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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각성 임박 (3)
온몸을 붕대로 감싼 채 침상에 누운 김선혁과는 달리 마렉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마렉이 결투에서 진 것은 스스로의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지, 딱히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상처 없이 멀끔한 마렉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결투에서 이긴 것이 그저 요행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달이 꽉 차는 다음 보름, 계승의 의식을 치를 생각이네.”
김선혁이 잘려나간 머리채를 보며 되도 않을 위안을 찾고 있는 동안 마렉은 이후의 일정을 늘어놓았다.
“자네가 그토록이나 알고자 헀던 진실 또한 그날 모두 말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게.”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마렉이 지난 약속에 대해 언급하며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조율자에게 특별한 제약이라도 가해진 모양인지, 약속의 이행을 미루는 얼굴 그 어디에도 시간을 끄는 기색은 없었다.
“뭐, 도망칠 사람도 아닌데, 며칠 정도 못 기다려주겠소.”
그의 시원시원한 대꾸에 마렉이 고맙다 말했다.
“근데 뭔가 후련해 보이는 게, 내가 잘못 본 거요?”
결투에 패배하여 원하던 후계자를 구하지 못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마렉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부드러운 것이 큰 짐이라도 벗은 듯한 기색이었다.
“부정하지는 않겠네. 솔직하게 말하면 후련한 것도 사실이니까.”
마렉 역시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선선히 인정했다.
“음.”
한 사람이 200년이란 시간을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갖고 살아왔다는 게 얼마나 큰 중압감이었을지 김선혁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마렉의 표정을 보며 조율자로서 걸어온 그 길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줄리앙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무겁디무거운 짐의 무게가 새삼 선명하게 다가왔다.
“과거 이방인에 대한 추살이 대륙에 널리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당시의 나는 추격대와의 전투로 극심한 상처를 입었었지. 그리고 나 역시 지금의 맹스크 여백작처럼 조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네.”
우울한 얼굴이 된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마렉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난번에 말한 적 있었지. 뭐가 됐든 살아있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이야.”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살아있어야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법, 죽고 나면 모든 게 부질없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살아있는 이들만이 앞으로 나아갈 권리를 얻게 되니, 그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삶보다 나은 죽음은 없다고 믿었다.
그건 수도 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 있어 차라리 신념이라고 해도 좋을 믿음, 줄리앙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지금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공감하네. 만약 과거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을 선택할 걸세. 자네 말마따나 죽고 나면 모두 끝이니까.”
2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먼저 죽어간 이방인들이 어떻게 잊혀 졌는지 지켜봐왔던 마렉이기에 그 말의 무게가 남달랐다.
“그럼 달이 꽉 차는 그날, 다시 찾아오겠네.”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남긴 마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김선혁이 무겁게 한 숨을 내쉬었다.
먼저 죽어간 전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들과 수많은 병사들, 그리고 이방인 동기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는 다시 한 번 무겁게 되뇌며 줄리앙이 있을 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김선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잠시라도 신성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금세 쩍, 하니 벌어져 피를 토해내던 상처도 어느새 아물어 흉터만이 남아있게 되었고, 엄청난 출혈로 인해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랬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거룩한 섬광도, 끊이지 않는 활력을 제공하는 땅의 기운도 이미 몸에서 빠져나가 버린 막대한 양의 피를 완전히 보충해줄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요 앞에 나가보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소? 이거 원 답답해서 못 견디겠소.”
정신을 잃고 열흘, 다시 깨어나고도 또 열흘, 침상에서만 시간을 보내자니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하물며 온 대륙이 좁다고 싸돌아다니던 그에게 맹스크의 귀빈실은 지나치게 비좁았다.
“불평이 나오십니까?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장애가 남지 않았다는 게 기적입니다.”
죽겠다고 몸을 비틀어대는 그의 상체를 지그시 누르며 아샤 트레일이 톡, 하고 쏘아붙였다.
“아무리 단련한 육신이라고 해도 켜켜이 쌓인 부상과 피로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부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시어 스스로의 몸을 귀이 여기도록 하십시오.”
