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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56화 (256/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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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각성 임박 (2)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쓸 수 있는 치사한 수라고 해봐야 흙을 뿌린다거나 침을 뱉어 상대의 시야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수들은 모두 정령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고, 멀리서 마무리하도록 해.”

김선혁은 만약을 대비해 정령들에게 철저하게 원거리 공격을 주문했고, 정령들은 마렉에게 일절 접근하지 않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무르게 변한 흙이 발목을 잡아챘다. 잠시라도 꾸물거릴라 치면, 생매장이라도 할 듯 흙이 쏟아지고 구덩이가 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생겨난 바람의 칼날이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정신없이 구르고 달리고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이 불의의 습격을 모조리 피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썩둑.

흙과 모래로 범벅이 된 봉두난발이 기어이 바람에 잘려나갔다.

하지만 잘려진 머리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마렉은 그야말로 뭐 빠지게 달리고 구르며 아티야와 누다르의 공격에 저항했다.

“이익!”

검성이라 추앙받는 노기사이자 대륙의 균형을 위해 힘써온 조율자가 어디 가서 이런 꼴을 당해봤겠는가.

분이 치미는지 악귀처럼 일그러진 마렉의 얼굴을 보며 김선혁은 실소했다.

“이게 다 자업자득이요.”

본인이 바로 직전에 내뱉은 말이 있으니, 이제 와서 항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

결정타를 날릴 듯 날리지 않는 아티야와 누다르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처음에는 조율자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조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아티야와 누다르는 명백하게 마렉을 농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을 끔찍이 여기는 정령들이니만큼 그를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린 마렉에 대한 반감이 컸던 모양이다.

이제 와서 말릴 수도 없었다.

정령의 행동을 세세하게 조율하는 것은 생각 외로 심력의 소모가 큰 행위였고, 샘솟는 활력과는 별개로 심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에게는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대로 지켜만 보고 있자니, 이제까지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마렉이 쓰러지기도 전에 자신이 출혈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헙!”

그런 그의 상태를 헤아린 것인지 누다르가 반복되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저 발목 근처만을 잡아챌 뿐이던 대지가 통째로 무너져 마렉을 완전히 집어삼킨 것이다.

콰아아아아.

해일처럼 일어나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흙더미를 본 마렉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자, 잠깐.”

야속한 땅의 정령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마렉을 생매장해버렸다.

**

“흐어어어!”

눈을 감고 있던 마렉이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몇 번인가 숨을 제대로 들이쉬기도 전에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얼마나 흙과 모래를 마신 것인지 내뱉는 기침마다 흙이 튀어나왔다.

“우웩.”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구역질을 해대며 흙을 토해냈다. 강력한 초인답지 않게 눈물과 콧물까지 흘려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친 듯이 기침과 헛구역질을 해대던 마렉이 입가를 닦아내며 벌렁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내가 졌군.”

뭔가 후련함과 아쉬움이 잔뜩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네는 분명 나보다 약했네. 그런데도 지금 누워있는 건 나구만.”

“당신은 최초의 참격에서 나를 베어야 했소.”

마렉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그 무지막지한 참격만으로 이 결투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때의 김선혁은 엄중한 부상으로 제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무방비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렉은 어쩐 일인지 공격을 잇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가 부상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는 그걸 마렉의 어정쩡한 마음가짐때문이라 여겼다. 가급적이면 큰 부상 없이 상대를 쓰러트리려던 안일함이 승패를 가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마렉이 바로 공격을 잇지 않은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마렉은 자신의 참격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이루지 못한 이유가 용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용은 교묘하게 그 빈틈을 파고들어 마렉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는 전룡의 본능에 휩싸여 인지 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부상까지 입어 의식이 반쯤 날아갔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렉으로서는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마렉은 굳이 용을 언급해 결투의 결과를 흐리지 않았다.

“그렇구만. 그때 이미 승패가 갈린 거였어.”

그저 덤덤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뿐이었다.

“아마 정상적으로 겨뤘다면, 나는 당신을 이기지 못했을 거요.”

“어쨌건 승자는 자네일세.”

마렉의 어설픈 마음가짐과 땅의 정령왕이 남긴 유산, 그리고 용인의 강인함, 거기에 용의 개입까지, 그 모든 게 어우러져 기적적인 승리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이용해 승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김선혁 본인이었다.

과정이 어찌 됐건 간에 또 하나의 기적적인 승리를 이룬 것이다.

“약속은 지키도록 하지.”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던 마렉이 입을 다물고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쉬고 싶구만.”

그 말을 끝으로 마렉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노쇠한 육신이 결투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절명한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털썩.

‘주인님!’

‘주인이시여!’

김선혁이 엉덩방아라도 찧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우람하던 용인의 거체가 순식간에 쪼그라들더니 이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아. 나도 좀 쉬어야겠어.”

한계에 도달한 건 마렉뿐만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공격을 두들겨 맞으면서 쌓인 데미지가 결투가 끝이 나자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끔찍한 고통과 탈력감에 이내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부탁할게.”

흐릿한 시야 너머로 새하얀 털을 가진 괴수가 다가오는 것을 본 김선혁이 눈을 감았다.

**

껌벅. 껌벅.

