없는 물의 정령들이다. 그들이 아티야처럼 주인을 위해 정령왕의 자리마저 포기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높지 않았다.
어차피 정령이야 또 계약하면 그만이었다.
과거의 그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원하는 때 언제고 황도의 정령사들을 불러들일 능력이 있었으니까.
“후.”
사제들이 돌아간 후 김선혁은 오랜만에 방을 나섰다.
사제들의 노력으로 인해 피륙에 난 상처는 전부 치료가 되었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생각만큼 올라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떠나기 전까지는 컨디션이 돌아와야 할 텐데.”
어느덧 만월이 코앞이다. 맹스크에서의 일만 해결되면 바로 성을 떠날 생각이었다.
때마침 롤랑의 그리핀 드본이 맹스크에 와 있던 터라 서부와의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도착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저 드넓은 서부 어디에서 박준민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얼마나 수색 작업에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벌써부터 암담할 지경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부디 그 기간이 짧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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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자 마렉이 찾아왔다.
“내성의 동쪽 첨탑에서 기다리겠네.”
계승의 의식이 완전히 끝이 나 줄리앙이 용살자의 운명을 벗기 전까지 김선혁은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줄리앙을 잘 부탁하오.”
그래서 그는 미리 마렉에게 그녀가 그 어떤 경우에도 계승의 의식을 마칠 수 있도록 신경 써 달라 부탁했다.
자신 때문에 굳이 지지 않아도 될 조율자의 짐을 떠안게 된 그녀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하기야 그에게 줄리앙이 소중하듯 마렉에게도 다음 대를 이을 조율자는 중요한 존재였다. 마렉의 말마따나 어련히 잘해줄 것이다.
“근데 의식이 끝이 났는지는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소?”
“그냥 알게 될 걸세. 그러니 걱정 말게.”
마렉이 돌아가고, 그는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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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첨탑이 위치한 맹스크 내성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하인들이야 잠에 들었다고 해도 경비병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줄리앙이 미리 성을 비워둔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맹스크의 신임 여백작과 여제의 남편이 한밤중에 밀회를 나눴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김선혁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진위를 떠나 스캔들이 나는 것만으로도 황실의 권위가 손상될 수 있었다. 굳이 말 많은 귀족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가 없었다.
“언제쯤 시작되려나.”
동쪽 가장 높은 첨탑이 보이는 내성의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은 김선혁이 깊게 그늘진 탑을 바라보았다.
저긴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거리가 멀어 희미하다지만, 특유의 거북스러운 기운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단지 옅은 기운을 느낀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속을 들끓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대적자 뿐이었다.
“후우. 후우.”
김선혁은 심호흡을 했다. 멍하니 첨탑을 바라보고 있다간 자신도 모르게 첨탑을 향해 뛰어들 것만 같았던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들끓는 살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역시 이 방법뿐이야.
살의가 깊어질수록 그는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줄리앙이 조율자로 거듭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음.”
그렇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얼마나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까.
그동안 김선혁은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단지 첨탑이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살심을 참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한 번 의식하고 나자 아무리 거리를 벌려도 대적자에 대한 살의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죽여. 죽여. 죽여.
환청과도 같은 음성이 그를 충동질해댔다.
“빌어먹을.”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의식이 끝이 난 뒤에 내성을 찾는 게 나았다. 그랬다면 최소한 지금처럼 마음을 다스린다고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충동이 강해져간다.
조금만 더 참자.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마렉을 믿고 기다렸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상잔의 비극을 막은 당대의 조율자라면 이번에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계속해서 몸을 불려가던 살의가 어느 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의 그의 몸을 둘러싸고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그가 겪어왔던 최초의 각성, 그리고 몇 번의 전직 동안에 보았던 그 어떤 섬광보다 찬란하고 강렬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