하급 귀족에 불과했을 때나 대공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오른 지금이나 이 여기사의 깐깐함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요하다면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강단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 상대가 몇 번을 말해줘도 학습 능력이라고는 없는지 빈번하게 중상을 입는 영주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알겠소. 더 이상 투정부리지 않으리다.”
한마디 구시렁거렸다가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은 김선혁이 질렸다는 얼굴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어째 대공께서는 말단 기병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하신 게 없으십니다.”
끝까지 장난스러운 그의 태도에 아샤 트레일이 조금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흘러 지고한 위치에 올랐음에도 한결 같기만 한 영주가 기꺼운 눈치였다.
“나야 태어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원래 성격이 이런 놈이니 쉽게 변하겠소.”
“그러신 것 치고는 말투는 제법 대공다우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아샤 트레일의 말에 김선혁이 겸연쩍은 얼굴을 해 보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사제들이 말하기를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켰으나, 심신이 강건하여 빠르게 회복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사제들의 말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아샤 트레일을 빤히 바라보던 김선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여 할 말이 있다면 하시오.”
뒤늦게 아샤 트레일이 무언가 할 말을 꺼내지 못해 말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탓이다.
그리고 그녀가 꺼내지 못한 용건이 좋은 소식일 가능성은 몹시 낮았다. 무조건적인 안정이 필요한 중상자에게 당장 귀띔을 해줘야 할 정도로 급박하면서도, 환자의 안정이 깨어질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좋지 못한 소식.
김선혁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덴버그 제국은 아데스덴 황실의 강력한 지도력과 타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한 초인 전력으로 인해 더없이 안정된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면 모르겠지만, 당장으로서는 이 강력한 신생 제국에 대한 그 어떤 도전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제국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친인들과 지인들 역시 이렇다 할 큰일에 직면해 있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제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에 있는 이뿐이었다.
“혹시 중부의 전선에 일이 생긴 거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마왕과의 일전을 위해 서부로 향한 박준민이었다.
“준민이, 아니 용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요?”
무언가를 숨기는데 능숙하지 않은 아샤 트레일이다. 그런 그녀의 굳어버린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막연하던 불길함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에 내던져진 듯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트레일 경. 대답해주시오.”
기력이 쇠한 육신,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다잡고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아스토리아 교국의 용사, 보름 전에 마왕과 조우, 그리고 격전 끝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그토록이나 듣고 싶지 않았던 박준민의 실종 소식이었다.
“자세히, 자세히 들려주시오.”
김선혁은 억눌린 음성으로 자세한 전황을 물었다.
“보름 전 용사를 선봉으로 내세운 아스토리아 교국의 제 1 신전 기사단과 제 3 신전 기사단, 대신전 성가대 및 사제단, 성전사단 7천을 포함한 연합군 병력 총 1만 2천이 마왕과 조우하였습니다. 이에 용사와 상급 팔라딘들이 응전을 시작, 하루 밤낮을 격렬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아샤 트레일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사실을 말하는 데 주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염려가 담긴 곧은 눈동자로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을 뿐이었다.
“개전 초, 압도적으로 적을 밀어붙인 건 연합군 측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전 기사들과 사제단은 마물과 마수를 훌륭하게 제압했고, 성전사단을 위시한 연합군의 병사들 역시 수많은 마물들을 상대로 용전 용투를 보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혼돈의 전령이라 불리는 자들이 대거 전투에 난입하면서 양상이 변했습니다. 용투 끝에 격퇴하였던 마물과 마수들의 수 이상으로 많은 적이 몰려들었고, 마왕이 때를 맞추어 전투에 끼어들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물리친 적이 보다 많은 수로 충원되었을 때, 연합군이 지었을 표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암담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겪어본 교국은 썩을 대로 썩었지만, 그 아래를 떠받드는 신전 기사들과 성전사단, 사제들은 진짜배기들이었다.
“마왕이 난입하자 성가대가 소리 높여 부르던 성가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연합군을 마기로부터 지켜주던 사제들의 결계가 순식간에 깨어져 나갔답니다.”