익숙한 듯 낯선 천장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김선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헉!”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이 절로 나오며 허리가 접혔다. 그제야 자신이 무지막지한 부상을 입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가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이제 좀 정신이 드십니까.”

고저 없는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샤 트레일이 보였다.

“트레일 경.”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그가 묻기도 전에 여기사가 지난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핀이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제가 알던 그 그리핀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습니다. 하얀 털은 붉게 물들었고, 그게 설마 전부 피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아샤 트레일은 드본이 돌아왔을 때, 맹스크 성이 발칵 뒤집혔었노라 말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군주의 반려이자 맹스크 영지에서 녹테인과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대공이 완전히 피떡이 되어 돌아왔으니 소란이 일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황가 수호대는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은 마렉을 절단 낼 것처럼 난리를 피워댔고, 맹스크 성의 인사들은 귀인의 변고로 인해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해댔다.

“떠나기 전 미리 상황을 말해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호들갑은….”

그의 태평스러운 말투에 여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른팔은 거의 잘리다시피 하여 떨어지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고, 가슴과 배는 난도질당해 속의 내용물을 게워낼 것 같았습니다. 왼쪽 다리는 부러져서 아주 보기 좋게 돌아가 있더군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오른쪽 귀는 반절이 사라졌고, 사지육신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하얀 붕대로 감싸진 몸이 마치 미이라 같았다. 워낙에 결투에 몰입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던 부상들이 온몸에 가득했다.

“처음 대공께서 돌아오셨을 때는 저는 대공께서 이미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부상이 극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피하지 못해 몸으로 받아낸 검격만 해도 수십 차례였고, 직격당한 공격도 적지 않았다. 그것도 보통의 검격도 아니고 검성이라 불리는 초인의 검격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살아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사제라는 사제들은 모조리 불러 대공의 부상을 치유하도록 했습니다. 불려온 사제들이 몇 번이나 졸도하기도 했지요. 대공의 상태는 그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호들갑이라니, 대공께서는 지나치게 태평하시군요.”

김선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기사의 전에 없는 질타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후. 일단 저는 나가서 대공께서 정신을 차리셨다는 걸 알려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알리지 않으면 고지식한 황실의 기사들이 자결이라도 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아샤 트레일의 말은 전혀 농담 같이 들리지 않았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라면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기에 더욱 끔찍한 말이었다.

“그리고 대공에 대한 염려로 잠도 이루지 못하시는 폐하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지요.”

뒤늦게 오필리아의 존재를 떠올린 김선혁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으아. 어쩌지.

보나마나 화가 잔뜩 났을 오필리아, 어쩌면 이대로 다시 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가서 치를 대가가 훨씬 더 커질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한참을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문을 나서지 않고 있던 아샤 트레일이 말을 걸어왔다.

“검성 로아힘 공이라면, 패배가 꼭 실망할 일만은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자신을 등지고 선 여기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선혁이 뒤늦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그를 본 아샤 트레일이 결투의 승패를 지레짐작한 게 틀림이 없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누가 봐도 승자 같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대공의 연배가 로아힘 공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차후 정진하다 보면….”

“난 지지 않았소.”

조심스러운 위로의 말에 김선혁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무슨….”

아샤 트레일이 왈칵 몸을 돌렸다.

“들은 대로요.”

“설마….”

염려 가득하던 얼굴에 불신이 번지더니, 이내 경악이 되었다.

“설마가 맞소. 결투에서 이긴 건 로아힘 공이 아니라 나요. 그러니 혹여라도 내가 실의에 빠질까 걱정하지 마시오.”

**

맹스크 성이 발칵 뒤집혔다. 사경을 헤매던 귀인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한 번 난리가 났고, 모두가 당연히 검성이 승리했을 거라 생각했던 결투의 승자가 사실은 피떡이 되어 돌아온 대공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그라두스니 뭐니 떠들어대도 결국은 검성만이 제국 최고의 검이라 믿었던 이들은 좀처럼 이 소식을 믿지 못했다.

“내 직접 본 것은 아니나, 대공께서는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오. 만약 그분께서 그리 말하셨다면 필시 그리된 것이겠지.”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에게 확인을 해보았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이를 뜬소문이라고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아무렴 황실의 기사들과 대공이 검성과의 결투를 두고 허언을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김선혁은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이 결투 자체가 친애하는 줄리앙과 자신 사이에 어거지로 끼어든 악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을 뿐, 명성을 노리고 치른 결투가 아니었던 탓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김선혁에게 다른 이들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결투 직후 마법사가 침실까지 찾아와 황성과 통신을 연결했고, 그는 얼굴이 반쪽이 된 오필리아로부터 혼이 빠지도록 강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무슨 사고를 쳐도 묵묵히 뒤를 받쳐주었던 오필리아가 이번에야말로 화가 단단히 나 버렸다.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강하게 질책을 해오는 오필리아의 새로운 얼굴에 그는 반쯤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 정도로 오필리아의 분노는 엄청났다.

[이번에 황도로 돌아오면 당분간 외유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요.]

급기야 그녀는 외출 금지라는 강력한 제제를 가해왔고, 몇 번이나 비슷한 잘못을 했던 그로서는 항의할 염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거리는 있었다.

“맹스크의 여백작이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네.”

이제까지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음에도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던 줄리앙이 마침내 조율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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