하지만 마왕이라는 거대한 악의 앞에서 선하고 용맹한 인간들의 의지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이제껏 죽음으로 전우의 곁을 지키던 용맹한 병사들이 연합군을 향해 칼을 들이대고, 죽어서조차 아군의 발목을 붙잡았답니다. 순식간에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압도적인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연합군에게 퇴로는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서부에서 오랜 시간을 싸워온 그였기에 연합군이 느꼈을 절망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아군의 배에 칼을 쑤셔 박고 사지가 잘린 전우가 살아있는 육신을 물어뜯는다. 지친 육신보다 빠르게 정신이 무너지고 종내에는 마기가 침투하여 또 다른 희생자를 찾게 된다.
그 상잔의 비술이야말로 마왕이 서부를 무너뜨린 가장 큰 무기였고, 연합군이 상대해야 하는 마왕의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였다.
“그때 용사가 나섰습니다.”
대지에 박힌 성검 발뭉이 찬란한 빛을 일으키고, 신의 거룩함을 담긴 섬광에 혼몽에 빠져들었던 병사들이 깨어났다. 몸에 침투했던 마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들 중 태반이 일시에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세에 몰린 연합군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사이에 사제들의 결계가 벗겨지고 무방비하게 마기에 노출된 연합군의 희생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1만 2천의 정예 병력 중 7천에 달하는 병력이 그 짧은 시간동안 희생된 것이다.
“용사가 퇴로를 열었고, 그제야 연합군은 퇴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용사는 마지막까지 전장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마기로 이루어진 안개를 불러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절 전투에 나서지 않던 마왕이 용사를 향해 달려들었다고….”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던 아샤 트레일이 탄식과 함께 용사의 마지막을 전해주었다.
“퇴각을 제안하는 연합군의 병사들에게 용사는 ‘형님은 싸울 줄도 모르는 수만의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사지에 남은 바가 있다. 아우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또 뭔가.’라고 웃으며 마왕과 맞섰다고 합니다. 연합군의 마지막 생존자가 완벽하게 전장을 이탈했을 때, 검은 안개에 맞서는 백광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리어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았다고 하더군요.”
‘언제고 형님처럼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저도 영웅 소리 좀 들어보자고요.’
어리숙하지만 선량했던 용사가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며 저런 말을 했을 때 그는 그저 웃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때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자신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영웅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사지라고 생각한 그 어떤 전장에서도 한 몸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기에 부린 패기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용사는 아니었다.
성검은 분명 강력한 신기(神器)였지만, 수많은 적들을 뿌리치고 나가는 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고, 레드번을 타고 창공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용기사와 달리 용사는 적진에서 고립되면 힘이 고갈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막강한 회복력으로 부활을 하는 것도 스스로가 페널티를 감당할 수 있을 때뿐, 혹시라도 더 이상 떨어질 레벨이 없을 때까지 죽음을 반복하게 될 경우 용사는 그저 일반인에 불과했다.
“용사의 행방불명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진격은 상당히 많은 소득을 얻었습니다. 당장 몰락한 서부의 4분지 1 이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용사가 실종되는 것과 동시에 마왕 역시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아샤 트레일은 덤덤히 서부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를 마저 설명해주었다.
“연합군의 생존자들은 마왕과 용사가 서로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주고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예상과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연합군의 가정에 김선혁은 기어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더 할 말이 있소?”
왠지 모르게 더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아샤 트레일의 모습에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대공께 아스토리아 교국의 비공식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지금 할 이야기를 전해주어도 될지 갈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단을 내린 그녀가 교국의 비공식 전문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
전문을 빠르게 훑어본 김선혁이 탄식을 내뱉었다.
“교국은 이미 몇 차례 생존자들의 구조 작업을 해보신 바 있는 대공이라면, 실종된 용사를 구해올 수 있을 거라 믿는 눈치였습니다.”
교국에서 날아든 비공식 전문은 그에게 또 한 번 서부로 향하라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